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2022
<레몬> by 권여선 |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64)
해언의 죽음. 그 순간의 사라진 조각들을 모아보자. 상상해보자. 신정준은 감히 해언을 범하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속살을, 그저 때가 되어 발갛게 피어오른 그녀의 여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조차 무심하게 대하는 육체를 그가 무슨 수로 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해언의 아름다움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저주했을 것이다. 탐할 수 없다면 부숴버리자. 그녀의 무심한 생을 으깨버리자.
한 생명이 몸부림치다 부서지고 폭발하던 그 격렬한 순간이 그냥 그렇게 결정됐을 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다. 어찌할 도리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끌어안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생이다. 그런데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신정준은 그 자신의 아이 예빈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몸을 들썩인다. 잠든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모른다. 그 자신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는 무심한 해언의 얼굴을, 순간 자신을 들끓게 한 그녀의 거뭇한 음부를, 세상에 던져지고 방치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태림은 울고 있는 남편이 무섭다. 그래서 시를 쓴다. 아이를 잃고, 기도하고, 또 시를 쓴다. 자기를 속이고,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를 쓴다.
다언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혜은이를 엄마에게 데려왔지만, 그녀 자신의 삶은 사라졌다. 원한 적 없이 선택한 삶이다.
시간이 흘러 다언을 마주한 상희는 시를 포기했다 말한다. 사랑한 적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흘려 보냈다. 죽음은 언제나 과거형이 되듯, 시를 쓰던 그 시절도 과거형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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