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2023년 가을학기, 디지털 인문학 (Digital Humanities)

    고민 끝에 지원한 대학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뚜렷한 목표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공과 비교하면 신생아나 다름 없는 분야이고,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 - Digital + Humanities - 에 대한 작은 호기심 (또는 약간의 반발심)이 작용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지니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단어의 생경한 조합이 시선을 끌었다. 단순하고 성의없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가장 설득력있는 논리였다. 일종의 타협이자 절충이었다. 가을 학기 시작 전, 글자에서 멀어진 몸에 긴장을 주기 위해서 집어든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였는데, 아마도 내심 철학(또는 공부하기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작용했던 듯하다. 

    한국의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종종 한국 디지털 인문학 협의회(KADH)에 소개되는 글을 읽어본다. (사실 이곳도 수업 중 알게된 Alliance of Digital Humanities Organizations; ADHO를 통해 방문하였다.) 이곳에서도 신생학문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서야 조금씩 논의가 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꽤 활기찬 학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어보인다. 미국 내에서도 대부분은 정식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고, 기존의 학위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학문의 특성상 많은 금전적/구조적 지원(DH 분야의 중요한 학문적 논의대상이다.)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규모 대학에서는 디지털 인문학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DH 분야의 주요 주제이다! Minimal Computing!)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고,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이 디지털 인문학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뉴욕시 거주자는 비교적 저렴한(?) 학비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도 순전히 운이다. 아마도 내가 뉴욕시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학교 건물 5층 DH 라운지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과 운의 조합일 뿐이다. 

참고로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제공하는 DH 프로그램은 Data Analysis & Visualization 프로그램과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각각 MA/MS 학위를 제공한다.

    2023년 가을학기,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 (The Graduate Center, CUNY, New York)

    수강한 강의는 아래와 같다:

  • Knowledge Infrastructures (3)
  • Working with Data: Fundamentals (3)
  • Introduction to Digital Humanities (3)
  • Computational Fundamentals: JavaScript (1)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학교를 떠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COVID-19을 거치면서 학교들 또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번 학기 강의들은 대면 수업, 비대면 온라인 수업, 절충(Hybid)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전 철학 전공 때와는 달리 이번 학기의 목표는 단순했다. 

  1.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알아보기
  2. 디지털 도구들(JavaScript, Python, Mapping, Text-analysis 등)을 경험하기
  3. 영어로 수업을 이해해보기
 역시나 세 번째 목표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두 번째 목표는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존경심을 낳았다. 첫 번째 목표는 디지털 인문학 공동체 내에서도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와 같은 문외한의 단순한 목표들이 이 분야의 주요 학문적 관심이라는 사실이다.

(1.1.) 
    언젠가는 정립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정립되지 않을지도 모를 주제이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주장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Digital Humanities is not some airy Lyceum. It is a series of concrete instantiations involving money, students, funding agencies, big schools, little schools, programs, curricula, old guards, new guards, gatekeepers, and prestige…. Do you have to know how to code [to be a digital humanist]? I’m a tenured professor of digital humanities and I say ‘yes.’ …Personally, I think Digital Humanities is about building things…. If you are not making anything, you are not …a digital humanist.” (emphasis mine)

(Ramsay, “Who’s In and Who’s Out”)

    이번 학기 첫 과제도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에 대한 짧은 글이었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이고, 그에 대한 의견 또한 무수히 많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고, 학문적 지향과 성과도 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가령, 철학이라는 학문의 양상은 다양할수 있어도,  그 어원(Philia + Sophie)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을 정의할 수 있다. 반면 "디지털+인문학"은 각 단어의 어원이나 정의의 합이 해당 학문의 정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론적 틀이 실천적 행위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수 많은 정의들 중 하나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인문학 공통의 배경과 중첩되는 이론적 틀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학문에 대한 정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DH 프로젝트 중,  <Colored Conventions Project>은 앞선 주장의 조건- "만들기 = Building Things, Code, Making" -을 충족한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대상, 그리고 나아가는 방향이다. - Historically underrepresented voices / Collaboration / Community and Localness / Archive / Pedagogy / Open Access. 물론 이는 "만들기"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만들기"는 디지털 인문학의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 출발점이 되지는 못한다. "만들기"를 "코딩"으로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디지털 인문학의 범위를 좁힐 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DH 프로젝트의 실행 과정 안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도구가 곧 이론이 되고, 프로젝트 계획서가 논문이 되고, 실패한 코딩 또한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 이론과 실천, 도구와 계획, 실행과 실패가 뒤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인문학은 이 모두를 수용하고 뒷받침 할 수 있는 학문 공동체에 기반한다. 

