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7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9.2022: 레스(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Andrew Sean Greer / 강동혁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9. 2022


<레스; 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 강동혁 역

 '세상 모든 책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글과 그 글의 모든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에 관한 사랑이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책의 표지 만큼이나 경쾌하고 상큼한 사랑 이야기를 - 동시에 주인공 아서 레스의 삶에 깃든 지적 통찰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 기대하며 <레스>를 읽는다. 50세가 되기 직전 사랑이 떠나간다. 프레디가 결혼 소식을 전한다. 레스는 도망치듯 세계 일주를 결심한다. 칭송받는 천재 시인 로버트의 애인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소설 <칼립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간 미루어두었던 온갖 초청에 응한다. 결혼식에 가지 않기 위해서. 

뉴욕 - 멕시코 -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모로코 - 인도 - 일본 -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인 레스는 불안하다. 자기 소설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전히 사랑에는 서툴고, 독일어는 형편없다. 사실 우리 모두가 레스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재의 삶에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랑에는 갈팡질팡한다. (뉴욕에 사는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화자의 시선이 레스의 여행을 따라간다. 그의 사랑, 그의 곁을 스쳐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이 그러하듯 사랑은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을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맞는 거라면, 아서? 만약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맞다면? 그녀가 느낀 게 이 땅을 모두 박살 내는 어떤 거였다면?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거. 넌 느껴봤어? (p.212)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삶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아 / 하지만 내가 죽는 그날엔 / 네가 울게 되리란 걸 알아. (p.269) 

 그 무엇을 받아들이든, 레스는 여전히 순진하리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집에서 기다리는 프레디와 함께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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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다: "뭐야 이거? 뭐 이딴 식으로 글을 썼어?" 

 결국 원서를 찾아 읽는다. 재기 발랄한 문장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치(?) 있는 글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능(?)이 넘쳐 흘러서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감상평은 주관적이지만, 누군가 '퓰리처(풀-잇-서라고 읽든 뭐든)상을 받을만한 책인가?'라 묻는 다면: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헤밍웨이는 받았던 상을 반납할 듯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를 짚어본다: 번역!! 성의 없는 번역!!

 산뜻해야 할 문장이 산만해진다. 작가의 개성이 넘치는 (뭐든지 너무 넘쳐요!) 문장이 철학과 석사 1년생의 겉멋 들어간 글로 탈바꿈한다. 일관성 없는 번역에 실망하고, 비문의 향연 속에서 좌절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 디자인
  • 유명 문학상이 부여하는 그럴듯한 권위
  •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이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본다.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탐구, 또는 사랑에 의한 삶의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단지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On Love; Essay in Love>의 톡톡 튀는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장을 덮는다. 옮긴이의 말도 읽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실패할 때도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 레스의 여행이 그러했듯이."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alytic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Saul Kripke (1940-2022)

Professor Kripke was well-known for his work in philosophy of language and logic, with his Naming and Necessity, the book version of lectures he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in 1970, widely recogniz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ks of 20th Century analytic philosophy. An overview of his influential work can be found here and a list of his publications can be viewed here.

At the time of his death, Kripke was Distinguished Professor of Philosophy and Computer Science at CUNY Graduate Center. From 1977 to 1998 he was a professor of philosophy at Princeton University. Prior to that, he held positions at Rockefeller University, Harvard University, and Princeton, and even before he earned his BA from Harvard in 1962, he taught courses at Yale and MIT. He held many visiting positions around the world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including at Cornell University, UCLA, Oxford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Utrecht, and Hebrew University, to name just some of them.

A 1977 New York Times article about Kripke’s life and career up to that point, and his reputation as a genius, conveys his standing at the time, at least among some philosophers:

Kripke’s potential, his controversial views and his position as [a] budding genius in world analytic philosophy have combined to make him a man who inspires awe and excitement among philosophers. In fact, he has already become something of a cult figure in philosophical circles—gossiped about, studied, analyzed and claimed as a kindred mind. Some philosophers lose their reserve when speaking of him. The cult phenomenon is itself remarkable, for philosophers as a group have such large egos that they correct Aristotle as they would a schoolchild, and they have such a healthy sense of skepticism that they doubt whether such things as proper names exist. Even in groups of two or three, they lace their conversation with exit clauses and qualifiers to guard against having a trapdoor sprung under some private reality. They do not, in short, subordinate or let go of themselves easily, and yet Kripke has been known to bring to their brain‐twisting conclaves the atmosphere of an early Beatles concert.

A 1996 Lingua Franca article by Jim Holt looks at some of the controversial aspects and upshots of Kripke’s reputation.

Among his many honors were the 2001 Schock Prize in Logic and Philosophy from the Swedish Academy of Sciences.

He died on September 15th.

