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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6일 화요일

미당(未堂)의 언어

雨中有題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 버리듯
나도 이젠 고로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소나기 속 청솔 방울
약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 법도 해라.


추운 겨울,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데우며 미당(未堂) 서정주의 소리를 들여다 본다. 
그의 언어는 아득히 깊은데, 그의 삶은 부끄럽고, 그의 눈길은 이렇게나 맑은데, 그의 뒷모습은 구부져있다. 마음 놓아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의 시를 외면하기도 어렵다. 

그의 언어를 살며시 엿보며,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아름답고 유약하다. 
순수하고 부정하다. 
사랑스럽고 수치스럽다. 
세상이 무서워 고개를 이불 속에 파묻고 있는 미당의 떨리는 뒷 모습을 상상한다. 타고난 재주를 담아내지 못하는 그의 불안한 심성을 탓한다. 

아. 하나의 삶도 헤아릴 길 없이 막막하다.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독서) 지구 영웅 전설 by 박민규

 

<지구 영웅 전설> by 박민규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읽고 박민규 작가의 <지구 영웅 전설>을 읽는다. 이 얼마나 위대한 도약인가! 두 소설의 상이한 주제, 문체, 호흡, 분위기.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두 작가의 엇갈리는 시선이다. 헤세는 먼 나라, 먼 옛날의 성인 싯다르타의 삶을, 박민규는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 두 시선을 따라가던 나에게 떠오르는 단어: 오리엔탈리즘. 

'아하! 당신들은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군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 나 자신도 역시 그들의 시선을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 싯다르타와 바나나맨은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 아시아/동양으로 함께 묶기에는 너무 다른 둘이다. 깨달음을 향해 구불구불, 천천히, 홀로 발걸음을 내딛는 싯다르타와 바나나맨이 되자마자 "맥도널드에서 네 개의 빅맥세트와 로빈의 치킨버거를 산 후, 월마트에 들러 원더우먼이 부탁한 탐폰을 사오는," (p.52) 미국인도 백인도 아닌 그는 너무나도 다르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p.52) 

슈퍼맨의 한마디가 그를 위로하고, 배트맨은 곧 '마운틴'을 한다. 원더우먼은 섹스 에너지를 높여 정의를 정착시키고, 아쿠아맨은 모든걸 열어젖힐 기세다. 한가할 때는, 힘도, 돈도, 아무것도, 갖지 못한 로빈의 신세한탄을 듣는다. 자유세계를 수호하고, 정의를 확립하는 일은 이토록 수고롭다.

 '잉글리쉬'가 있기에 현실을 살아내고 있던 그가 다시 슈퍼맨을 만났을 때의 희열이 내게도 느껴진다. 율무차 두 잔을 뽑아서 건내던 그의 공손한 손을 그려본다. 율무의 효능을 읊조리며 '전천후 건강식품'을 권하는 그에게 슈퍼맨의 슈퍼함은 쿨한 응답을 내놓을 뿐.

"너나 마셔" (p.167)

아하! 그는 미국인이고 백인이라서, 우리의 선조들이 전승한 영양식품이 쓸모 없으리라. 평범함이 어찌 슈퍼함을 이해하랴. 그렇기에 바나나맨은 그와 비슷한, 평범한 우리에게 묻는다.

"그런데 왜 이토록 영어를 배우려고 애쓰시죠?"

 (...)

박민규 작가의 문장은 개성 넘친다. 마치 '정리정돈은 필요없고, 난 이 말을 하고 싶소!'라고 외치는 듯 하다. <지구 영웅 전설>의 완성은 그의 다음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이어지는데, 그게 너무나도 안타깝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나는 바나나맨에게 당당히 외치고 싶다.

"나는 영어를 배우려 애쓰지도 않고, 영어를 잘 하지도 못하지만, 슈퍼 영웅들의 격전지 한복판에서 살아남았어요!"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독서) 고통 구경하는 사회 by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by 김인정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사적 감각을 언어적 표현으로 발화할 때, 이 문장은 더 이상 '사적 언어'가 아니다. 발화자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의 자리, 쓰임, 문법, 문맥을 이해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언어 공동체의 참여자로서 자신의 내감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혼잣말이라 할지라도.) 

 '사적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대 논증은 언어 습득과 사용을 위해 '이미 마련된 자리'를 요청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개념이 사회적 실천의 통로가 될 수도 있을까? 이를 좀더 확장된 논의로 이끌 수 있을까?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김인정 기자/작가의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는다. 내 눈은 작가의 잘 정돈된 문장을 따라가면서도 책 뒷편에 떠오르는 몇몇 단어들을 힐끔거린다: 얼굴, 시선, 틈, 아픔, 타자, 슬픔, 상실, 고통, 언어. 우리가 마련한 자리는 그들에게 충분했던 것일까? 그들의 울부짖음과 호소는 우리에게 닿았던가? 그들이 가까스로 내뱉은 몇 마디의 말이 활자가 되어 지면에 실리고, 음성으로 기록되어 전파를 탄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전의 외침들과 뒤섞여 어딘지 모를 구석에 켜켜이 쌓여간다. 잠시 후에 뒤따라올 또 다른 외침을 기다리면서. 주목받지 못한 목소리는 광장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그들의 아픔은 결코 내것이 될 수 없음을 알지만, 그들의 언어를 가로막는 장벽은 사라져야 한다. 이처럼 당위를 외치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타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인가?'