(2.1.)
    가장 부담이 없어야 할 1학점 짜리 수업, <JavaScript>가 가장 어려웠다. 지금껏 파워 포인트도 잘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Interactive Map Webpage를 만드는 수업이라니. 더불어 <Intro.to DH> 수업의 Praxis Assignments - Mapping, Visualization, Text-analysis, Wekipidia, DH Projects Analysis는 큰 부담이었다. (이 중 두 가지를 선택하여 과제를 수행해보고 짧은 글 남기기.)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는 익숙한 도구들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처음 접하는 신세계였다.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인문학적 시선을 바깥 세상에 적용해보는 실천을 장려한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적 시선을 도구들에게도 적용해 본다. 즉, 디지털 도구들의 유용성과 한계, 가능성과 장벽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동반한다. 완벽한 코딩과 완벽한 도구, 더불어 특정 연구대상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이러한 절대적 완벽함을 추구하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오류, 어긋남, 왜곡을 눈여겨 본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난 곳곳의 틈에 개방성과 협력을 채워넣는다. 1.1의 끝맺음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과정은 도전을 응원하고 실패에도 격려하는 개방적 학문 공동체를 요구한다.  
    디지털 인문학과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강의 제목, <Knowledge Infrastructures>가 이 분야의 주요 주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 만큼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학문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선결 과제이기 때문이다.

(3.1.)
    위의 문제의식을 나의 언어 장벽과 연결해본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인문학은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다. 개인과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연결 지점을 찾고, 대화와 상호작용을 장려한다. "인문학 연구에 왜 굳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물론 학문적 성과와 연구의 효율성도 중요한 요소겠지만, 그 보다는 인문학적 시선의 확장이 디지털 인문학의 중심이 된다. 그렇기에 영어 일변도의 학문적 지형, 경제-사회적 격차에 따른 디지털 도구들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 자본에 의한 학문 공동체의 축소 등이 디지털 인문학 분야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된다. 이는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 여성주의(feminism), 실용주의(pragmtism), 생명정치(biopolitics), 반인종주의(anti-racism)과 같은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수반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인문학 인식론 논문들에 등장하는 각종 이론과 철학 개념들이 때로는 불필요하고 난삽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는 철학을 공부한 경험 때문에 생긴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약간만 돌린다면 그만큼 디지털 인문학 안에 다채로운 시선과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언어 장벽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이는 다른 이들의 디지털 도구에 대한 접근성 문제와도 같다. 더 현실적으로는 인터넷 서비스의 유무와도 연결된다. 시야를 더 확장해서 보자면 글자 사용 방식의 차이, 즉  LTR(Left-To-Right) 또는 RTL(Right-To-Left)의 차이가 - 수업 중, Top-Down도 있을 수 있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 디지털 인문학이 지닌 하나의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장벽을 당장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장벽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상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시 학문 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이제 겨우 한 학기를 마친 상태다. 여전히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기도 하다. (물론 철학에 대한 의구심도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해져 가긴 한다. 이게 아마도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아닐런지? 불안해지기!)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인문학의 특징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 학문 공동체 (Scholarly Community)
  • 협력 (Collaboration)
  • 개방성 (Openness)
    미국 내에서도 디지털 인문학은 소위 말해 "뜨는 학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금전적 지원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다. 물론 이 또한 소수의 엘리트 학교와 기관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지털 인문학의 지향이 개방성, 다양성, 연결성이라는 점이다. 누군(푸코)가 지식은 권력이라 말하지만, 인문학은 지식만을 쫓지 않는다.  

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하루 가족, Smoky

 우리 집 테라스에 갑자기 날아든 녀석. 우리(Y)는 그/그녀에게 Smoky라는 이름을 주었다. 잘 날지 못하는 녀석은 겁에 질려있었고, 테라스 정리함 아래,  구석진 자리에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녀석은 이번 생을 떠나 보내고 있었다.

안녕. 하루 가족 Smoky. 

2023년 8월 22일 화요일

여름, 청평.

