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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영웅 전설> by 박민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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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영웅 전설> by 박민규 |
| 서울 은평구 연서로4길 12 2층, 읽는공간 사색서재 |
작은 공간. 마음에 드는 책. 따뜻한 차. 조용한 조명. 언젠가 태평양을 건너 가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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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 구경하는 사회> by 김인정 |
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 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반드시 변화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이니, 오래 걸리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야 할 것을 균형있게 생산해 내는 매체로 머무는 건 어떤가.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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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수사> by 장강명 |
사실-상상 복합체, 현실과 물리세계, 사건과 의미, 객관과 주관,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신계몽주의, 그리고 점박이.
민소림의 죽음은 우발적이었다. 찰나의 모멸감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급작스런 살인. 그러나 과연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이었는가?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독서 모임의 공고문과 가슴팍을 칼에 찔린 채 살인자를 향해 내뱉는 민소림의 '네가 감히?'라는 눈빛은 묘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한다.
우월감-열등감, 찬양-모멸, 애-증, 미-추, 너-나, 그렇게 민소림-살인자는 한쌍을 이룬다. 각 개념의 짝은 정반대의 뜻을 지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의미가 뒤섞이고 교차한다. 한쌍 개념들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떨어질 수 없는, 모순을 견디는, 보다 친밀한. 논리는 논리의 세계만을 구축할 뿐, 현실을 담아낼 수 없듯, 현실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점박이.
작품 속 민소림의 아름다움을 접하며,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해언을 떠올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
민소림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할 줄 안다. 그것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몸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즐긴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 깊숙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겨놓는다. 섹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인물 '해언'은 자신의 신체,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가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언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이다.
민소림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들을 위해 (작품의 배경은 1990년대 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해언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여인으로 머문다.
그리고 점박이.
우리는 민소림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것은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오만과 경멸의 표현이었을까? 어쩌면 전혀 다른 성질의 감정과 태도가 섞여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자도 그저 짐작하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것은 살인자 본인에게도 급작스레 일어난 사건이다. 모멸감이 해소되었을까? 멈춰버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찬양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내'가 저지른 살인은 정당한 것일까? 이 세상은 '나'에게 정의로웠던가? 그렇게 20년 동안 이어온 살인자 개인의 사유가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만나는 순간, 즉 관념과 실체의 어지러운 충돌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형의 추천.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그 중 현대 소설의 비중은 꽤 낮은 편이다. 그나마 읽은 최근 소설들도 대부분 1940~1970년대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형의 책장에서 꽤 많은 장강명 작가의 책들과 조우했다.
형의 추천으로 바다 건너 멀리 가지고 온 책: <재수사>
형의 독서 취향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꽤 있기에,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거야."라는 형의 평을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읽기를 잠시 멈추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책의 뼈대를 이루는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 작품 속에 등장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개념: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이메일로 보내주신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비슷한 관점으로 답변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으로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도덕적 의무론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고실험인데, 당시 내가 교수님께 드렸던 답변이 장강명 작가의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과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답변은 주체의 도덕적 인식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와 더 가까운 타인의 도덕적 요구/요청이 어떤 도덕적 틀을 사용할지 결정짓는다는 요지의 답이었다.
미스터리와 지적유희가 어우러진 작품 덕분에, 겨울 방학 학과 사무실의 고요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제시 한'의 체포 장면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 2023
|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
사물과 사건, 그 역사에 관한 기억의 단절은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 언어, 문화,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침투해 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언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8)
개인의 단편적 장면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도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공동체의 기억, 모두의 유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또 멀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응시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결국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23, emphasis mine.)