주체의 인식, 행동, 가치, 언어, 존재는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하고,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주체의 정당화가 타자를 배제한 채로 가능할까? 타자가 지닌, '나'와 유사한 감각, 언어, 문화, 양식, 인식을 매개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비록 자주 어긋나고, '나'의 기준을 벗어나고, 서로 다른 언어가 이해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할지라도 말이다. '주체'라는 틀에 갇혀있는 '나'는 타자의 존재가 낯설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나는 아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그들의 요구 앞에 선, 나의 윤리적 응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우리 안에 '이미 마련된 자리'를 조금씩 넓혀갈 수 있을까?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고, 언어의 장벽을 낯추고, 문화의 다채로움을 수용하고, '어긋남'이라는 새로운 빛깔로 광장을 채워나간다. 이는 매우 더디고, 때로는 지루하고, 결국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느새 '우리'로 확장된다. '나'의 결단이 '너'를 향하는 순간에 비로소 윤리는 가능하다. 

기자의 역할, 한계, 고민. 그리고 깊은 성찰. 그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아름답고, 그녀의 시선은 슬프지만 강인하다. 이야기 속 대상에 애정이 담긴 글이 갖는 질감이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언제나 내 인식 바깥의 타자들을 염두에 둔다. 그들에게 기꺼이 응답하려는 용기가 그녀의 글에 배어난다. 
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 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반드시 변화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이니, 오래 걸리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야 할 것을 균형있게 생산해 내는 매체로 머무는 건 어떤가. (p.238)
세상은 복잡다단하고, 언제나 그대로일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변한다. 개인의 소망은 미약하고, 내가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는 거대한 성벽으로 남아있다. 놉고 단단한 벽에 깨져버린 계란의 편에 서겠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김인정 기자/작가의 시선이 마치 그러하다. 

2024년 4월 6일 토요일

여가와 관조 #3: 선거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너와 나의 생각은 서로 다르고, 그렇기에 너와 내가 봐라보는 사실도 서로 다르다. 

나는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철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가졌던 '정치 철학'도 결국 '철학'에 방점이 찍혀있다. 따라서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지극히 평범하다. 여전히 '비판적 지지'의 기능을 신뢰하며, 정치 과정의 역동성을 지지하면서도 충돌과 조화를 동반하는 끊임없는 대화를 기대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나의 태도가 꽤 보수적인 입장일 것이다.

아무튼...

'윤석열' 대통령. 그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당선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의 반지성적 태도와 언행을 보고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2024년 3월 27일.

바다 건너 먼 곳에 살고 있지만 (예전 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이곳도 복잡한 일들이 넘쳐나기에...) 여전히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투표를 마쳤다. 엄청나게 긴 비례정당 투표지와 매우 짧은 지역 국회의원 투표지를 마주하고 고민없이 도장을 찍었다. 윤석렬 대통령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남은 임기 동안에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기에 이번 선거는 나의 실망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홀로 몇몇 물음을 던져본다.

'투표는 개인들의 사적이익을 표출하는 수단일까?'
'지지하는 정당의 승패에 따른 자존심의 문제일까?'
'공공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표를 던지는 시민들도 있을까?'
'대의 민주주의, 그 이후의 새로운 방향은 가능할까?'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책무를 내려놓았고, 그들에게 대중은 통제하고 유인하는 대상이었다. 권력은 언론을 길들이고,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것은 그들의 권위가 아니라, 시민들의 연대였다. 애초에 그들은 권위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시민 사회의 연대는 희미해지고, 적대와 갈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은 더 이상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는 최소한의 지적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능력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새로운 시각과 개방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윤석열 본인은 물론이고, 현 정부 관계자들은 지적으로 뒤떨어진다. 그렇기에 기대가 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 한국의 정치 대부분은 어이가 없었고, 가끔 분노를 느꼈다.  

윤석열은 박근혜와는 다르다. 사실 그는 정치적 자산이 없다. (본인 아버지에 대한 열성적 지지를 정치적 자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번 선거가 '윤석열 정부 심판'이라는 틀에서 치뤄진다면 현 여당의 의석은 100석도 넘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해본다. 

감정이 요동치는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냉소만이 남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표를 던졌다.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독서) 재수사 by 장강명



<재수사> by 장강명

 사실-상상 복합체, 현실과 물리세계, 사건과 의미, 객관과 주관,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신계몽주의, 그리고 점박이.

 민소림의 죽음은 우발적이었다. 찰나의 모멸감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급작스런 살인. 그러나 과연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이었는가?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독서 모임의 공고문과 가슴팍을 칼에 찔린 채 살인자를 향해 내뱉는 민소림의 '네가 감히?'라는 눈빛은 묘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한다. 

 우월감-열등감, 찬양-모멸, 애-증, 미-추, 너-나, 그렇게 민소림-살인자는 한쌍을 이룬다. 각 개념의 짝은 정반대의 뜻을 지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의미가 뒤섞이고 교차한다. 한쌍 개념들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떨어질 수 없는, 모순을 견디는, 보다 친밀한. 논리는 논리의 세계만을 구축할 뿐, 현실을 담아낼 수 없듯, 현실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점박이.

 작품 속 민소림의 아름다움을 접하며,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해언을 떠올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

 민소림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할 줄 안다. 그것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몸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즐긴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 깊숙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겨놓는다. 섹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인물 '해언'은 자신의 신체,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가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언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이다. 

 민소림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들을 위해 (작품의 배경은 1990년대 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해언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여인으로 머문다.     

 그리고 점박이. 

 우리는 민소림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것은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오만과 경멸의 표현이었을까? 어쩌면 전혀 다른 성질의 감정과 태도가 섞여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자도 그저 짐작하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것은 살인자 본인에게도 급작스레 일어난 사건이다. 모멸감이 해소되었을까? 멈춰버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찬양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내'가 저지른 살인은 정당한 것일까? 이 세상은 '나'에게 정의로웠던가? 그렇게 20년 동안 이어온 살인자 개인의 사유가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만나는 순간, 즉 관념과 실체의 어지러운 충돌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형의 추천.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그 중 현대 소설의 비중은 꽤 낮은 편이다. 그나마 읽은 최근 소설들도 대부분 1940~1970년대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형의 책장에서 꽤 많은 장강명 작가의 책들과 조우했다. 

