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3일 화요일

대화의 가치(The Value of Conversation)

이론(theory)과 실천(practice)의 관계는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다. 양자 간의 관계에서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그 철학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논의는 이론적인 작업이다. 기존 개념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 새로운 개념의 창조, 개념들의 실천적 사용과 적용에 관한 논의.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모든 이론적 작업은 언제나 실천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글과 말을 통해, 비판과 논쟁을 통해, 소통과 교류를 통해서 하나의 이론이 탄생하고, 다듬어지고, 발전하고, 반증되고, 사라진다. 그렇기에 모든 철학의 태동은 언제나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정도의 차가 있으나) 모든 철학적 논의는 대화를 통해 시작되었다.

앞서 <편견의 가치>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아렌트의 지적을 상기해보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설립은 곧 서구철학이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영역 - 아렌트는 그녀의 철학에서 이를 크게 철학과 정치 영역의 분리됨으로 보고 있다. - 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Today we know that Plato and Aristotle were the culmination rather than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which had begun its flight when Greece had reached or nearly reached its climax. What remains true, however, is that Plato as well as Aristotle became the beginning of the occidental philosophic tradition, and that this beginning, as distinguished from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occurred when Greek political life was indeed approaching its end…Even more serious was the abyss which immediately opened between thought and action, and which never since has been closed. All thinking activity that is not simply the calculation of means to obtain an intended or willed end, but is concerned with meaning in the most general sense, came to play the role of an “afterthought,” that is, after action had decided and determined reality. Action, on the other hand, was relegated to the meaningless realm of the accidental and haphazard. (Hannah Arendt, The Promise of Politics. pp.5-6)

소크라테스의 고백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 은 어느 누구도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그 자신이 철학자로서, 그리고 정치 공동체(polis)의 일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자의 역할은 폴리스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이 아닌,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시민들의 진실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죽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폴리스로 부터 유리된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지식(episteme)의 정당성을 실천(praxis)의 영역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식은 이성을 통한 관조만으로도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주체(나)의 사유만을 통해 지식의 절대적 토대를 찾고, 객체(대상)를 주체의 보편적 개념틀 안에서 표상하였다. 주체는 인식대상을 자신의 이성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 속에서 지식의 보편적 정당성을 얻으려하고, 그 지식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다시 말해, 주체는 객체와의 대립적 관계(confrontation) 속 에서 지식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결국 인식론적 특권은 '객체와 대립하고 있는 주체'에게 귀속되었다. 아렌트는 주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 아닌, 끝으로 향하는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철학의 시작이었다." 대화를 잊은 '객체와 대립하는 주체'의 시작.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도전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논의를 이끌어 간 철학자는 바로 로티(Richard Rorty)다.

로티가 그의 철학 전반에 걸쳐 비판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분석(analytic)-종합(synthetic), 마음(ideas)-대상(objects), 주체(the knowing)-객체(the known), 그리고 이론(theory)-실천(practice). 로티는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을 전복하려 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confrontation)을 참여자들 간의 대화(conversation)로, 지식의 객관성(objectivity)를 공동체의 연대성(solidarity)으로 교체함으로써:

I shall be arguing that their [Sellars and Quine's] holism is a product of their commitment to the thesis that justification is not a matter of a special relation between ideas (or words) and objects, but of conversation, of social practice…Once conversation replaces confrontation, the notion of the mind as Mirror of Nature can be discarded. (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170.)

로티가 그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영미분석철학계의 총아가 배신자가 되다니!"

로티는 기존의 체계적 철학, 즉 대문자 P로 시작하는 철학(Philosophy with a capital P)을 거부한다. 철학은 더 이상 거대 형이상학적 담론의 생산지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진리 추구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비평가("a kibitzer or a therapist or an intellectual historian" in Consequences of Pragmatism)가 되기를 요구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pragmatists) have a new, non-Platonic set of answers to Platonic questions to offer, but rather that they do not think we should ask those questions anymore…They would simply like to change the subject…Pragmatists are saying that the best hope for philosophy is not to practice Philosophy. (Ibid. xiv-xv. emphasis mine.)

그는 기존 철학의 '인식론적 작업과 이론적 개념'이 '사회적 합의와 실천'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철학의 기획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할 수 있는 개방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티는 기존의 실용주의적 관점, 즉 이론과 실천 영역을 이으려는 노력을 굉징히 급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기존 철학들의 이론적 작업, 더 나아가 이론영역 그 자체에 의문 부호를 던진다. 로티는 우리의 그 어떤 문제들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론적 객관성(epistemic objectivity)이 아닌, 사회적 연대성(social solidarity)이 된다.