지금껏 이어져 온 기억,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낸다. 그 간극은 우연하기에 급작스럽다: 기성 세대-전후 세대, 학교-집, 남성-여성, 섹스-낙태, 노동자-부르주아, 종교-아노미, 혁명-상품, 정치-자본.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과 다르게, 유채 씨를 뿌리거나 사과를 흔들어 따거나 죽은 나뭇가지로 단을 묶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지는 않았다. 학교 일정표가 계절의 주기를 대신했다. (...)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연스럽게 원래의 언어를 되찾았다.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 되는 몸에 밴 언어, 양쪽 따귀와 블라우스의 자벨수 냄새, 겨울 동안 구운 사과, 양동이로 떨어지는 오줌 소리 그리고 부모의 코골이와 엮여 있는 그 언어를 되찾았다. (pp.36-37)
사진 속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여자애들은 부르주아 층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자애들과 다르며, 더 강하고 더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너무 자주 어울리고 함께 파티에 다니면서 자신이 타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노동의 세계나 부모님의 작은 상점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왔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은 관련성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단지 지식과 문화 속에만 있을 뿐. (p.104-105)
전쟁에 대한 언급은 50세 이상의 입에서 나오는 허영심 넘치는 개인적인 일화로 축소됐고, 30세 이하는 그것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로 여겼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추모사와 꽃다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6)
그 누구도 도저히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녀도 그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허위 의식이 선사한 우월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의 맹렬함과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을 향한다. 나는 '나'를 표상한다. 동시에 '세계'로 이행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p.11-12)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p.55)
우리는 바칼로레아의 성공으로 사회적인 존재감을 부여받았다. (p.83)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앞설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단하고, 또 단순했다. 사회가 할당한 요구를 충족시킨 개인들은 손쉽게 통합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p.81), 텔레비전을 샀고(p.112), 어떤 이들은 농부에게 헐값으로 낡은 집을 사기도 했다(p.140). 동시에 그녀는-발칙하게도(?) -혁명을 꿈꿨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33)
그러나 세계는 생각보다 치밀했고, 유연했다. 딱딱한 정치는 흘러가고, 말랑말랑한 상품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존재의 결핍을 악(惡)으로 규정했던 철학은 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대신 존재(상품)의 과잉이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과잉은 곧 소멸을 동반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09)
시장경제의 질서가 강화됐고 숨 가쁜 리듬이 강요됐다. 바코드를 갖춘 구매품들은 은밀한 신호음 속에 일초 만에 가격으로 넘어가며, 계산대에서 카트까지 더 신속하게 통과했다. (...)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p.246)
결국 자본이 시간을 손에 넣었고, 개인은 상품 속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상품이 가벼워지듯, 모든 사물과 사건, 이를 담아내던 언어와 기억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그토록 처절하게, 손에서 빠져나간 그 모든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과 기억의 틈. 그 단절의 간극까지도.
쉬운 글은 아니다. 작가의 기억은 치밀했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기억을 뒤덮은 흙 먼지를 고운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은 지루하고, 텁텁하다.
사르트르 <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부르디유 <문화 자본, 아비투스 개념>.
책장을 넘기며 이 모두를 떠올린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좌절하고, 사유한다.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 2023
|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삶은 마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고, 그녀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할머니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추억들이 그녀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듯, 그녀들의 삶은 그 이상의 추억과 아픔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도동 집. 가을이면 마당 한 구석 모과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할머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달콤한 향기와 설탕을 유리병 속에 담아내던 그녀. 겨울 저녁을 기다리게 만들던,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던 그 유리병들. 할머니 머리맡에 있던 동전 주머니. 오백원 동전을 손에 들고 찾은 우리 동네 <목포 슈퍼>.
그리고 그녀는......몰락한 명문가의 딸. 재주 많았던 그녀의 조용한 삶. 잃어버린 기억. (할머니 강팽옥)
우리 가족들의 겨울철 별미. 큼지막한 이북식 손만두. 그리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빙-둘러앉은 가족들의 내기 윷놀이. 그녀에게 배웠던 민화투.