형의 추천으로 바다 건너 멀리 가지고 온 책: <재수사>  

 형의 독서 취향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꽤 있기에,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거야."라는 형의 평을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읽기를 잠시 멈추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책의 뼈대를 이루는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 작품 속에 등장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개념: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이메일로 보내주신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비슷한 관점으로 답변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으로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도덕적 의무론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고실험인데, 당시 내가 교수님께 드렸던 답변이 장강명 작가의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과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답변은 주체의 도덕적 인식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와 더 가까운 타인의 도덕적 요구/요청이 어떤 도덕적 틀을 사용할지 결정짓는다는 요지의 답이었다.

 미스터리와 지적유희가 어우러진 작품 덕분에, 겨울 방학 학과 사무실의 고요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제시 한'의 체포 장면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5.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 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사물과 사건, 그 역사에 관한 기억의 단절은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 언어, 문화,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침투해 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언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8)

 개인의 단편적 장면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도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공동체의 기억, 모두의 유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또 멀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응시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결국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23, emphasis mine.)

 지금껏 이어져 온 기억,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낸다. 그 간극은 우연하기에 급작스럽다: 기성 세대-전후 세대, 학교-집, 남성-여성, 섹스-낙태, 노동자-부르주아, 종교-아노미, 혁명-상품, 정치-자본.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과 다르게, 유채 씨를 뿌리거나 사과를 흔들어 따거나 죽은 나뭇가지로 단을 묶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지는 않았다. 학교 일정표가 계절의 주기를 대신했다. (...)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연스럽게 원래의 언어를 되찾았다.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 되는 몸에 밴 언어, 양쪽 따귀와 블라우스의 자벨수 냄새, 겨울 동안 구운 사과, 양동이로 떨어지는 오줌 소리 그리고 부모의 코골이와 엮여 있는 그 언어를 되찾았다. (pp.36-37)

사진 속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여자애들은 부르주아 층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자애들과 다르며, 더 강하고 더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너무 자주 어울리고 함께 파티에 다니면서 자신이 타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노동의 세계나 부모님의 작은 상점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왔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은 관련성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단지 지식과 문화 속에만 있을 뿐. (p.104-105)

전쟁에 대한 언급은 50세 이상의 입에서 나오는 허영심 넘치는 개인적인 일화로 축소됐고, 30세 이하는 그것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로 여겼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추모사와 꽃다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6)

 그 누구도 도저히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녀도 그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허위 의식이 선사한 우월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의 맹렬함과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을 향한다. 나는 '나'를 표상한다. 동시에 '세계'로 이행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p.11-12)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p.55)

우리는 바칼로레아의 성공으로 사회적인 존재감을 부여받았다. (p.83)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앞설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단하고, 또 단순했다. 사회가 할당한 요구를 충족시킨 개인들은 손쉽게 통합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p.81), 텔레비전을 샀고(p.112), 어떤 이들은 농부에게 헐값으로 낡은 집을 사기도 했다(p.140). 동시에 그녀는-발칙하게도(?) -혁명을 꿈꿨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33)

 그러나 세계는 생각보다 치밀했고, 유연했다. 딱딱한 정치는 흘러가고, 말랑말랑한 상품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존재의 결핍을 악(惡)으로 규정했던 철학은 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대신 존재(상품)의 과잉이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과잉은 곧 소멸을 동반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09)

시장경제의 질서가 강화됐고 숨 가쁜 리듬이 강요됐다. 바코드를 갖춘 구매품들은 은밀한 신호음 속에 일초 만에 가격으로 넘어가며, 계산대에서 카트까지 더 신속하게 통과했다. (...)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p.246) 

 결국 자본이 시간을 손에 넣었고, 개인은 상품 속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상품이 가벼워지듯, 모든 사물과 사건, 이를 담아내던 언어와 기억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그토록 처절하게, 손에서 빠져나간 그 모든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과 기억의 틈. 그 단절의 간극까지도.

 쉬운 글은 아니다. 작가의 기억은 치밀했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기억을 뒤덮은 흙 먼지를 고운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은 지루하고, 텁텁하다.  

사르트르 <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부르디유 <문화 자본, 아비투스 개념>. 

 책장을 넘기며 이 모두를 떠올린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좌절하고, 사유한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 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삶은 마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고, 그녀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할머니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추억들이 그녀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듯, 그녀들의 삶은 그 이상의 추억과 아픔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도동 집. 가을이면 마당 한 구석 모과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할머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달콤한 향기와 설탕을 유리병 속에 담아내던 그녀. 겨울 저녁을 기다리게 만들던,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던 그 유리병들. 할머니 머리맡에 있던 동전 주머니. 오백원 동전을 손에 들고 찾은 우리 동네 <목포 슈퍼>.
그리고 그녀는......몰락한 명문가의 딸. 재주 많았던 그녀의 조용한 삶. 잃어버린 기억. (할머니 강팽옥)

  우리 가족들의 겨울철 별미. 큼지막한 이북식 손만두. 그리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빙-둘러앉은 가족들의 내기 윷놀이. 그녀에게 배웠던 민화투.    