로티의 실용주의가 지닌 이러한 급진성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기존의 이론영역과 인식론적 개념들에 대한 그의 성급한 폐기 주장은, 오히려 기존 철학들에 대한 실용주의의 가장 큰 비판, 즉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묻는다. '모든 사건과 사태가 사회적 사안으로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로티 그 자신이 주장한 대로 새로운 철학적 작업이 다양한 목소리를 위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라면, 기존 철학의 목소리가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은 그의 글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is time that Rorty himself should appropriate the lesson of Peirce, “Do not block the road to inquiry,” and realize that rarified metaphilosophical or metatheoretical discussion can never be a substitute for struggling to articulate, defend, and justify one’s vision of a just and good society. (Richard Bernstein, The New Constellation. p.253.)

분명 로티의 철학은 급진적이다. 그래서 그의 요구는 성가시다. 그러나 실천과 행위의 영역, 즉 공동체 속 참여자들의 대화를 다시금 철학의 장 안으로 이끌려 한 그의 주장은 또한 분명 유의미하다. 대화가 지닌 개방성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소리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시작점을 얻는다. 따라서 대화는 이론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화는 이론의 과정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론적 작업이 곧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모든 탐구는 편견으로 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 얻어진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지식은 틀릴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는 실용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렇기에 로티의 철학은 실용주의의 정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2017년 5월 16일 화요일

카-ㄹ-스(Cars)에 관한 그녀의 말

그녀가 만화영화 카(Cars)를 보고 있었다. 그도 함께 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Y: "지호야 카-ㄹ-스는 너한테 아직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건 나한테 중요한거야."

J: "......"

Y: "내가 차를 좋아하잖아! 넌 저리가"

J: "......."

그래도 그는 옆에 앉아 있었다.

오류의 가치(The Value of Error)

퍼스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 실제로 그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자기 철학에 대한 왜곡과 오해라고 생각하였다. -, 실용주의는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며 발전했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면서도 그들이 '실용주의자'로 묶일 수 있는, 그들이 함께 자라날 수 있었던 토양은 무엇이었을까? 퍼스가 철학적 탐구의 배경지식으로서 편견을 재해석하고, 절대적 진리의 발견이 아닌 상호 대립적인 의견들의 지속적인 재조정을 철학적 탐구의 목표로 삼았을 때, 철학은 '나'의 고립으로 부터 '우리'의 개방으로 이행하였으며, 이는 곧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은 개념/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편견/의견(prejudices/opinion),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quiry),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 이론과 실천의 관계(theory and practice). 그리고 실용주의가 이러한 주제들로 부터 다양한 조류를 형성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토양은 이 철학이 지닌 개방성(openness)에서 찾을 수 있다.

실용주의의 '개방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허울 좋은 포장지가 아니다.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하는 것은 실용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실천적 의무이자, 동시에 인식론적 의무이다. 이는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용인하고 (퍼스는 이게 너무 괴로워서 pragmaticism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나 보다.), 공통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기꺼이 대화의 상대가 되고자 하는 자세이다. 더불어 이러한 실용주의의 개방성은 하나의 주장이 타당한 이유에 의해 도전 받고, 비판 받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 있다는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의 근거가 된다.

개방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오류가능주의는 회의주의(skepticism)와 분명히 구분된다. 현대과학에 익숙한 오늘날의 회의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악신이라는 유령학적 개념보다는 통속의 뇌(Brain-in-a-Vat)라는 사고실험을 선호한다. 이들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적 믿음들에 - 가령, '내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창 밖의 나무를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신체가 있다.' - 의문부호를 붙인다. 극단적 형태의 회의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될 수 있다.

(S-1) There is nothing we can call knowledge, because we can never be justified in believing.

이러한 형태의 회의주의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논박적이다. 만일 (S-1)이 참이라면, 이는 회의주의 논증 그 자체의 정당화 가능성마저 부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회의론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논증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그 논증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제한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외부세계 회의론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오류가능주의를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실용주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인 반회의주의(anti-skepticism)의 출발점이 된다.

오류가능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우리의 지식은 절대적 확실성을 담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새로운 반증과 비판, 더 나아가 폐기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 지식의 정당화 과정은 언제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류가능주의와 회의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이론적 구조 안에 개방성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우리도 믿음(belief) 차원에서는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류 가능성을 담보한 정당화된 지식(knowledge)은 불가능하다.' 즉, 그들은 지식의 정당화 과정에 있어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한다.

(S-2)
(1) In order to know that P, P must be justified to degree N.
(2) P is not justified to degree N.
Therefore,
(3) We do not know that P. 