Reference: 

https://dailynous.com/2022/09/16/saul-kripke-1940-2022/

 전공자(분석철학 전공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가 아니어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학부 전공자를 의미합니다!)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 또한 전공자가 아니지만, 그의 철학에 대한 짧은 논문 정도는 읽어봤을 정도다. 물론 나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천재로서, 괴짜로서 -일화에 더 관심이 있긴 했지만. 

 2022년. 뉴욕시는 당대의 철학자들과 작별 중이다.

Richard J. Bernstein (1932 - 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할 때였다. 이제 가을이 되었다. 

 수년 전, 수업이 끝난 밤 9시 가을 밤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기억난다. 집에 가는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와 나누는 짧은 대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Richard Rorty의 철학에 관한 짧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프래그머티즘과 한나 아렌트 철학과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였다.   

이런 저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슬픔과 존경을 담아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의 책 <The Pragmatic Turn> 한쪽 구석에 받은, 젊은 철학도에게 남긴 그의 짧은 응원을 여전히 기억한다. 

To Michael "A fellow admirer of pragmatism." Richard J. Bernstein


(Reference)

2022년 9월 14일 수요일

(독서)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 / 송태욱 역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송태욱 역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마주한다. 글의 몸짓, 글의 숨소리, 글의 표면, 글의 무게, 그리고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듯 써 내려간 그 글의 기세를 쫓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55세. 이혼. 퇴사. 당뇨병. '나'는 개인으로서 죽기를 바랐지만, 결국 다다른 곳은 그의 가족을 집어삼킨, 그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고향, 가자무라다. 도망치듯 도시로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의 인간으로 출세를 향해 나아가던 그의 인생 속 단 한순간도 돌아오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결코 잊을 수 없던 곳. 가키다케 산이 내려보는 폐허, 고향 집 앞에 그가 서있다. 

 15년 전 이곳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한 여동생의 시체를 보았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무고한 이에게 참담한 짓을 저지른 동생은 도망 중이다. 일련의 사건에 낙담한 어머니는 극약을 먹고 고통에 몸부림 치다 죽었다. 남들의 삶에 무관심하던 아버지는 5년 전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안도한다. 행방을 알 수 없던 동생이 고향 집에 돌아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주었다. 녀석을 흉가가 되어버린 고향 집과 함께 태워버린다. 

 누이의 죽음. 아우가 저지른 어긋난 복수. 충격적이고 잔인하지만, 단순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도 지극히 평범한 삶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이면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제와 지레 짐작할 뿐인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가 뒤엉켜있다. 인생은 단순하지만 인간은 의문으로 가득 차있다. 그 의문을 파헤치는 일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일까. 

 그는 죽으려 했다. 홀로 깊숙이 땅을 팠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만들었다. 가족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 만의 죽음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운명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여름의 끈적한 바람이,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 비친 달빛이, 강 건너 맞은편에서 들려온 풀피리 소리가, 한밤 중 도롱이벌레처럼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이 모든 것이 그의 무기력했던 삶에 운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파랑새의 울음이 그의 운명에 확신을 준다: '저놈이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

내가 저주해 마지않는 것은 누이나 그 밖의 몇몇 아가씨에게 독수를 뻗친 성범죄자 자체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로 아무 일 없이 이대로 끝나고 마는 내 처지다. (p.608)

 태풍이 휘몰아친다. 녀석을 마주하고 깨달았다. 녀석은 죽고 싶어 한다. 죽임을 당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녀석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란다. 진정으로 죽고 싶다는 것은 운명을 파헤쳐 보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너 대신 죽어주지!" (p.658)

 자신의 운명을 '나'에게 맡긴다는 듯이 녀석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고, 난폭하게 변한 강물과 토석류가 녀석의 몸을 앗아간다. 녀석의 운명이 '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자애를 베푼 것이다. 

 이제 다시 홀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닥쳐온 운명을 마주했고, 더 이상 꺼릴 것 없이 고향 땅을 밟고 서있다. 강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을 들이켜고, 떠나간 이들의 안식이 빚어낸 흙을 손에 쥔다. 무너졌다 여겼던 자신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으리라.

자아, 나가자. 마음 내키는 대로 들판을 떠돌아다니며 다시 멋진 단독 행동을 실컷 즐기자. 그리고 부침 많은 일생을, 화복(禍福)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이 세상을 마음껏 즐기자. 하지 않는 것이 무난한 일 같은 건 이제 하나도 없다. (pp.670-671)

다시 파랑새의 밤이 시작되었다. 파랑새는 모든 원죄를 대신 떠맡아줄 것 같은 소리를 산들에 메아리치게 한다. 오보레 강의 수면에 비친 나는, 아름답고 맑게 갠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보다, 그리고 반딧불이보다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 (pp.677-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