 그리고 그녀는......고향에 두고 온 가족. 이곳에서 만든 가족. 유별나게 힘들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 어렵사리 만난 고향 가족들에 대한 실망. 떨쳐내지 못하는 지난 날의 회한. (외할머니 이정순)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번에는 작가들의 눈을 빌려 그녀들의 감춰진 뒷모습을 엿볼 뿐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어제 꾼 꿈 中)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무해해보이는 표현 속에 감줘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흑설탕 캔디 中)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척들은 할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베드 中)

그날, 거실로 다과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단어-과부.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먼저 살폈는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즐거움이 잠시 동안이지만 명백하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대한 유산 中)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 행 中)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정원 中)

2023년 4월 13일 목요일

(독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Le Grand Cahier + La Preuve + Le Troisième Mensonge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과잉과 결핍,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에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Claus)와 루카스(Lucas)가 존재한다. 처절한 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거짓 속에서도 이 둘은 함께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총 세 편의 소설 속, 그들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겪은 운명은 어디에 놓여있었나? 모순과 거짓이 진실을 담아내는 그들의 생(生)을 유심히 바라본다.  

 쌍둥이 형제는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하다. '선-악'/'미-추'는 그들 행위의 동기가 아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단지 그 뿐이다.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행한다. 그 어떤 망설임도 미동도 없이 행한다. 응답하는 자!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결코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게다가 후회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긴 침묵 끝에 신부가 말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서 다 보았다. 그 빵 한 조각, 하지만 벌을 내리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다. 너희가 그분을 대신할 권리는 없는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축복을 빌어도 좋겠니?"
 "좋을 대로 하세요." (p.147)

  루카스가 물었다.
  "처형 때도 입회하셨어요?"
  "아니야. 그는 내게 입회해달라고 했지만, 난 거절했지. 자네는 내가 겁이 많다고 생각하지?"
  "글쎄요, 하지만 당신을 이해합니다."
  "자네 같으면 입회했겠나?"
  "그가 내게 부탁했다면, 그럼요, 했을 겁니다." (p.352)

 세상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 진실은 거짓 위에 발을 딛고, 거짓은 진실을 내뱉는다. 그렇게 현실의 결핍을 환상 속 과잉으로 뒤덮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두 형제의 존재는 그들이 나눠가진 이름처럼 '우리'로 분화되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처럼,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존재의 결여, 견딜 수 없는 고독. 그렇기에 그들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 형제가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에도." (p.443)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p.452)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p.545)

  삶의 이면이 곧 삶 자체일 때가 있다.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의 숙명이었고, 그녀가 창조한 작품 속 쌍둥이 형제는 그 과업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독서) 남자의 자리; La Place by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신유진 역

<남자의 자리>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이 남겨 놓은, 그가 머무른 자리를 본다. 그 무거운 존재의 흔적을 뒤쫓는다. 그리고 작가는 고백한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p.9)
 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이기도 하다. 어렵게 빠져나온 자리.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그의 삶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남의 밭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과 다른 신화들은 그를 비껴갔다. (p.15)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노동자로 돌아가기 싫었던 아버지. 자신의 언어를 고집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이 멸시하던 세계의 일원이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 그렇기에 작가는 그저 글을 쓴다. 그의 삶이 우선이다. 문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견뎌온 생의 몸부림, 그것의 자그마한 일부다. 담담한 어조, 꾸미지 않은 시선, 건조한 문체. 그 외의 것은 필요하지 않다.

 계급이 부여하는 자리. 그 경계선을 넘어 온 '나'의 시선이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어설픈 꾸밈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멀리서, 나는 내 부모를 그들의 몸짓과 말,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정제했다. 나는 그들이 <엘(그녀)> 이라고 발음하는 대신에 <아>라고 발음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방식을 새롭게 들었다. 이제 내게 자연스러워진 그 <점잖은> 몸짓과 올바른 언어 없이 그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만나게 됐고,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52)
 작가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녀는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이야기, 그의 자리에 대한 그녀의 짧은 고백이 나의 마음을 흔든다. 외면할 수 없었던, 떠나온 곳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모두의 마음을 스쳐간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한 남자의 삶. 그 삶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나'의 새로운 세상. 참혹하고 서글픈, 거칠고 따뜻한, 연민과 존경, 유쾌와 엄숙이 엇갈린, 그 누군가의 생을 조용히 바라본다.  

2023년 2월 5일 일요일

(독서) 섬; LES ILES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섬>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온몸으로 읽는 문장을 마주한다. 그것은 조심스레 다가왔고,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저 그 문장들을 이곳에 옮기려 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공의 매혹 中, p.25)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고양이 물루 中, p.36 & 40)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中, p.77 & 8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中, pp.96-97)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앎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無)의 섬뜩함이었다. (이스터섬 中, p.120-121)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적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 준다. (사라져 버린 날들 中, p.165)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글을 대신하여 작가와 역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pp.6-15)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독서) 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역

<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 (Emphasis Mine, p.21)

 도쿄 시민 집회,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하여 외쳤다. <영속 패전론>의 저자 시라이 사토시 또한 동일한 표현으로 자신의 저작 첫 문장을 시작한다. 참담하고, 슬프다. 분노하고, 암담하다. 그렇게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그들을 모욕했는가?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전후 '평화와 번영'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자의 냉정한 시선을 뒤쫓다 보면, 이미 기능을 다하고 죽은, 전후 체제의 껍데기를 지탱하고 있는 기만적 개념들을 마주한다. 

  • 종전 기념일
  • 전후 민주주의
  • 고유의 영토(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
  • 전후 탈각 
  • 일억총참회 
  • 절대평화주의
  • 국체호지

 전전(戰前)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전후 일본 사회 정-재계의 권력, 그에 기생하는 학계와 언론계가 누리는 혜택, 이를 뒷받침하는 이중 구조의 모순(전쟁에서 패했지만,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았다.)은 바로 '영속패전'으로 귀결한다.  