회의주의의 약화된 논증 (S-2)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to degree N)'라는 표현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인가?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P를 알기 위한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P를 알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오류가능주의의 지식개념, 즉 잠정적으로 정당화된 믿음(provisionally justified belief)에 만족한다면, 오류가능주의를 못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오류가능주의와 선을 그을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적어도 N 정도의 확실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지식은 불안하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이 불안을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P를 지식이라 할 수 없다.'

이는 회의주의가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 개념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Either there is some support for our being, a fixed foundation for our knowledge, or we cannot escape the forces of darkness that envelop us with madness, with intellectual and moral chaos. (Bernstein, Richard,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8.)  

그리고 이러한 회의주의의 데카르트적 불안은 그들이 지닌 주관주의(subjectivism)와 연결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실용주의는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한다. 개별주체는 더 이상 지식/진리에 대한 마지막 심판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정한 편견을 배경지식으로 삼아 탐구과정에 참여한다. 탐구과정을 통해 확립된 우리의 지식은 잠정적이다. 현재의 지식은 언제든지 다음 탐구과정의 배경지식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확실성 보다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Despite Peirce's insistence on fallibilism, he is far from being an epistemological pessimist or sceptic: indeed, he is quite the opposite. He tends to hold that every genuine question (that is, every question whose possible answers have empirical content) can be answered in principle, or at least should not be assumed to be unanswerable. For this reason, one his most important dicta, which he called his first principle of reason, is “Do not block the way of inquiry!” (Robert Burch, "Charles Sanders Peirc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0 Edition)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방적 탐구과정 안에서 활력을 얻는다.그렇기에 오류는 결코 부정적 개념으로서만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충돌과 갈등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탐구와 대화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2017년 5월 14일 일요일

착한 아이에 관한 그녀의 말

Y: "야. 너만 착한게 아니야. 짜식아."

그녀는 동생이 받는 칭찬이 못마땅하다.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편견의 가치(The Value of Prejudices)

실용주의(Pragmatism; or pragmaticism for Peirce)는 그 이전까지의 인식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편견(prejudice; prejudgment)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이 정치 공동체(polis)의 외부에 아카데미아(Academy)를 세움으로써, 철학은 일상으로부터 독립되었다. 아카데미아의 설립은 철학에게 자유로운 - 물리적/이론적인 의미 모두에서 - 공간을 내주었지만, 사유(thought; philosophy)와 행위(action; politics)의 분리는 철학으로 하여금 말그대로 순수한 학문이 되어야한다는 강박을 심어주었다. 더불어,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이성에 기반을 둔 참된 지식(episteme)은 경험 일반으로 부터 얻는 의견(또는 억견; doxa)과 다른 층위에 놓이게 되었다. [1]



[1]아렌트(H. Arendt)는 이를 서양의 정치철학이 지금껏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ion) 개념을 상실한 채, -정치적(anti-political)인 모습으로 계승되어 왔다는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고립된 지식의 탐구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아렌트의 자유(freedom) 개념은 단순히 필요로 부터의 자유에 그치지 않는다. 필요로 부터의 자유는 적극적인 공적 담론에의 참여로 이행되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억견의 교환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사유와 행위의 접점으로서의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ion)는 정치 공동체의 다원성과 개방성을 확장시키며시민으로서의 정치 참여를 유도한다아렌트의 이러한 논의는 퍼스로 부터 시작되어 제임스, 듀이, 로티, 번스타인, 후기 퍼트넘, 더 나아가 하버마스에 이르는, 실용주의의 서로 다른 조류가 각각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도 공유해 나가는 일련의 개념들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번스타인이 말하듯, 아렌트의 철학과 실용주의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또한, 아렌트가 정치/행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인식/사유 (정확하게는 "판단")의 문제로 넘어가는 반면, 실용주의는 인식/사유의 문제로부터 정치/행위의 문제로 확장해나가는 방향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관계에 대한 양자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이 후의 발전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편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배제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코기토(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명제로 부터 시작한다. 방법적 회의(methodic skepticism)를 통해 명석판명한 인식론적 토대를 세우는 작업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기존 철학과의 비판적 대결이었으며, 동시에 철학의 재구성이었다. 수학의 명제 까지도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한 데카르트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한계선, 즉 '생각하는 주체'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회의한다. 근대학문의 모든 영역, 더 나아가 서구 근대성의 시작을 알린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철학적 문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그의 철학이 절대적 확신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의 철학적 작업이 완성된 지점은 퍼스(C. S. Peirce)에게 있어서 데카르트 이후로 이어져온 기존 철학들에 대한 비판의 시작점이 되었고, 동시에 실용주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비판은 편견에 대한 재해석으로 부터 시작한다.