 바닥에 누워 경사진 천장을 바라본다. 평평한 시간이 흐른다. 어쩐지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느릿하고 축축한, 여름 낮 더위 만큼이나 늘어진 내 몸의 무게를 실감한다. 그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싱그러운 물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을 지나서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유속을 짐작해본다. 

 그렇게 한가한 공간을 독차지한 채로 남은 시간을 새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간, 언제까지라도 넉넉할 줄 알았던 그 시간들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반가운 얼굴, 고마운 발걸음, 유쾌한 목소리와 다정한 손길이 아쉬운 마음을 위로한다. 


 올해 나의 여름은 이러했습니다. 덕분에 잘 지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여름, 청평, 2023.

2023년 7월 28일 금요일

젤다, 야생의 숨결에 관한 그의 말.

The Legend of Zelda: BotW

 J: "내일 바로 Tears of the Kingdom 시작할거야!"

 젤다 야생의 숨결을 끝마친 녀석의 여유.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5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243-268)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
But is it also conceivable that there be a language in which a person could write down or give voice to his inner experiences a his feelings, moods, and so on a for his own use? —– Well, can’t we do so in our ordinary language? —–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he |89| words of this language are to refer to what only the speaker can know - to his immediate private sensations. So another person cannot understand the language. (#243, emphasis mine.)
 사적 언어는 발화자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감각'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발화자 이외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 개별자의 사적 언어는 가능한가? 
  •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이 '언어(language)'와 결합할 수 있는가? 
  • 사적 언어의 발화자로서의 '나(I)'는 자신의 감각에 지칭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공유된 규칙, 관습, 문화, 문맥 안에서 언어를 익히고 사용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기술(describe)되지 않은(마련되지 않은) 언어-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For “sensation” is a word of our common language, which is not a language intelligible only to me. So the use of this word stands in need of a justification which everybody understands. (...) But such a sound is an expression only in a particular language-game, which now has to be described. (#261, emphasis mine.)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이는 '아픔'이라는 감각에 대한 행동 변화, 가령 '악'하는 소리, 울음, 회피 등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를 대체할 뿐이다.(#245) 동시에 '아픔'이라는 내감이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날 때, 발화자는 특정한 문맥과 상황 - 올바른 환경(#250) - 을 동반한다. 이를 무시한 채로, 사적 감각과 특정 단어/낱말을 연결하는 것은 공허하다.   
When one says “He gave a name to his sensation”, one forgets that much must be prepared in the language for mere naming to make sense. And if we speak of someone’s giving a name to a pain, the grammar of the word “pain” is what has been prepared here; it indicates the post where the new word is stationed. (#257, emphasis mine.)
 우리가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듯(#202), 특정 단어/낱말을 사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발화자의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픔'이라는 낱말의 문법이 이미 그 자리 - 쓰임 - 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즉, 언어-게임이 이미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규칙을 따른다. 만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적 언어를 구사하길 원한다면, 그 정당화의 기준은 기존의 언어와 독립된, 별도의 곳에 근거해야 한다. 
But justification consists in appealing to an independent authority(#265, emphasis mine.)
 여기서 사적 언어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주관적 정당화는 가능한가? 
 이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주관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나'의 기준이 '나'의 낱말-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가 이에 만족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는 철학적 유아론(solipsism; 唯我論)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철학적 논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함께 던질 수 있다: 
  • 언어 공동체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해주는 독립적 기준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 최초 언어-게임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발화/인식 주체로서의 '나(I)'는 더 이상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정당화 기준의 담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언어 공동체로서의 '우리(we)' 안에 그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쟁점이 된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우리' 외부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 일은 무한 퇴행의 위험이 있고, 
  2. 일상 언어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주장 또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언어-게임, 즉 규칙의 적용과 언어의 사용이 교차하는 장(sphere; 場)의 작동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합의된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 특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 언어 행위에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복수성(plurality), 개방성(openness), 오류 가능성(fallibility)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의 성격과 그 구조에 대한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비판적 참여를 장려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러한 제안이 기준/규범에 대해 지나치게 완화된 정당화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철학적 수고를 성급하게 해소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탐구>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관심사는 일상 언어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일(showing)이지, 이에 대한 철학적 작업의 완성(saying)이 아니다. 