다시 말해 '패전 후'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 종속 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부인)하는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 인식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패전은 이중 구조를 이루며 계속되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한 패전의 부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영속패전'이다. (p.61)

미국에는 패전으로 이뤄진 종속 구조를 한없이 인정함으로써 이를 영속화하는 한편, 그에 대한 보상 행위로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패배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패배의 부인'을 지속하기 위해 더욱더 미국의 졸개가 돼야 한다. 노예와 같은 복종이 패배의 부인을 지탱하고, 패배의 부인이 노예 행위의 보상이 된다. (p.88) 

 저자의 논증 과정은 매우 정직하고 냉철하다. 그리고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은 날카롭다. 

현실적, 형이상학적 책임을 다루는 논의와 별도로 정치 차원의 명제, 즉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사실이 있다. 단순한 사실인 까닭에 경제적 성공에 따른 국민의 만족감 고양이나 진지한 회환과 반성에 바탕을 둔 부전(不戰)의 맹세 같은 주관적 차원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mphasis mine, p.57)

결국, 국가의 영토를 결정하는 최종 심판 단계는 폭력이다.즉 역사상 최근에 일어난 폭력(전쟁)의 결과가 영토 지배의 경계선을 규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p.68) 

왜냐면 어떤 나라든 국가가 본래의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본성은 악이고 타국이나 타 국민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 정책은 애초부터 진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검열로 통제받는 형태로 시작된 전후 민주주의가 정의의 기초나 전후 일본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후 민주주의 개혁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던 사람들에게 에토가 퍼부은 비판의 핵심이다. (...)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 추구와 국내 사정에 따라 규정됐다. (p.134)

 지금껏 가까스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이라는 망상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전후는 이미 종착점을 지나쳤다. 결국 바깥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저급한 내셔널리즘임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집착, 미국을 향한 일방적 구애와 비굴한 저자세 외교. 이를 통해 유지하려는 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지위(이 또한 허구에 기반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시인하기 두려울 뿐이다. 전후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이들의 몰염치와 방관자들의 비겁함이 빚은 허구가 그들을 짓누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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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극우의 정신 구조(=자민당)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한국 극우의 친미-친일 성향의 속사정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면,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독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by 박민규 (표절)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by
박민규 (표절)

 표절. 작가로서 뼈아픈 고백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부끄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박민규 작가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뒤늦게 표절을 인정한 후로는 작품 활동을 안 하는 듯하다. 그래도 신경숙씨와는 다르게 그는 나름(?) 깔끔하게 인정했다. (사실, 신경숙씨의 표절에 비하면 '참고' 또는 '변용'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표절을 하고도 박사 학위를 떡-하니 받는 나라에서, 그 학위로 교수가 되기도, 경력을 쌓다 보니 영부인이 되기도 하는 나라에서, 한 명의 작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적어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라면 그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오래전, 작가의 표절 인정 훨씬 이전에, 친구 '완'이 선물로 준 책이다. 무렵에는 꽤나 심오한(?) 주제의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기에, 대충대충, 낄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시간이 흘러 흘러, 서울 부모님 댁 책장 위에서 잠들어 있는 이 책을 들고 바다 건너 먼 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아무래도 친구의 선물이기에, 다시 한번 제대로, 고개를 끄덕끄덕, 여전히 낄낄, 경쾌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까닭은 나에게도 시간이 넘치도록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경쾌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장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아무래도 추천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감상평도 남기지 않는다. 안타깝다. 큰 아쉬움이 남는다. 

 덧붙여, 계속해서 이 표절작의 개정판을 내고 있는 한겨레 출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표절을 인정한 작가 본인의 요청은 아닐 것이다. 삼미가 떠난 세상, 프로들의 전략은 이토록 낯 뜨거운 것인가?
 
뉴욕에 사시는 분들 중 이 책을 읽고 싶으신 분에게는 빌려 드리겠습니다. 구입하지 말아주세요.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9.2022: 레스(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Andrew Sean Greer / 강동혁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9. 2022


<레스; 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 강동혁 역

 '세상 모든 책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글과 그 글의 모든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에 관한 사랑이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책의 표지 만큼이나 경쾌하고 상큼한 사랑 이야기를 - 동시에 주인공 아서 레스의 삶에 깃든 지적 통찰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 기대하며 <레스>를 읽는다. 50세가 되기 직전 사랑이 떠나간다. 프레디가 결혼 소식을 전한다. 레스는 도망치듯 세계 일주를 결심한다. 칭송받는 천재 시인 로버트의 애인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소설 <칼립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간 미루어두었던 온갖 초청에 응한다. 결혼식에 가지 않기 위해서. 

뉴욕 - 멕시코 -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모로코 - 인도 - 일본 -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인 레스는 불안하다. 자기 소설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전히 사랑에는 서툴고, 독일어는 형편없다. 사실 우리 모두가 레스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재의 삶에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랑에는 갈팡질팡한다. (뉴욕에 사는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화자의 시선이 레스의 여행을 따라간다. 그의 사랑, 그의 곁을 스쳐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이 그러하듯 사랑은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은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맞는 거라면, 아서? 만약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맞다면? 그녀가 느낀 게 이 땅을 모두 박살 내는 어떤 거였다면?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거. 넌 느껴봤어? (p.212)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삶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아 / 하지만 내가 죽는 그날엔 / 네가 울게 되리란 걸 알아. (p.269) 

 그 무엇을 받아들이든, 레스는 여전히 순진하리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집에서 기다리는 프레디와 함께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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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다: "뭐야 이거? 뭐 이딴 식으로 글을 썼어?" 

 결국 원서를 찾아 읽는다. 재기 발랄한 문장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치(?) 있는 글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능(?)이 넘쳐 흘러서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감상평은 주관적이지만, 누군가 '퓰리처(풀-잇-서라고 읽든 뭐든)상을 받을만한 책인가?'라 묻는 다면: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헤밍웨이는 받았던 상을 반납할 듯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를 짚어본다: 번역!! 성의 없는 번역!!