그리고 그녀는......고향에 두고 온 가족. 이곳에서 만든 가족. 유별나게 힘들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 어렵사리 만난 고향 가족들에 대한 실망. 떨쳐내지 못하는 지난 날의 회한. (외할머니 이정순)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번에는 작가들의 눈을 빌려 그녀들의 감춰진 뒷모습을 엿볼 뿐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어제 꾼 꿈 中)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무해해보이는 표현 속에 감줘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흑설탕 캔디 中)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척들은 할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베드 中)
그날, 거실로 다과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단어-과부.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먼저 살폈는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즐거움이 잠시 동안이지만 명백하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대한 유산 中)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 행 中)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정원 中)
Le Grand Cahier + La Preuve + Le Troisième Mensonge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
쌍둥이 형제는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하다. '선-악'/'미-추'는 그들 행위의 동기가 아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단지 그 뿐이다.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행한다. 그 어떤 망설임도 미동도 없이 행한다. 응답하는 자!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결코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게다가 후회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긴 침묵 끝에 신부가 말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서 다 보았다. 그 빵 한 조각, 하지만 벌을 내리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다. 너희가 그분을 대신할 권리는 없는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축복을 빌어도 좋겠니?"
"좋을 대로 하세요." (p.147)
루카스가 물었다.
"처형 때도 입회하셨어요?"
"아니야. 그는 내게 입회해달라고 했지만, 난 거절했지. 자네는 내가 겁이 많다고 생각하지?"
"글쎄요, 하지만 당신을 이해합니다."
"자네 같으면 입회했겠나?"
"그가 내게 부탁했다면, 그럼요, 했을 겁니다." (p.352)
세상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 진실은 거짓 위에 발을 딛고, 거짓은 진실을 내뱉는다. 그렇게 현실의 결핍을 환상 속 과잉으로 뒤덮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두 형제의 존재는 그들이 나눠가진 이름처럼 '우리'로 분화되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처럼,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존재의 결여, 견딜 수 없는 고독. 그렇기에 그들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 형제가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에도." (p.443)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p.452)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p.545)
삶의 이면이 곧 삶 자체일 때가 있다.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의 숙명이었고, 그녀가 창조한 작품 속 쌍둥이 형제는 그 과업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 <남자의 자리>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p.9)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이기도 하다. 어렵게 빠져나온 자리.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그의 삶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남의 밭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과 다른 신화들은 그를 비껴갔다. (p.15)'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노동자로 돌아가기 싫었던 아버지. 자신의 언어를 고집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이 멸시하던 세계의 일원이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 그렇기에 작가는 그저 글을 쓴다. 그의 삶이 우선이다. 문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견뎌온 생의 몸부림, 그것의 자그마한 일부다. 담담한 어조, 꾸미지 않은 시선, 건조한 문체. 그 외의 것은 필요하지 않다.
멀리서, 나는 내 부모를 그들의 몸짓과 말,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정제했다. 나는 그들이 <엘(그녀)> 이라고 발음하는 대신에 <아>라고 발음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방식을 새롭게 들었다. 이제 내게 자연스러워진 그 <점잖은> 몸짓과 올바른 언어 없이 그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만나게 됐고,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52)
| <섬>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
온몸으로 읽는 문장을 마주한다. 그것은 조심스레 다가왔고,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저 그 문장들을 이곳에 옮기려 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공의 매혹 中, p.25)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고양이 물루 中, p.36 & 40)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中, p.77 & 8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中, pp.96-97)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앎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無)의 섬뜩함이었다. (이스터섬 中, p.120-121)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적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 준다. (사라져 버린 날들 中, p.165)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글을 대신하여 작가와 역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pp.6-15)
| <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
도쿄 시민 집회,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하여 외쳤다. <영속 패전론>의 저자 시라이 사토시 또한 동일한 표현으로 자신의 저작 첫 문장을 시작한다. 참담하고, 슬프다. 분노하고, 암담하다. 그렇게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그들을 모욕했는가?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전후 '평화와 번영'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자의 냉정한 시선을 뒤쫓다 보면, 이미 기능을 다하고 죽은, 전후 체제의 껍데기를 지탱하고 있는 기만적 개념들을 마주한다.
전전(戰前)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전후 일본 사회 정-재계의 권력, 그에 기생하는 학계와 언론계가 누리는 혜택, 이를 뒷받침하는 이중 구조의 모순(전쟁에서 패했지만,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았다.)은 바로 '영속패전'으로 귀결한다.