We cannot begin with complete doubt. We must begin with all the prejudices which we actually have when we enter upon the study philosophy. These prejudices are not to be dispelled by a maxim, for they are things which it does not occur to us can be questioned. (...) A person may, it is true, in the course of his studies, find reason to doubt what he began by believing; but in that case he doubts because he has a positive reason for it, and not on account of the Cartesian maxim. Let us not pretend to doubt in philosophy what we do not doubt in our hearts. (Ibid., pp.28-29, emphasis mine.)

퍼스는 편견을 철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 우리의 철학적 탐구는 편견을 그 배경지식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기존의 의견, 즉 편견을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인식론적 토대를 위한 의심이 아니다.


The irritation of doubt causes a struggle to attain a state of belief. I shall term this struggle inquiry...The irritation of doubt is the only immediate motive for the struggle of attain belief...With the doubt, therefore, the struggle begins, and with the cessation of doubt it ends. Hence, the sole object of inquiry is the settlement of opinion. (Ibid., pp.114-115, emphasis mine.)

의심으로 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곧 탐구(inquiry)이며, 탐구의 목적은 언제나 의견의 '잠정적' 해결이다하나의 의견(opinion; doxa)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의견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은 의심으로 부터 믿음으로, 다시 믿음으로 부터 의심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므로 탐구과정은 결코 인식론적 주체로서의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그것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다시 말해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

We individually cannot reasonably hope to attain the ultimate philosophy which we pursue; we can only seek it, therefore, for the community of philosophers. (Ibid., p.29)

이렇듯 편견에 대한 퍼스의 재해석은 데카르트주의의 주요한 측면 - 주관주의, 직관주의, 토대주의 - 모두에 대한 비판이다. 더불어, 편견을 철학적 탐구과정의 시작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는 인식론의 범위를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인식의 주체는 더 이상 ''가 아닌 '우리'가 되며, 철학은 더 이상 고립된 영역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2017년 5월 9일 화요일

데카르트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불안한거야! (Cartesian Anxiety)

대중적으로 익숙한 (가끔은 오해하고 있는) 철학 문구가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대중들이 창조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문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foundation)를 마련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이 철학적 명제는 근대 서구에서 시작되어 오늘 날 거의 모든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 수용되고 작동한다. 주체-객체, 신체-마음, 내부-외부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주체로 하여금 외부를 표상하게 만듦으로써 객관적 지식의 확장을 도모한다. 따라서 지식의 객관성을 담보해야하는 "나"는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곧 존재로 이행한다. 아니다. "생각하는 "이 이미 존재를 내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데카르트가 서구의 근대를 이 의심할 수 없는 토대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철학자들의 역할은 더욱 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완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그들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시도가 계속됨에 따라 오히려 우리는 불안해진다.

"지금 우리를 받치고 있는 토대가 과연 안전한 걸까?"
"고정된 토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이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 개념은 데카르트의 토대 메타포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번스타인이 주목한 것은 그 이면에 있는 - 그래서 철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 영혼의 여행에 관한 비유이다: 선한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 이 믿음이 지켜지지 못하면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리라는 불안!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강박! 번스타인은 우리의 이러한 믿음으로 부터 유래한 불안과 강박이 단지 인식론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존재론적이라고 주장한다.

It would be a mistake to think that the Cartesian Anxiety is primarily a religious, metaphysical, epistemological, or moral anxiety. These are only several of the many forms it may assume. In Heideggerian language, it is "ontological" rather than "ontic," for it seems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our being in the world. (Bernsetin R.,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9, emphasis mine.)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생각하는 나"에게 불안과 함께 고립을 선물한다. 고립되어 불안한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생각하지 않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나는 소멸해 간다. 소멸해 가는 나는 대립과 배제, 더 나아가 폭력으로써 나의 자취를 다른 것들에게 새긴다. 이건 아마도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나 다시 상기해보자. 확고한, 불변하는, 의심할 수 없는 토대에 대한 우리의 염원이 낳은 대립을. 번스타인은 이를 객관주의와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준다. 객관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체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모든 가치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상대주의는 우리가 지금껏 성취한 모든 사실과 가치를 외면하는 냉소를 우리의 존재방식에 투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자택일식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가다머의 해석학적 접근, 하버마스의 실천적 담론의 장, 로티의 실용주의적 비판, 아렌트의 판단력 개념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번스타인이 도착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Such a vision [cultivating the types of dialogical communities]is not antithetical to an appreciation of the depth and pervasiveness of conflict - of the agon - which characterizes our theoretical and practical lives. On the contrary, this vision is a response to the irreducibility of conflict grounded in human plurality. But plurality does not mean that we are limited to being separate individuals with irreducible subjective interests. Rather it means that we seek to discover some common ground to reconcile differences through debate, conversation, and dialogue. (Ibid. p.223, emphasis mine.) 