 산뜻해야 할 문장이 산만해진다. 작가의 개성이 넘치는 (뭐든지 너무 넘쳐요!) 문장이 철학과 석사 1년생의 겉멋 들어간 글로 탈바꿈한다. 일관성 없는 번역에 실망하고, 비문의 향연 속에서 좌절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 디자인
  • 유명 문학상이 부여하는 그럴듯한 권위
  •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이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본다.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탐구, 또는 사랑에 의한 삶의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단지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On Love; Essay in Love>의 톡톡 튀는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장을 덮는다. 옮긴이의 말도 읽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실패할 때도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 레스의 여행이 그러했듯이."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alytic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Saul Kripke (1940-2022)

Professor Kripke was well-known for his work in philosophy of language and logic, with his Naming and Necessity, the book version of lectures he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in 1970, widely recogniz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ks of 20th Century analytic philosophy. An overview of his influential work can be found here and a list of his publications can be viewed here.

At the time of his death, Kripke was Distinguished Professor of Philosophy and Computer Science at CUNY Graduate Center. From 1977 to 1998 he was a professor of philosophy at Princeton University. Prior to that, he held positions at Rockefeller University, Harvard University, and Princeton, and even before he earned his BA from Harvard in 1962, he taught courses at Yale and MIT. He held many visiting positions around the world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including at Cornell University, UCLA, Oxford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Utrecht, and Hebrew University, to name just some of them.

A 1977 New York Times article about Kripke’s life and career up to that point, and his reputation as a genius, conveys his standing at the time, at least among some philosophers:

Kripke’s potential, his controversial views and his position as [a] budding genius in world analytic philosophy have combined to make him a man who inspires awe and excitement among philosophers. In fact, he has already become something of a cult figure in philosophical circles—gossiped about, studied, analyzed and claimed as a kindred mind. Some philosophers lose their reserve when speaking of him. The cult phenomenon is itself remarkable, for philosophers as a group have such large egos that they correct Aristotle as they would a schoolchild, and they have such a healthy sense of skepticism that they doubt whether such things as proper names exist. Even in groups of two or three, they lace their conversation with exit clauses and qualifiers to guard against having a trapdoor sprung under some private reality. They do not, in short, subordinate or let go of themselves easily, and yet Kripke has been known to bring to their brain‐twisting conclaves the atmosphere of an early Beatles concert.

A 1996 Lingua Franca article by Jim Holt looks at some of the controversial aspects and upshots of Kripke’s reputation.

Among his many honors were the 2001 Schock Prize in Logic and Philosophy from the Swedish Academy of Sciences.

He died on September 15th.

Reference: 

https://dailynous.com/2022/09/16/saul-kripke-1940-2022/

 전공자(분석철학 전공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가 아니어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학부 전공자를 의미합니다!)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 또한 전공자가 아니지만, 그의 철학에 대한 짧은 논문 정도는 읽어봤을 정도다. 물론 나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천재로서, 괴짜로서 -일화에 더 관심이 있긴 했지만. 

 2022년. 뉴욕시는 당대의 철학자들과 작별 중이다.

Richard J. Bernstein (1932 - 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할 때였다. 이제 가을이 되었다. 

 수년 전, 수업이 끝난 밤 9시 가을 밤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기억난다. 집에 가는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와 나누는 짧은 대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Richard Rorty의 철학에 관한 짧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프래그머티즘과 한나 아렌트 철학과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였다.   

이런 저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슬픔과 존경을 담아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의 책 <The Pragmatic Turn> 한쪽 구석에 받은, 젊은 철학도에게 남긴 그의 짧은 응원을 여전히 기억한다. 

To Michael "A fellow admirer of pragmatism." Richard J. Bernstein


(Reference)

2022년 9월 14일 수요일

(독서)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 / 송태욱 역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송태욱 역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마주한다. 글의 몸짓, 글의 숨소리, 글의 표면, 글의 무게, 그리고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듯 써 내려간 그 글의 기세를 쫓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55세. 이혼. 퇴사. 당뇨병. '나'는 개인으로서 죽기를 바랐지만, 결국 다다른 곳은 그의 가족을 집어삼킨, 그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고향, 가자무라다. 도망치듯 도시로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의 인간으로 출세를 향해 나아가던 그의 인생 속 단 한순간도 돌아오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결코 잊을 수 없던 곳. 가키다케 산이 내려보는 폐허, 고향 집 앞에 그가 서있다. 

 15년 전 이곳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한 여동생의 시체를 보았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무고한 이에게 참담한 짓을 저지른 동생은 도망 중이다. 일련의 사건에 낙담한 어머니는 극약을 먹고 고통에 몸부림 치다 죽었다. 남들의 삶에 무관심하던 아버지는 5년 전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안도한다. 행방을 알 수 없던 동생이 고향 집에 돌아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주었다. 녀석을 흉가가 되어버린 고향 집과 함께 태워버린다. 

 누이의 죽음. 아우가 저지른 어긋난 복수. 충격적이고 잔인하지만, 단순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도 지극히 평범한 삶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이면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제와 지레 짐작할 뿐인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가 뒤엉켜있다. 인생은 단순하지만 인간은 의문으로 가득 차있다. 그 의문을 파헤치는 일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일까. 

