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7월 24일 토요일

북향 도로

-북향 도로-


곁을 내주지 않은 첫 사랑 그 속살과도 같았던

청춘은 언제나 파랗고 어두운 바다 속 이었다

허우적거리면 기어코 손에 닿을 것이라 믿었던

뜨겁고 끈적한 모든 것들이 무서워질 때 즈음

나는 북쪽 길을 찾아 떠난다

 

쓰다 만 청춘에 용서를 빌고

떨군 사랑은 집어 들고 싶지만

굽어진 산 허리가 이미 초록을 거두었다

북쪽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까닭이다

 

인연의 숨결이 북쪽으로 흘러간 때를 추억한다

던져진 시절에 몸부림 치던 나는

연붉은 길 위, 눈 감은 채,

옅어진 울음을 놓아준다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은 남겨두자

내 것이 아닌 사랑도 사랑이었으니

남들은 창을 내지 않는 

서늘해진 바람이 불어오는

나는 지금 북쪽 길을 밟는다

2020년 5월 8일 금요일

단막극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카페의 구석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입구가 마주 보이는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기엔 토요일 오후 두 시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사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였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는 물음을 대신하여,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남성과 가벼운 눈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직 학생 같기도 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듯 보이는 그 남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 자리에 돌아와 앉은 그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소설책을 주로 읽었지만, 그날 그녀가 가방에 넣어서 가져온 책은 어느 시인의 여행 관련 책이었다. 

이런 것도 다시 유행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글의 첫 문장부터 어색하게 느껴졌다.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시어들이 산문의 온전한 문장 안으로 들어가자 부담스럽고 과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여행을 할 때면 눈으로 보기 보다는 소리를 담아온다는 둥,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바람의 결을 바라본다는 둥, 자신이 겪은 세상은 남들과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는 듯 과시하는, 정돈되지 않은 감상문이었다. 이 작가에게는 산문을 시처럼 쓴 것도 일종의 실험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글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싫어하는 게 뭐예요?"
"왜 그런걸 묻죠? 보통은 좋아하는 것을 묻잖아요.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작가라든지, 하다못해 좋아하는 색이라든지 말이에요." 읽던 책을 엎어 놓으며 그가 되물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좋아하는 것 보다는 싫어하는 걸 아는 편이 수월해요. 참고로 저는 지금 이 책이 싫어요." 여자가 자신이 읽던 책의 표지를 보여주며 답했다.
"그런데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남자가 다시 되물었다.
"듣고 보니 맞네요. 정정해야겠어요'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으로."

대체 대화를 나눈다는 게 뭘까?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면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이에도 대화가 가능할까? 그녀 자신의 질문이 또 다른 물음들로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 넣으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재촉하듯 남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싫어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 뭐랄까. 욕망에 대한 사람들의 어설픈 위선이 싫어요. 그런데 자신들의 욕망을 유치하게 드러내는 위악은 더 싫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만큼 최악은 없으니까요.”
"결국 위선이든 위악이든 서툴고 미숙한 것들이 싫은가 보네요?"
". 그렇긴 한데, 사실 다들 누구나 유치하고 어설프게 행동하고 말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적어도 그 순간들을 떠올렸을 때 부끄럽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위선이든 위악이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들 미성숙한 인간들이거든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몸서리쳐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본인의 판단 기준이 분명하네요. 머릿속에 뭐든지 그렇게 잘 정리되어 있나요?"
"기준이 없으면 불안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을 할 때마다 정리해서 기억해두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 아마도 제가 아직 성숙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미성숙한 단계를 이제 막 빠져 나왔다고 해서 단번에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그가 답할 때마다 중간에 섞여 들어가 있는이라는 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성실한 얼굴빛과 닮은 소리였다. 대화 속 물음들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말투도 듣기 좋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의 이런 태도와 말투 덕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카페 옆자리에 앉아서 귀찮게 말을 걸고 있는, 방금 처음 본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무거워서 당혹스럽다거나, 너무 가벼워서 장난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어쩌면 지금 그녀의 이런 호감은 오후 두 시라는 애매한 시간과 그 시간을 어정쩡하게 채우던 어느 시인의 여행 산문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대화는 싫지 않아요.”
?”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의 말이 그녀에게는 마치 질문같이 느껴졌다.
지금 이 대화는 좋다고요.” 남자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저도요.”                           