다시 말해 '패전 후'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 종속 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부인)하는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 인식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패전은 이중 구조를 이루며 계속되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한 패전의 부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영속패전'이다. (p.61)
미국에는 패전으로 이뤄진 종속 구조를 한없이 인정함으로써 이를 영속화하는 한편, 그에 대한 보상 행위로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패배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패배의 부인'을 지속하기 위해 더욱더 미국의 졸개가 돼야 한다. 노예와 같은 복종이 패배의 부인을 지탱하고, 패배의 부인이 노예 행위의 보상이 된다. (p.88)
저자의 논증 과정은 매우 정직하고 냉철하다. 그리고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은 날카롭다.
현실적, 형이상학적 책임을 다루는 논의와 별도로 정치 차원의 명제, 즉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사실이 있다. 단순한 사실인 까닭에 경제적 성공에 따른 국민의 만족감 고양이나 진지한 회환과 반성에 바탕을 둔 부전(不戰)의 맹세 같은 주관적 차원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mphasis mine, p.57)
결국, 국가의 영토를 결정하는 최종 심판 단계는 폭력이다.즉 역사상 최근에 일어난 폭력(전쟁)의 결과가 영토 지배의 경계선을 규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p.68)
왜냐면 어떤 나라든 국가가 본래의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본성은 악이고 타국이나 타 국민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 정책은 애초부터 진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검열로 통제받는 형태로 시작된 전후 민주주의가 정의의 기초나 전후 일본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후 민주주의 개혁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던 사람들에게 에토가 퍼부은 비판의 핵심이다. (...)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 추구와 국내 사정에 따라 규정됐다. (p.134)
지금껏 가까스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이라는 망상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전후는 이미 종착점을 지나쳤다. 결국 바깥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저급한 내셔널리즘임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집착, 미국을 향한 일방적 구애와 비굴한 저자세 외교. 이를 통해 유지하려는 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지위(이 또한 허구에 기반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시인하기 두려울 뿐이다. 전후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이들의 몰염치와 방관자들의 비겁함이 빚은 허구가 그들을 짓누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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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극우의 정신 구조(=자민당)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한국 극우의 친미-친일 성향의 속사정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면,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by 박민규 (표절) |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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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 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 강동혁 역 |
'세상 모든 책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글과 그 글의 모든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에 관한 사랑이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책의 표지 만큼이나 경쾌하고 상큼한 사랑 이야기를 - 동시에 주인공 아서 레스의 삶에 깃든 지적 통찰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 기대하며 <레스>를 읽는다. 50세가 되기 직전 사랑이 떠나간다. 프레디가 결혼 소식을 전한다. 레스는 도망치듯 세계 일주를 결심한다. 칭송받는 천재 시인 로버트의 애인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소설 <칼립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간 미루어두었던 온갖 초청에 응한다. 결혼식에 가지 않기 위해서.
뉴욕 - 멕시코 -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모로코 - 인도 - 일본 -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인 레스는 불안하다. 자기 소설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전히 사랑에는 서툴고, 독일어는 형편없다. 사실 우리 모두가 레스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재의 삶에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랑에는 갈팡질팡한다. (뉴욕에 사는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은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맞는 거라면, 아서? 만약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맞다면? 그녀가 느낀 게 이 땅을 모두 박살 내는 어떤 거였다면?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거. 넌 느껴봤어? (p.212)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삶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아 / 하지만 내가 죽는 그날엔 / 네가 울게 되리란 걸 알아. (p.269)
그 무엇을 받아들이든, 레스는 여전히 순진하리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집에서 기다리는 프레디와 함께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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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다: "뭐야 이거? 뭐 이딴 식으로 글을 썼어?"
결국 원서를 찾아 읽는다. 재기 발랄한 문장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치(?) 있는 글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능(?)이 넘쳐 흘러서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감상평은 주관적이지만, 누군가 '퓰리처(풀-잇-서라고 읽든 뭐든)상을 받을만한 책인가?'라 묻는 다면: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헤밍웨이는 받았던 상을 반납할 듯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를 짚어본다: 번역!! 성의 없는 번역!!