2023년 7월 5일 수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34-242)

 명제, 의미, 낱말, 문장, 읽기. / 들어맞음, 할 수 있음, 이해함.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있는가? 가령 세계와 언어를 연결하는 특정한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한 문장, 그 명제를 이해하는 과정은 특별한 규칙(또는 '마음의 과정')을 수반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단호하다: "이해가 '마음의 과정'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154)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있다. 그렇기에 언어 사용의 배후를 엿보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nonsense). '마음의 과정'을 개입'시키려'는 철학적 기획은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언어 사용(읽기)을 뇌/신경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는 물리주의도 언어의 이해 과정을 온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 (#158) 

 언어 사용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누군가 무엇을 읽는 다거나, 이해하는 것도 다양한 상황, 문맥 안에 있으며,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And in the same way, we also use the word “read” for a family of cases. And in different circumstances we apply different criteria for a person’s reading. (#164)
 언어-게임과 같이 언어 사용도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즉,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일상적 삶의 양식을 영위하는 이들의 언어 사용은 또 다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어-세계, 발화-이해, 규칙-적용 사이에 형이상학적 매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언어 공동체 안에서 공통된 삶의 양식을 공유한다. 우리의 삶 또한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To follow a rule, to make a report, to give an order, to play a game of chess, are customs (usages, institutions).
 To understand a sentence means to understand a language. To understand a language means to have mastered a technique. (#199)
  '규칙 따르기' 또한 '언어의 이해'와 같이 그 적용/사용의 정당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규칙은 관습, 용법, 제도, 습관, 훈련, 그리고 일상적 따르기의 한 형태다. 
 That’s why ‘following a rule’ is a practice. And to think one is following a rule is not to follow a rule. And that’s why it’s not possible to follow a rule ‘privately’; otherwise, thinking one was following a rule would be the same thing as following it. (#202, emphasis mine.)
Following a rule is analogous to obeying an order. One is trained to do so, and one reacts to an order in a particular way. (...) Shared human behaviour is the system of reference by means of which we interpret an unknown language.(#206, emphasis mine.)
  언어는 본질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 이면의 '이해'라는 특별한 인식론적 활동은 불필요/불가능하다. 
  규칙의 적용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다. 다른 선택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에 부연을 덧붙이는 일은 불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일상의 행위/행위자(or 언어/언어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기술(describe)하는 일이다.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65-133)

 "게임"은 무엇인가? (What is a game?)

 "~은 무엇인가? (What is ~?)"라는 물음은 어떤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그 대상에 대해 '설명(explanation)'을 요구한다. 본질을 상정하는 물음은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언어-게임'은 단지 경험적 기술(description)이 가능할 뿐이다. 다양한 게임들을 눈 앞에 늘어놓는다. 
And the upshot of these considerations is: we see a complicated network of similarities overlapping and criss-crossing: similarities in the large and in the small. (#66)

I can think of no better expression to characterize these similarities than “family resemblances”; for the various resemblances between members of a family - build, features, colour of eyes, gait, temperament, and so on and so forth - overlap and criss-cross in the same way. - And I shall say: ‘games’ form a family. (#67)

 '언어-게임'은 특정한 이론적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즉 고정된 개념으로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정립된다. 물론 언어는 그 자체로 개념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통해 '언어-게임'을 말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추상성, 개념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게임의 규칙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게임'은 규칙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공통된 규칙이 게임을 정의하는가? 그러나 각 게임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그에 따른 규칙 또한 고정되지 않는다. 규칙은 게임 안에서도 수시로 변형되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게임'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68)"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규칙' 또한 규정되어 있지 않다! 

How would we explain to someone what a game is? I think that we’d describe games to him, and we might add to the description: “This and similar things are called ‘games’.” And do we know any more ourselves? Is it just that we can’t tell others exactly what a game is? - But this is not ignorance. We don’t know the boundaries because none have been drawn. To repeat, we can draw a boundary a for a special purpose. Does it take this to make the concept usable? Not at all! Except perhaps for that special purpose. (#69, emphasis mine)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언어 '사용'이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녔던 편견,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철학적 기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리학은 어떤 의미에서 고상(sublime)한 것인가?(#89, emphasis mine.)"

 일상 언어의 규칙이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게 적용되기를 원한다면, 이 규칙의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 즉 이상적 논리가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논리는 이상적인가? 그 형식은 고정 불변하는 순수 형식인가? 그들이 말하는 논리의 고상함(the sublimity of logic)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턴(David G. Stern)은 이에 대해 반-회의적(non-Pyrrhonian)입장과 회의적(Pyrrhonian)입장을 나누어 본다.