가볍게 말하며 뒤집어 놓은 책의 겉 표지를 훑어 본다. 시인의 이름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껏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얼굴 생김새와 목소리도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 끝이 이 책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여전히 밝았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야 할거 같아요.’라는 말 대신에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테이블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들어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빠져나갔다. 마시던 커피 잔을 카운터 위에 올려 놓고 아르바이트생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본다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줄곧 성실히 답하던 방금 전의 그 얼굴로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대화의 끝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19년 2월 1일 금요일

이른 퇴근

-이른 퇴근- 

젊은 죽음 앞
서럽고 억울한 소리들도 잠시 침묵했다
밤 하늘만이 망설임 없이 그날의
노동을 끝마쳤고,
너무 일찍 돌아온 자식 앞에서 
아비는 말이 없고, 어미는 망설였다

내 자식일리 없다.

부모의 당부가 아니어도, 
넘치는 것 하나 없이 사는 일
그 일이 언제나 조심스럽다 
일 마친 새벽 달이 남몰래 그 속살을 채우 듯
그렇게 끌어온 생이다
여태껏 팔딱여보지 못한, 기어코 찾아온 청춘을 
끝내 숨기지 못하고
토해내 듯 피어나려던 그의 몸뚱아리가
요동치며
시퍼렇게 우는소리를
꼬꾸라지는 소리를 
누구 하나 듣지 못했다

살게 해주십시오. 사람답게.’

살아남은 그의 옷가지가 
너풀거리며 그의 몸을 떠난다
아비는 주저했고, 어미는 단호했다

살거라. 내 자식아. 이제라도 살거라.’

그의 새벽 퇴근길도 
가끔은 푸르게 
시렵지만 떨렸고 
단단한 쇳덩이처럼 마냥 버텨야했던 그 생도 
아주 가끔씩 말랑거리며 수줍었다

'고작 이게 내 생일리 없습니다.'


2018년 7월 20일 금요일

형이상학적 확신


-형이상학적 확신-

앞마당에 가지가 열렸다
짙고 매끈한 보라색 민낯이
가느다란 대 아래로
출렁이며 매달려 있다

여름 날
너의 삶이
그리도 짙게 익었다

넘겨받은 생을
살아내는 일이
아마도
이런 것이다

이제껏 
덜어 낸다 했지만
도리없이 익어가는 일

매끈한 네 몸둥이가
너의 삶이 아니 듯
자라난 마당을
구차스레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여린 목구멍에
햇살 한 움큼을 욱여넣 듯
속절없이 그 속은
뜨겁고 끈적해져 간다

2018년 4월 21일 토요일

저녁 밥상, 그 후에

-저녁 밥상, 그 후에-

이 동네에서 더 이상 너를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모든게 서러워졌다

피곤하다며 놀이터에 가지 않았던 날이라던지, 아이들 신발은 금방 못 신게 된다며 넉넉한 신발만 찾던 어느 저녁의 시간이라던지, 이 동네 만한 곳이 없다면서 어디로도 놀러가지 못한 지난 여름이라던지이 동네에서 더 이상 너를 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모든 게 슬퍼 보였다

식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접이식 책상 한켠, 아내와 아이의 밥상이 휑하던 그날 저녁, 창밖으로 간신히 보이는 달빛의 언저리는 파르스름하니 시려웠다.

시큰한 콧마루를 연신 꿈트럭거리며 엉켜붙은 밥알들을 치우고, 네가 흘린 국물을 닦아냈다.

수년 전, 함께 고생스런 여행을 하자며 결혼이라는 걸 이야기 했던 내가 미웠고, 그 말을 듣고서는 행복할 수 있을거 같다고 말하던 아내의 미소가 서글퍼졌다

고작 열 걸음으로 집 한쪽 끝에서 끝으로 갈 수 있는 그 거리마저도 다 채우지 못할 울음을 터뜨렸다

자고 있는 너를 깨울까 싶어 그 울음마저 조심스러웠다.

저녁 밥상을 치우고 난 후, 그 날 저녁엔 모든 게 서럽고 슬프고 사랑스러웠다.

그날 따라 저녁 밥상이 새하얗고 단정했다.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아, 온기여!

-아, 온기여!-

새벽 냉장고의 문을 열자 시계의 눈금이 움직인다. 그녀의 눈금이 주변을 살피자 나의 눈금은 움츠러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 즈음, 지금의 기억이 내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여지를 남겨놓는 그녀를 보았다. 생각나는 것들: 구겨진 종이의 주름살. 반달 모양으로 잘려나간 그녀의 손톱. 정신 쇠약에 걸린 책 속의 밑줄. 평생을 읽지 않으리라 다짐한 한 무더기의 책. 뒤엉켜 있는 옷가지. 이 모든 것들을 생각 없이 바라보며 서로를 살핀다. 지금 이 시간에 모두가 무사하다. 그저 한 모금의 물에 젖어버린 목구멍이 삐걱거린다. 내일 아침이 왔을 때 세상을 알아듣지 못해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그래서 한 푼이라도 속을까 무섭다. 지금껏 그저 그런 보통의 순간들조차 예상을 벗어났다.