산뜻해야 할 문장이 산만해진다. 작가의 개성이 넘치는 (뭐든지 너무 넘쳐요!) 문장이 철학과 석사 1년생의 겉멋 들어간 글로 탈바꿈한다. 일관성 없는 번역에 실망하고, 비문의 향연 속에서 좌절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이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본다.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탐구, 또는 사랑에 의한 삶의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단지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On Love; Essay in Love>의 톡톡 튀는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장을 덮는다. 옮긴이의 말도 읽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실패할 때도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 레스의 여행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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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송태욱 역 |
내가 저주해 마지않는 것은 누이나 그 밖의 몇몇 아가씨에게 독수를 뻗친 성범죄자 자체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로 아무 일 없이 이대로 끝나고 마는 내 처지다. (p.608)
"너 대신 죽어주지!" (p.658)
자아, 나가자. 마음 내키는 대로 들판을 떠돌아다니며 다시 멋진 단독 행동을 실컷 즐기자. 그리고 부침 많은 일생을, 화복(禍福)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이 세상을 마음껏 즐기자. 하지 않는 것이 무난한 일 같은 건 이제 하나도 없다. (pp.670-671)
다시 파랑새의 밤이 시작되었다. 파랑새는 모든 원죄를 대신 떠맡아줄 것 같은 소리를 산들에 메아리치게 한다. 오보레 강의 수면에 비친 나는, 아름답고 맑게 갠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보다, 그리고 반딧불이보다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 (pp.67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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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털리 부인의 연인> by D.H.로렌스 / 이인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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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털리 부인의 연인> by D.H.로렌스 / 이인규 역 |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이성과 수치심 따위를 모두 내던진 순전한 관능이 그녀를 뿌리까지 뒤흔들었고, 그녀의 마지막 속살까지 완전히 다 벌거벗겼으며, 마침내 그녀를 완전히 다른 여자로 태어나게 했다. 그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육욕의 탐닉도 아니었다. 그것은 날카롭고 뜨겁게 타오르면서도, 영혼을 활활 불살라버리는 관능의 불꽃이었다. (p.163)
그 짧은 여름 밤 동안에 그녀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여자가 수치심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오히려 그 수치심이 죽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수치심은 바로 두려움이었는데, 우리 몸 깊숙이 유기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그 수치심이, 다시 말해 우리 육체의 뿌리 속에 깊이 웅크리고 있어 오직 관능의 불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는 그 오래디오랜 육체적 두려움이, 마침내 남자의 남근에 의해 일깨워지고 추적당해 쫓겨나고 만 것이며,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밀림 바로 한가운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pp.164-165)
(Y와 J가 좋아했던, 그리고 좋아하는 책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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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o Would Win?> by Jerry Pallotta & Rob Bolster |
아이들, 특히 사내 녀석들을 자극하는 그 물음: 누가 이길까?
책 제목과 표지만 보면 그저 그런 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책 속은 꽤 알찬 정보로 가득하다. 각 동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기 쉽고 재미나게 설명하고 있다. 싸움의 승패도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4~6세)에게 강력 추천한다. 단, 아이가 좋아하는 동물이 싸움에 지게 되면 슬퍼할 수도 있다.
도대체 레드 팬다는 왜 싸움에 출전했던 것일까? :)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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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몬> by 권여선 |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64)
해언의 죽음. 그 순간의 사라진 조각들을 모아보자. 상상해보자. 신정준은 감히 해언을 범하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속살을, 그저 때가 되어 발갛게 피어오른 그녀의 여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조차 무심하게 대하는 육체를 그가 무슨 수로 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해언의 아름다움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저주했을 것이다. 탐할 수 없다면 부숴버리자. 그녀의 무심한 생을 으깨버리자.