(non-P.) 
논리는 일상 언어에 적용하는 철학적 방법이며 이는 형식 논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상함(sublime)'이라는 표현은 그 위치를 지나치게 격상시키고, 철학자로 하여금 환상에 가까운 정확성을 요구한다.(p.122)

(P.)
논리는 단순히 단어/낱말 사용을 위한 규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상한' 논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 과 말하기를 터무니없는 것(nonsense)으로 이끈다. 결국 논리를 단어 사용에 적용하는 단순한 규칙 이상의 그 무엇, 즉 형이상학적 쓰임으로 바꾸며, 이를 통해 철학적 문제들, 즉 언어의 본성을 해결할 수 있다 여기게(오표상; misrepresentation) 된다. (p.123)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논리'는 명제의 형식적 통일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다. 그러나 논리 그 자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 적용(employ; use)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언어-게임'이 그러하듯 '논리' 또한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가? 

 설명은 논리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기술(description)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활동/삶의 형식을 동반한다. 

All explanation must disappear, and description alone must take its place. And this description gets its light - that is to say, its purpose a from the philosophical problems. These are, of course, not empirical problems; but they are solved through an insight into the workings of our language, and that in such a way that these workings are recognized a despite an urge to misunderstand them. The problems are solved, not by coming up with new discoveries, but by assembling what we have long been familiar with. (#109, emphasis mine.)

 '논리'를 하나의 '규칙'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언제나 우리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훈련과 숙련을 요구한다. 그것은 언제나 문맥과 배경을 수반한다. 이는 '논리'를 포기하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철학적 탐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은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철학을 재구성할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 종언을 고할 것인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철학은 '언어-게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과 이해에 열려있다.

2023년 6월 17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64)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고백록; Confessions>을 인용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고 싶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These words, it seems to me, give us a particular picture of the essence of human language. It is this: the words in language name objects a sentences are combinations of such names. —– In this picture of language we find the roots of the following idea: Every word has a meaning. This meaning is correlated with the word. It is the object for which the word stands. (#1b, emphasis mine.) 

 언어가 지닌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 낱말과 의미의 단칭적 관계, 낱말이 부여한 대상의 이름, 그리고 대상과 낱말의 대응적 관계가 보여주는 특정한 그림. 이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저서 <논고>를 겨냥한 것인가? (small-picture reading) 또는 책 전반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 수 많은 철학적 편견/독단의 구조를 조망하고 있는 것인가?(big-picture reading)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일면만을 오독하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d에서 제시된, 매우 단순화한 언어-게임(language-game) 속 목소리: "Well, I assume that he acts as I have described. Explanations come to an end somewhere.(#1d, emphasis mine.)"는 비트겐슈타인을 행동주의자(behaviorist)로 만드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그 특정한 문맥 속 [낱말-대상]의 지칭적 관계를 언어의 보편적 구조로 확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I do not wat to call this "ostensive explanation" or "definition", because the child cannot as yet ask what the name is. I'll call it "ostensive teaching of words". (...) No doubt it was the ostensive teaching that helped to bring this about; but only together with a particular kind of instruction. With different instruction the same ostensive teaching of these words would have effected a quite different understanding.(#6)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언어 학습은 한 단어에 대한 "지칭적 가르침"이다. 그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문맥/배경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I shall also call the whole, consisting of language and the activities into which it is woven, a “language-game”. (#7)

 언어-게임은 고립된 언어가 아니다. 각각의 게임이 그러하듯, 언어도 특정한 양식, 패턴, 규칙, 배경을 지닌다. 즉 언어의 사용 방식은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을 낳는다. 

And this diversity is not something fixed, given once for all; but new types of language, new language-games, as we may say, come into existence, and others become obsolete and get forgotten. (We can get a rough picture of this from the changes in mathematics.) The word “language-game” is used here to emphasize the fact that the speaking of language is part of an activity, or of a form of life. (#23, emphasis mine.)

 이와 마찬가지로 "지시적 정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28) 쓰임을 배제한 [낱말-대상]의 지칭적 정의는 무한 퇴행을 야기한다. 이는 마치 모르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전을 찾는 일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쓰임을 배제한 채, 그것의 보편적/이상적 논리 구조를 형이상학적으로 추출할 수 없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활동/삶의 형식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역할, 즉 "느슨한 선험적 기능; loose apriority"을 담당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칸트(I.Kant) 식의 특정한 "정신적 작용; mental-process or mind"과 같은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를 개인들의 범위를 넘어선 공동체의 규약/합의(the communal agreement beyond the reach of individuals)로 해석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본다.  