앞서 번스타인은 자신의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ontological)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이 곧 또 다른 형태의 고정된 토대로서 우리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껏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존재방식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불안한 선택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이기에, 오히려 우리 존재방식의 다양한 양상을 가능케 한다. 충돌과 다원성은 우리의 존재방식을 열린 장(the open sphere)으로 불러들이며, 고립이 해소된 불안은 오히려 (로티의 말을 빌리자면)창조적 언어로 이어질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새로운 가능성은 "나"의 불안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해소될 때 비로소 그 싹을 틔울 수 있다.

짧은 글의 끝자락에서 멈춰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건 어쩌면 너희(the Western)만의 불안이었던건 아닌가? 아니면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불안해진 건가? 아무튼 내가 딛고 서 있는 많은 것들이 불안하긴 하다.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2017년 5월 8일 월요일

가능성에 관한 그녀의 말

Y: "야. 너도 나중에 나 처럼 이렇게 할 수 있겠냐?"

J: "......"

그는 아직 말을 잘 못한다.

2017년 5월 5일 금요일

나무가 되어 떠나 간 녀석.

1. 대학에 들어가 처음 집어든 철학은 쇼펜하우어. 서른여덟 가지 방법으로 논쟁을 이끌고 싶었다. 이걸 익히고 나면 주눅 않고 시간을 넘겨보자는 생각이었지만, 논쟁이 될 수 없는 것은 이길 수 없었다. 당시 한번도 누군가의 숨결을 구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나를 벗어난 것들에게 매해 합의서를 썼다. 어찌 보면 젊음은 심리(審理)였고, 추궁의 곁가지와 같은 모습이었고, 꿈은 오히려 내가 무의식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온갖 거짓들이 매번 또렷한 모습으로 자신들은 거짓이 아니라 할 때에, 차라리 그 꿈이 딱딱하기를 바랐다.

2. 10년이 더 지났다. 오랜 세월을 함께 견디며 살아갈 것이라 믿었지만,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젊음이 너무 무거웠다. 2006년 여름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우리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새벽 시간을 지우고 있었다.

"형, 그거 알아요.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나는 나를 칭찬하고 싶어요."

"너무 힘들면 누구든 탓해. 먼저 네가 편해져야지."

누구도 탓하지 않았던 녀석은 대신 자신의 젊음을 탓하며 며칠 후 나무가 되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시절을, 새벽의 시간을 나와 함께 지우듯 지워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녀석이 보고 싶다. 더 이상 젊음의 무게를 탓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어찌 되었든 나는 견뎌내며 살고 있다.

3. 나는 이제껏 삶에 적당히 온순했다. 그러나 진심이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4. 5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보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내게 소개해 주었고, 내가 모르고 지냈던 각자의 삶을 들려주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저녁을 사주었다. '녀석도 함께 였더라면......'라는 생각이 그날의 새벽을 지워냈다.

2017년 5월 1일 월요일

엄동설한

-엄동설한-

보기 좋게 널브러진 몇 권의 책들과 책상 위에 엎어진 그의 시간들
자신의 남편이 꽃을 피우지 못 할 마른 나무라는 것을 그 여인은 안다
아침마다 남편을 깨우는 그녀의 눈에선 투명한 꽃이 핀다
그가 부리는 시기와 발작이 꽃의 거름이 된다

캄캄한 새벽 바람 중에 부유하는 몇 톨의 글자가
그의 손끝 마디에 걸터앉은 채 눈을 감는다
남편은 눈 감은 채로 지난 반성문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오래된 것들을 태워 땅 속에 묻으면 몇 뼘의 무덤이 생겼다
그렇게 그는 간신히 아내의 이불 속에 온기를 채워넣었다

다음 날 아침 마른 몸을 물에 적시는 남편을 생각하며 쌀을 올렸다
남편이 부탁한 일은 터져버린 티셔츠 한 장의 바느질이 전부였으나
뜨거운 밥 한끼를 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은 삐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새로 든 집에 올 때부터 기울어져있던 나무바닥은
남편의 가슴팍 마냥 바짝 말라 올 겨울 땔감으로나 써야 할듯하다
오늘 아침 그녀의 눈두덩이에는 투명한 눈이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