예전에는 나와 그녀도 연애를 했다. 언어를 가져보진 못한 민족이 장벽 너머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듯 우리는 서로를 안고 서로의 목소리를 더듬었다. 너의 언어가 들리자 나의 언어는 흔들렸다. 주변의 모든 것이 열기를 못 참고 증발해 버리고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고백했다. ‘떨린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너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고 싶다.’ 무겁지 않게 너를 끌어안고 가볍게 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너의 혀는 오후 다섯 씨의 팔 다리 마냥 늘어질 것이고, 나의 뿌리는 또 다시 단단해질 것이며, 너의 손이 앞을 향할 때, 나의 시선은 굽이쳐 너의 목덜미 뒤로 돌아나갈 것이다. 그저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이 덜컹거리다 말 것이다.  

2017년 5월 1일 월요일

엄동설한

-엄동설한-

보기 좋게 널브러진 몇 권의 책들과 책상 위에 엎어진 그의 시간들
자신의 남편이 꽃을 피우지 못 할 마른 나무라는 것을 그 여인은 안다
아침마다 남편을 깨우는 그녀의 눈에선 투명한 꽃이 핀다
그가 부리는 시기와 발작이 꽃의 거름이 된다

캄캄한 새벽 바람 중에 부유하는 몇 톨의 글자가
그의 손끝 마디에 걸터앉은 채 눈을 감는다
남편은 눈 감은 채로 지난 반성문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오래된 것들을 태워 땅 속에 묻으면 몇 뼘의 무덤이 생겼다
그렇게 그는 간신히 아내의 이불 속에 온기를 채워넣었다

다음 날 아침 마른 몸을 물에 적시는 남편을 생각하며 쌀을 올렸다
남편이 부탁한 일은 터져버린 티셔츠 한 장의 바느질이 전부였으나
뜨거운 밥 한끼를 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은 삐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새로 든 집에 올 때부터 기울어져있던 나무바닥은
남편의 가슴팍 마냥 바짝 말라 올 겨울 땔감으로나 써야 할듯하다
오늘 아침 그녀의 눈두덩이에는 투명한 눈이 쌓였다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앵두라는 고양이

-앵두라는 고양이-

고양이의 약점은 목덜미
야옹 야옹 야옹 내 목덜미를 놓아줘

늘어진 너의 하얀 배를 만지면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야옹 야옹 야옹 대신 내 턱을 긁어줘

오래 오래 같이 있으려면 밥 좀 그만 먹어야 해
야옹 야옹 야옹 물 말고 닭고기 도시락을 뜯어줘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열 손가락 사이에

-열 손가락 사이에-

당신, 다섯 손가락 사이에는
이어붙인 낮과 밤을
또 다른 다섯 손가락 사이에는
내 이불의 저 안쪽을 잘라 달아 드릴게요

그러면, 더 이상 이불이 아닌
그 천 조각으로 당신의 얼굴을 닦아 주세요
낮과 밤으로 당신 눈을 비벼 주세요
그리고 새벽에는 밑으로 들어오세요

2017년 1월 25일 수요일

당신

-당신-

당신과 주고받았던 속삭임이
하나의 선이라면
출렁이는 선들로 가득한 세상 속
아주 사소한 인사말처럼
한 칸의 비좁은 방 속에서 주고받았던 그것이
그저 평행의 선이 될 수도 있었다면
보통의 일상에 내버려진
극히 평범한 일이라면
가령 어제까지의 일을
먼지 쌓인 책상 위 달력 속에서 마주하는 일과 같이
눈에서 나와 눈으로 찾아들던
당신과 나누었던 수 많은 빛과 선의 비행이
필연과 기적의 파티가 아니었다면
설령 정말로 그렇다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마주하고 싶은 그것은
순례자의 여행길 첫째 날, 교(驕)한 마음을 조금도 엿볼 수 없는
새로이 삶을 품게 된 여느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임을
그것만을 당신께 드리고자 합니다.

2016년 1월 1일 금요일

꽃잎

-꽃잎-

꽃잎은 의자가 된다
보고 있으면 투명한 살갗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얼마간의 세계가 있듯
우리가 앉지 못하는 연약한 의자도 있다
연약한 꽃의 입
불안한 입술이지만 붉은 빛
바람을 후 불면
날다가도 앉는다
그 바람에
꽃잎의
배가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