 #39의 한 문장: 이름은 실제로 단순한 것을 지시해야 한다.; A name ought really to signify a simple.(#39) 

 이 문장은 언어-게임의 논리적 구조가 <논고>에서 제시된 그림 이론과 배치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다. 단어가 문장을 구성하듯, 단순한 것(simples)은 우리 언어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복합적인 것(composite)을 구성한다. 그러나 '단순' 또는 '복합'이라는 개념조차도 문맥 의존적이다. 

 We use the word “composite” (and therefore the word “simple”) in an  enormous number of different and differently related ways. (#47)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명할 수 밖에 없는 '요소(primary element)'는 마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는 듯 보인다. 이는 순수한 언어, 이에 대응하는 단일한 논리 구조를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환상/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We can put it like this: This sample is an instrument of the language, by means of which we make colour statements. In this game, it is not something that is represented, but is a means of representation. (...) What looks as if it had to exist is part of the language. It is a paradigm in our game; something with which comparisons are made. (#51)

 언어의 단일한 구성 요소가 언어 전체의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지칭적 정의/설명 또는 가르침"은 언어-게임의 한 부분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다.  언어-게임의 범례(paradigm)는 고정되지 않는다.

2023년 6월 10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진보란 대체로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 - 네스트로이 

 <철학적 탐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며, 스턴(David G. Stern)은 책의 첫 장, 첫 문장, 네스트로이의 희곡 속 주인공의 대사에 주목한다. 책의 금언(the motto)이 되는 이 문장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지향,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말한다. 그는 이를 일상적 대화의 문체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Motto: 'Anyway, the thing about progress is that it looks much greater than it really is.'  (Nestory) (Stern 2004, p.58)
 이 문장에 대해,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 더 넓게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식-내재적 읽기(immanent reading) or 외재적/발생적 읽기(genetic reading)-의 의미와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스턴의 시선은 <논고; Tractatus>와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탐구>는 자신의 첫 철학적 성취 <논고>를 배격하는가? 혹은 두 저작은 서로 같은 철학적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가? 
 
 네스트로이의 희곡이 지닌 당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 희곡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흐름이 지닌 특징은 다음과 같다.
Each verse divides into three parts: (1) how bad things used to be. (2) how much better they seem now, (3) why they're actually worse than ever. (Stern 2004, p.64)       

 이는 철학적 대화(dialogue)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탐구> 속 목소리, 그 논증 구조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이와 같은 비판적 시각은 비트겐슈타인이 목도한 당시 세계를 향한 것일 수도, 남들이 찬양하는 자신의 철학적 성취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논고>를 통해 바라보던 '세계-언어' 관계의 경직성을, 또는 <탐구>가 딛고 서있는 '일상 언어'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문맥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탐구>의 첫 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스턴은 이 문장을 통해, 이 문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해 그 자체를 <탐구>를 향한 첫 걸음으로 삼는다. 

 Context will play a crucial role in Wittgenstein's subsequent investigations, for he thinks that philosophy goes wrong precisely when it tries to abstract from context, taking words that have multiple meanings in multiple contexts and trying to understand those words taken out the particular contexts in which they are used. (Stern 2004, p.70, emphasis mine.) 

 근대의 기획, 주체의 출현, 주체에 주어진 인식적 특권, 주체가 표상하는 세계, 고립된 언어, 경직된 논리, 그리고 진보에 대한 확신.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이 모두를 향한다. 어쩌면 철학 그 자체의 종말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해석과 이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며, 특정한 문맥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탐구>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한 것(saying)은 그 너머의, 그 자신이 보여주려 한 것(showing)에 대한 이정표가 이미 우리의 삶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이를 탐구하고자 하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5.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 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사물과 사건, 그 역사에 관한 기억의 단절은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 언어, 문화,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침투해 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언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8)

 개인의 단편적 장면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도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공동체의 기억, 모두의 유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또 멀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응시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결국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23, emphasis mine.)