 그는 죽으려 했다. 홀로 깊숙이 땅을 팠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만들었다. 가족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 만의 죽음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운명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여름의 끈적한 바람이,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 비친 달빛이, 강 건너 맞은편에서 들려온 풀피리 소리가, 한밤 중 도롱이벌레처럼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이 모든 것이 그의 무기력했던 삶에 운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파랑새의 울음이 그의 운명에 확신을 준다: '저놈이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

내가 저주해 마지않는 것은 누이나 그 밖의 몇몇 아가씨에게 독수를 뻗친 성범죄자 자체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로 아무 일 없이 이대로 끝나고 마는 내 처지다. (p.608)

 태풍이 휘몰아친다. 녀석을 마주하고 깨달았다. 녀석은 죽고 싶어 한다. 죽임을 당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녀석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란다. 진정으로 죽고 싶다는 것은 운명을 파헤쳐 보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너 대신 죽어주지!" (p.658)

 자신의 운명을 '나'에게 맡긴다는 듯이 녀석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고, 난폭하게 변한 강물과 토석류가 녀석의 몸을 앗아간다. 녀석의 운명이 '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자애를 베푼 것이다. 

 이제 다시 홀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닥쳐온 운명을 마주했고, 더 이상 꺼릴 것 없이 고향 땅을 밟고 서있다. 강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을 들이켜고, 떠나간 이들의 안식이 빚어낸 흙을 손에 쥔다. 무너졌다 여겼던 자신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으리라.

자아, 나가자. 마음 내키는 대로 들판을 떠돌아다니며 다시 멋진 단독 행동을 실컷 즐기자. 그리고 부침 많은 일생을, 화복(禍福)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이 세상을 마음껏 즐기자. 하지 않는 것이 무난한 일 같은 건 이제 하나도 없다. (pp.670-671)

다시 파랑새의 밤이 시작되었다. 파랑새는 모든 원죄를 대신 떠맡아줄 것 같은 소리를 산들에 메아리치게 한다. 오보레 강의 수면에 비친 나는, 아름답고 맑게 갠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보다, 그리고 반딧불이보다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 (pp.677-678)

2022년 6월 10일 금요일

(독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Lady Chatterley's Lover by D.H. 로렌스(D.H.Lawrence) / 이인규 역

<채털리 부인의 연인> by D.H.로렌스 / 이인규 역

<채털리 부인의 연인> by D.H.로렌스 / 이인규 역

   탄광 산업도 조금씩 쇠퇴해가는 시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영국 전역을 뒤덮었다.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굉음을 내뿜는 마을, 탄광에서 나와 허물어져 가는 잿빛 마을로 향하는 인부들, 그 인부들의 지친 발걸음 만큼이나 생기 잃은 여인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세당한 인간들이 스스로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콘스턴스(코니), 클리퍼드, 맬러즈. 그들이 사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p.1) 많은 이들은 시대의 비극 속 깊숙이 가라앉았고, 어떤 이들은 자기 안위에 머물며 이 비극적 시대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도 삶의 생명력을 품어내려 발버둥 친다.
  
  1차 세계대전에서 다리를 잃은 클리퍼드는 라그비의 대저택 안에 움츠러들었다.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하는 탄광 사업만이 그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표다. 그래서 그는 집착한다.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 그의 아내 코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둘 사이에 이루어진 결혼 생활의 지속에 집착한다. 동시에 그는 경멸한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그들 스스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고 경멸한다. 집착과 경멸. 이 두 반응은 불모의 몸이 되어버린 그의 무의식적인 발작이다. 사실 클리퍼드는 알고 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숭고한 결혼 생활에도 육체의 쾌락과 환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싱싱한 삶의 생명력은 탄광 노동에서 얻은 몇 푼의 돈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외면한다. 공허한 자신의 삶에 안주하며.

 코니는 숲으로 향한다. 텅 빈 말과 위태로운 연극 무대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만질 수 있는 관계를, 진정한 애정을, 움트는 생명을 원한다. 그렇게 그녀는 살아있기를 원한다. 숲을 거닐던 그녀가 마주한 맬러즈의 야윈 몸, 응축된 생명력을 발하는 그의 단단한 육체가 그녀를 뒤흔들었다. 조심스러운 냉소 뒤에 숨겨진 세상을 향한 그의 애정이 그녀를 다그친다: '당신은 살아있나요?' 
 그와 나눈 몇 차례의 섹스가 점점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낯선 애정이 그녀의 생각과 몸을 휘저었다. 맬러즈의 단단한 남성이 닫혀있던 그녀의 몸에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웠다. 그녀의 몸은 부드러워졌고, 마음은 단단해졌다. 그의 사투리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그녀는 스스로의 삶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 
 약간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로 하여금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이성과 수치심 따위를 모두 내던진 순전한 관능이 그녀를 뿌리까지 뒤흔들었고, 그녀의 마지막 속살까지 완전히 다 벌거벗겼으며, 마침내 그녀를 완전히 다른 여자로 태어나게 했다. 그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육욕의 탐닉도 아니었다. 그것은 날카롭고 뜨겁게 타오르면서도, 영혼을 활활 불살라버리는 관능의 불꽃이었다. (p.163)
 그 짧은 여름 밤 동안에 그녀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는 여자가 수치심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오히려 그 수치심이 죽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수치심은 바로 두려움이었는데, 우리 몸 깊숙이 유기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그 수치심이, 다시 말해 우리 육체의 뿌리 속에 깊이 웅크리고 있어 오직 관능의 불에 의해서만 쫓아낼 수 있는 그 오래디오랜 육체적 두려움이, 마침내 남자의 남근에 의해 일깨워지고 추적당해 쫓겨나고 만 것이며,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밀림 바로 한가운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pp.164-165)
 섬세한 눈길로 등장인물들을 살펴본다. 이토록 예민하게 대상을 살피는 문체는 오랜만이다. 문학의 힘은 무엇인가? 안정된 것을 불안하게 만든다.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고, 그 안의 속살을 감싸 안는다. 작가의 시선은 세상에 맞선다. 세상에 맞서는 이들을 지켜본다. 차분해진 호흡 속에서 작가의 문장이 시선을 옮긴다. 흔들리는 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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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게,

 별로 길지 않은 분량은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해주세요. :) 

2022년 5월 24일 화요일

(영화) NYPL Korean Book Club 05.2022: The Florida Project;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by Sean Baker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2022

<The Florida Project> by Sean Baker

 Moonee, Halley, Bobby, Ashley, Scooty, Dicky, and Jancey near Disney.