한 생명이 몸부림치다 부서지고 폭발하던 그 격렬한 순간이 그냥 그렇게 결정됐을 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다. 어찌할 도리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끌어안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생이다. 그런데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신정준은 그 자신의 아이 예빈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몸을 들썩인다. 잠든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모른다. 그 자신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는 무심한 해언의 얼굴을, 순간 자신을 들끓게 한 그녀의 거뭇한 음부를, 세상에 던져지고 방치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태림은 울고 있는 남편이 무섭다. 그래서 시를 쓴다. 아이를 잃고, 기도하고, 또 시를 쓴다. 자기를 속이고,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를 쓴다.
다언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혜은이를 엄마에게 데려왔지만, 그녀 자신의 삶은 사라졌다. 원한 적 없이 선택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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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계자들> by 김언수 |
NYPL에서 주관하는 세계 문학 축제 (NYPL's World Literature Festival International)를 통해 [김언수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듯 하여 책을 집어 들었다. 로렌스(D.H. Lawrence)의 소설을 읽다 말고, 김언수 작가의 책 <설계자들>을 읽는다. 그리고 혼자 묻는다: "현대 소설의 작법은 이런 것인가?"
급하게 읽었다. 영화 시나리오 한편을 읽은 기분이다.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보니 차라리 영화 한편을 본 기분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급하게 읽었다."는 틀린 표현이다. "빠르게 혹은 급하게(?) 읽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듯 하다. 이야기의 진행은 막힘이 없고, 그가 창조한 세계는 익숙하며 낯설다. 작가의 노력 덕분인지 '익숙함'이 먼저 다가온다.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가 드러나는 작품은 아니지만, 작가가 창조한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은 꽤 매력적이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에 막힘이 없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소설의 한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대체될 때면 이전 장소 속의 인물들이 암막커튼 뒤로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물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지 않다. 작가가 창조한 매력적인 인물들은 더 매력적일 수 있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다가 지나온 장면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자 책장을 뒤로 넘기거나, 그 장면을 곱씹어보기 위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게 할 만큼의 매력은 없었다는 말이다. 가령 추가 놓고 간 독일제 헨켈 부엌칼이 래생의 손에 들렸을 때, 이 소품은 인물에 매력을 부여하지만, 이는 그저 그 순간의 매력에 그친다. 시종일관 냉소적인 래생의 말투도 마찬가지다. 그가 미토와 사팔뜨기 사서를 '쪼다'와 '등신'이라 말하는 장면(p.614)은 조금 지겹기까지 했다. 이는 아마도 책 전반에 걸쳐 래생에 대한 묘사가 단조롭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암살자' 정도로 기억될 뿐이다. 오히려 그의 친구이자, 지질학을 전공한 트래커 정안을 둘러싼 서사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래생이라는 인물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공과 함께한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암살자의 습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과잉과 결여의 모습 등을 더 상세히 다루었다면, 혹은 미사와의 교류 속에서 미묘하게 변한 래생의 감정선을 좀 더 정교하고 미세하게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래생을 단조롭게 묘사한 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채색 배경을 지닌 특색 없고 지루한 암살자. 현실의 뒷골목이 세상의 어둠 속에 묻혀있기 위해서는 결코 매력적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무지해야 한다.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라야 한다.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데 무엇하러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고민하겠는가. 그러니 모두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울타리 속에서만 꼼지락거리며 일을 한다. 그 작은 울타리들이 모여서 터무니없이 크고 복잡한 커넥션과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힌 설계가 탄생한다. (p.194)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3.2022
|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by 유성호 |
과거와 현재의 죽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바로 예감이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예감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p.196)
옛날에는 인생의 시점이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했으며, 자신이 어느 시점에 죽을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시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제쯤 자기가 죽을지를 예감하고 나의 내레이션으로 나의 인생 스토리를 짤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요즘은 불분명한 그레이존 때문에 자신이 정확히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우울해하다가 적극적인 수용, 예컨대 초월과 승화라는 조금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겨를이 없이 죽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p.203-204)