 지금껏 이어져 온 기억,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낸다. 그 간극은 우연하기에 급작스럽다: 기성 세대-전후 세대, 학교-집, 남성-여성, 섹스-낙태, 노동자-부르주아, 종교-아노미, 혁명-상품, 정치-자본.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과 다르게, 유채 씨를 뿌리거나 사과를 흔들어 따거나 죽은 나뭇가지로 단을 묶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지는 않았다. 학교 일정표가 계절의 주기를 대신했다. (...)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연스럽게 원래의 언어를 되찾았다.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 되는 몸에 밴 언어, 양쪽 따귀와 블라우스의 자벨수 냄새, 겨울 동안 구운 사과, 양동이로 떨어지는 오줌 소리 그리고 부모의 코골이와 엮여 있는 그 언어를 되찾았다. (pp.36-37)

사진 속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여자애들은 부르주아 층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자애들과 다르며, 더 강하고 더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너무 자주 어울리고 함께 파티에 다니면서 자신이 타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노동의 세계나 부모님의 작은 상점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왔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은 관련성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단지 지식과 문화 속에만 있을 뿐. (p.104-105)

전쟁에 대한 언급은 50세 이상의 입에서 나오는 허영심 넘치는 개인적인 일화로 축소됐고, 30세 이하는 그것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로 여겼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추모사와 꽃다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6)

 그 누구도 도저히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녀도 그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허위 의식이 선사한 우월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의 맹렬함과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을 향한다. 나는 '나'를 표상한다. 동시에 '세계'로 이행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p.11-12)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p.55)

우리는 바칼로레아의 성공으로 사회적인 존재감을 부여받았다. (p.83)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앞설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단하고, 또 단순했다. 사회가 할당한 요구를 충족시킨 개인들은 손쉽게 통합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p.81), 텔레비전을 샀고(p.112), 어떤 이들은 농부에게 헐값으로 낡은 집을 사기도 했다(p.140). 동시에 그녀는-발칙하게도(?) -혁명을 꿈꿨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33)

 그러나 세계는 생각보다 치밀했고, 유연했다. 딱딱한 정치는 흘러가고, 말랑말랑한 상품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존재의 결핍을 악(惡)으로 규정했던 철학은 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대신 존재(상품)의 과잉이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과잉은 곧 소멸을 동반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09)

시장경제의 질서가 강화됐고 숨 가쁜 리듬이 강요됐다. 바코드를 갖춘 구매품들은 은밀한 신호음 속에 일초 만에 가격으로 넘어가며, 계산대에서 카트까지 더 신속하게 통과했다. (...)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p.246) 

 결국 자본이 시간을 손에 넣었고, 개인은 상품 속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상품이 가벼워지듯, 모든 사물과 사건, 이를 담아내던 언어와 기억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그토록 처절하게, 손에서 빠져나간 그 모든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과 기억의 틈. 그 단절의 간극까지도.

 쉬운 글은 아니다. 작가의 기억은 치밀했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기억을 뒤덮은 흙 먼지를 고운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은 지루하고, 텁텁하다.  

사르트르 <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부르디유 <문화 자본, 아비투스 개념>. 

 책장을 넘기며 이 모두를 떠올린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좌절하고, 사유한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 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삶은 마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고, 그녀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할머니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추억들이 그녀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듯, 그녀들의 삶은 그 이상의 추억과 아픔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도동 집. 가을이면 마당 한 구석 모과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할머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달콤한 향기와 설탕을 유리병 속에 담아내던 그녀. 겨울 저녁을 기다리게 만들던,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던 그 유리병들. 할머니 머리맡에 있던 동전 주머니. 오백원 동전을 손에 들고 찾은 우리 동네 <목포 슈퍼>.
그리고 그녀는......몰락한 명문가의 딸. 재주 많았던 그녀의 조용한 삶. 잃어버린 기억. (할머니 강팽옥)

  우리 가족들의 겨울철 별미. 큼지막한 이북식 손만두. 그리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빙-둘러앉은 가족들의 내기 윷놀이. 그녀에게 배웠던 민화투.    

 그리고 그녀는......고향에 두고 온 가족. 이곳에서 만든 가족. 유별나게 힘들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 어렵사리 만난 고향 가족들에 대한 실망. 떨쳐내지 못하는 지난 날의 회한. (외할머니 이정순)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번에는 작가들의 눈을 빌려 그녀들의 감춰진 뒷모습을 엿볼 뿐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어제 꾼 꿈 中)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무해해보이는 표현 속에 감줘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흑설탕 캔디 中)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척들은 할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베드 中)

그날, 거실로 다과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단어-과부.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먼저 살폈는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즐거움이 잠시 동안이지만 명백하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대한 유산 中)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 행 中)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정원 中)

2023년 4월 13일 목요일

(독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Le Grand Cahier + La Preuve + Le Troisième Mensonge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과잉과 결핍,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에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Claus)와 루카스(Lucas)가 존재한다. 처절한 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거짓 속에서도 이 둘은 함께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총 세 편의 소설 속, 그들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겪은 운명은 어디에 놓여있었나? 모순과 거짓이 진실을 담아내는 그들의 생(生)을 유심히 바라본다.  