 좋은 영화다. 해석을 위한 이론적 틀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차분히 영화의 시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있다.

2022년 4월 25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2: 레몬 by 권여선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2022

<레몬> by 권여선

 평탄하고 평온한, 굴곡 없는 순조로운 삶이 있을까?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상처 입고 해진 삶을 끌어 안은 이들은 그 삶의 특별한 의미를 알게 될까?     
 주어진 세상이고, 던져진 생이다. 견디는 것이 전부일까? 그 굴레와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의 시선이 각 인물들을 향한다. 

 해언과 다언 자매, 
 해언을 바라보던 태림, 
 이 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소외되어 평범한 나머지 무리에 속한 채 혐오감과 안도감(p.36)을 느낀 상희, 
 그저 윤태림의 손길을 기억하는 한만우,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 다언, 
 혜은이를 키우는 자매의 엄마,   
 아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린 신정준,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 불쾌하리 만큼 건조한 시선이 한 소녀의 죽음을 훑고 지나간다. 세상에 문명이 들어선지 오래지만 인간 본성의 밑바닥은 자연을 닮았다. 자신과 무관한, 자기 삶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난 그 순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에 무심하다. 따스한 온기를 몸에 새기고, 질투가 맹목이 되고, 욕망이 들끓고, 생이 몸부림치던 그 순간. 지금껏 이어진, 연속된 시간의 한 토막이 순간의 파편들로 조각나던 그 찰나는 지나갔다. 세상은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친다. 해언이 속옷도 입지 않고 치마를 입은 채 무릎을 약간 벌려 세워 앉아 있듯이 말이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64)

 해언의 죽음. 그 순간의 사라진 조각들을 모아보자. 상상해보자. 신정준은 감히 해언을 범하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속살을, 그저 때가 되어 발갛게 피어오른 그녀의 여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조차 무심하게 대하는 육체를 그가 무슨 수로 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해언의 아름다움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저주했을 것이다. 탐할 수 없다면 부숴버리자. 그녀의 무심한 생을 으깨버리자. 

 한 생명이 몸부림치다 부서지고 폭발하던 그 격렬한 순간이 그냥 그렇게 결정됐을 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다. 어찌할 도리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끌어안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생이다. 그런데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신정준은 그 자신의 아이 예빈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몸을 들썩인다. 잠든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모른다. 그 자신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는 무심한 해언의 얼굴을, 순간 자신을 들끓게 한 그녀의 거뭇한 음부를, 세상에 던져지고 방치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태림은 울고 있는 남편이 무섭다. 그래서 시를 쓴다. 아이를 잃고, 기도하고, 또 시를 쓴다. 자기를 속이고,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를 쓴다.

 다언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혜은이를 엄마에게 데려왔지만, 그녀 자신의 삶은 사라졌다. 원한 적 없이 선택한 삶이다.

 한만우는 다리를 잃었다. 골육종이라는 병이 그의 삶에 이유 없이 찾아왔다. 황홀했던 태림의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붙들던 때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생명은 사그라든다.
 
 시간이 흘러 다언을 마주한 상희는 시를 포기했다 말한다. 사랑한 적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흘려 보냈다. 죽음은 언제나 과거형이 되듯, 시를 쓰던 그 시절도 과거형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이들이 펼쳐놓은 온갖 흔적과 소음, 버둥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섬세하고 서늘한 문장이 작가의 시선을 작품 속 여기서 저기로, 그녀에게서 그로, 그녀와 그녀 사이로 옮긴다. 세상에 펼쳐진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고요한 눈길이 신중하다.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여가와 관조 #2: 윤석열 대통령.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기대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씨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서강대 동문회는 공개 지지를 했고(당시 이종욱 총장이 소수의 학생들 앞에서 자화자찬과 함께 박근혜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지만...), 소수의 졸업생 동문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지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반대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각기 저 마다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반대했다. 나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의 근거는 그녀의 태도였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부끄러움 없는 태도. 그 유치함. 그 편협함. 그 오만함. 

 대선 토론에서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녜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나는 그녀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이 되었고, 난 기대가 되지 않았다. 

 윤석열 당선자로 눈을 돌린다: "기대가 되지 않는다." 

 '지지 여부를 떠나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른 말 따위는 남들이 해줄테니, 난 그냥 솔직한 심경을 밝힌다. 

 그동안 그의 언행과 토론에 임하는 태도를 지켜본 봐, 추측하건대 윤석열은 사법고시 합격 후에 제대로 책 한 권을 안 읽어봤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자랑스러운(?) 모교 서울대가 추천하는 필독서 100권 중 10권도 안 읽었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것은 아마도 검사로서의 조직 생활, 검찰 수사, 법률 적용과 관련된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금껏 터득한 그 지식들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리영희 선생이 마주 앉았다던 D 검사가 떠오른다. 

 윤석열은 반지성적이다. 그는 그 어떤 사물, 사건, 사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자기 확신에 매몰된 채,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자들의 태도는 대부분 비슷하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부끄러움 없는 태도. 그 유치함. 그 편협함. 그 오만함.  

  '나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란다.' 따위의 어설픈 보험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대한민국은 망했어.'와 같은 자포자기도 옳지 못하리라. 단지 개인 윤석열의 대통령직 직무 수행 능력을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현재 Powerball 총 상금이 $288M 이다. 차라리 이를 기대해 본다.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오늘도 난 나의 삶을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