죽음에 대한 '초월'과 '승화'는 앞서 말한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맞는 5단계 중 마지막 수용을 거친 후 또다시 도달해야 하는 최종적인 단계다. (...)그런데 우리 현대 의학은 그러한 승화를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 현대 의학에 의해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p.219-220)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원제: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by 니코스 카잔자키스 / 유재원 역 |
" (...) 계산을 분명히 합시다. 만약 내게 강요하면, 난 떠납니다. 이건 분명히 아쇼. 내가 인간이라는 걸.""인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오?""보쇼, 자유인이란 거요." (p.42)
"아직도 살아 있수다. 여긴 무지무지 추워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수다." (p.611)
"난 평생 하고, 또 하고, 또 했지만, 결국 한일은 별거 없수다. 나 같은 인간은 천 년을 살아야 마땅한데......잘 있으슈!" (p.623)
"나는 내 인생하고 맺은 계약 기간이 없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순간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뗍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외길이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브레이크를 사용하죠. 하지만 나는, 대장, 바로 이 점에서 내 고유한 가치가 빛나는데요, 이미 브레이크를 던져버렸죠. (...)" (p.303)
수도원 산턱에 설치한 케이블을 마을 사람들과 수도사들 앞에서 선보이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잘못된 기울기 계산, 기울어진 나무 기둥, 그 위에 올라탄 나무들은 조르바의 깃발 신호에 맞춰 하늘을 날아 땅에 곤두박질 친다. 굉음과 불꽃을 내뿜고, 나무 파편이 사방에 튄다. 사람들은 줄행랑 쳤고, '나'는 조르바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녜요!" 조르바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다시 깃발을 들었다. 그는 절망적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끝장내려고 서두르는 것 같아 보였다. (pp.574-575)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라이,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깃발을 휘젓는 조르바의 모습이 내 눈앞에 그려진다. 살아서 펄떡이는 어린아이의 생명력을 발견한다. 그는 마땅히 천 년을 살아야 할 인간이다.
'관념 - 육체'로 대비되는 '나 - 조르바'는 한 인간의 성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안주하는 자신과 방황하는 자신 사이에서 주저한 적이 있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조르바는 끝없이 방황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는 욕지거리를 뱉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의 삶도 단정짓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며 자유다.
"난 말이오. 조르바를 위한 기준이 따로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준이 따로 있어요. (...)" (p.230)
고백건대 나는 결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자를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기준일 뿐이다.
이곳에 짧은 감상평을 남기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별로 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다시 한번 더 읽으면 된다.
끝으로 이 책의 역자 유재원 교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외국 문학을 접할 때면, 특히 좋은 작품을 만날 때면, 언제나 '원작의 언어가 내 모국어 였다면......'이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리고 동시에 역자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번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속에 흐르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읽을 때 마다, 아쉬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마음 한가득 품는다. (그래도 오탈자가 있긴 했습니다. 편집자 분!) 특히 역자가 선택한 '대장'이라는 번역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나'와 '조르바'의 관계, 작품 속에 그려진 크레타 섬의 풍경, 그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조르바가 화자 '나'에게 갖는 애정과 질책, 기대와 놀림, 때로는 존중과 조소까지도 동시에 드러나는 유일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역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by 김초엽 |
미래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 발전된 기술로도 감출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 유약한 인간이 마주한 타자의 얼굴. 이 모두를 바라보는 작가 김초엽의 시선이 따뜻하다.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pp.80-81, 스펙트럼 中.)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188, 감정의 물성 中.)
"내 생각에 재경 이모는 인어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 (p.269,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中.)
각 단편 속 작가의 물음들이 특별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만큼 참신하지는 않다. 그러나 미래를 그려내던 작가의 시선이 현재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 SF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기존의 물음을 새롭게 채색한다. 그녀의 시선은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타자의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연약하다. 그렇기에 김초엽 작가의 글은 한 움큼의 온기를 품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주체이며 동시에 타자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를 애써 외면해왔던 우리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의 의도였다면, 그녀는 작가로서 분명 성공적인 첫걸음을 옮겼다.
독자로서 김초엽 작가에게 작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