 쌍둥이 형제는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하다. '선-악'/'미-추'는 그들 행위의 동기가 아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단지 그 뿐이다.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행한다. 그 어떤 망설임도 미동도 없이 행한다. 응답하는 자!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결코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게다가 후회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긴 침묵 끝에 신부가 말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서 다 보았다. 그 빵 한 조각, 하지만 벌을 내리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다. 너희가 그분을 대신할 권리는 없는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축복을 빌어도 좋겠니?"
 "좋을 대로 하세요." (p.147)

  루카스가 물었다.
  "처형 때도 입회하셨어요?"
  "아니야. 그는 내게 입회해달라고 했지만, 난 거절했지. 자네는 내가 겁이 많다고 생각하지?"
  "글쎄요, 하지만 당신을 이해합니다."
  "자네 같으면 입회했겠나?"
  "그가 내게 부탁했다면, 그럼요, 했을 겁니다." (p.352)

 세상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 진실은 거짓 위에 발을 딛고, 거짓은 진실을 내뱉는다. 그렇게 현실의 결핍을 환상 속 과잉으로 뒤덮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두 형제의 존재는 그들이 나눠가진 이름처럼 '우리'로 분화되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처럼,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존재의 결여, 견딜 수 없는 고독. 그렇기에 그들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 형제가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에도." (p.443)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p.452)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p.545)

  삶의 이면이 곧 삶 자체일 때가 있다.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의 숙명이었고, 그녀가 창조한 작품 속 쌍둥이 형제는 그 과업을 온몸으로 견뎌냈다.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독서) 남자의 자리; La Place by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신유진 역

<남자의 자리>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이 남겨 놓은, 그가 머무른 자리를 본다. 그 무거운 존재의 흔적을 뒤쫓는다. 그리고 작가는 고백한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p.9)
 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이기도 하다. 어렵게 빠져나온 자리.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그의 삶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남의 밭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과 다른 신화들은 그를 비껴갔다. (p.15)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노동자로 돌아가기 싫었던 아버지. 자신의 언어를 고집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이 멸시하던 세계의 일원이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 그렇기에 작가는 그저 글을 쓴다. 그의 삶이 우선이다. 문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견뎌온 생의 몸부림, 그것의 자그마한 일부다. 담담한 어조, 꾸미지 않은 시선, 건조한 문체. 그 외의 것은 필요하지 않다.

 계급이 부여하는 자리. 그 경계선을 넘어 온 '나'의 시선이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어설픈 꾸밈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멀리서, 나는 내 부모를 그들의 몸짓과 말,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정제했다. 나는 그들이 <엘(그녀)> 이라고 발음하는 대신에 <아>라고 발음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방식을 새롭게 들었다. 이제 내게 자연스러워진 그 <점잖은> 몸짓과 올바른 언어 없이 그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만나게 됐고,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52)
 작가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녀는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이야기, 그의 자리에 대한 그녀의 짧은 고백이 나의 마음을 흔든다. 외면할 수 없었던, 떠나온 곳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모두의 마음을 스쳐간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한 남자의 삶. 그 삶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나'의 새로운 세상. 참혹하고 서글픈, 거칠고 따뜻한, 연민과 존경, 유쾌와 엄숙이 엇갈린, 그 누군가의 생을 조용히 바라본다.  

2023년 2월 5일 일요일

(독서) 섬; LES ILES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섬>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온몸으로 읽는 문장을 마주한다. 그것은 조심스레 다가왔고,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저 그 문장들을 이곳에 옮기려 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공의 매혹 中, p.25)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고양이 물루 中, p.36 & 40)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中, p.77 & 8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中, pp.96-97)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앎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無)의 섬뜩함이었다. (이스터섬 中, p.120-121)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적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 준다. (사라져 버린 날들 中, p.165)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글을 대신하여 작가와 역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pp.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