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4일 화요일

(독서) 남자의 자리; La Place by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신유진 역

<남자의 자리>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그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죽음이 남겨 놓은, 그가 머무른 자리를 본다. 그 무거운 존재의 흔적을 뒤쫓는다. 그리고 작가는 고백한다.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p.9)
 과거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이기도 하다. 어렵게 빠져나온 자리.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그의 삶을 바라본다. 
아버지는 남의 밭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과 다른 신화들은 그를 비껴갔다. (p.15)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나고 자란 '나'의 아버지. 노동자로 돌아가기 싫었던 아버지. 자신의 언어를 고집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이 멸시하던 세계의 일원이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던 아버지. 그렇기에 작가는 그저 글을 쓴다. 그의 삶이 우선이다. 문학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견뎌온 생의 몸부림, 그것의 자그마한 일부다. 담담한 어조, 꾸미지 않은 시선, 건조한 문체. 그 외의 것은 필요하지 않다.

 계급이 부여하는 자리. 그 경계선을 넘어 온 '나'의 시선이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어설픈 꾸밈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멀리서, 나는 내 부모를 그들의 몸짓과 말, 영광스러운 몸으로부터 정제했다. 나는 그들이 <엘(그녀)> 이라고 발음하는 대신에 <아>라고 발음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방식을 새롭게 들었다. 이제 내게 자연스러워진 그 <점잖은> 몸짓과 올바른 언어 없이 그들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다시 만나게 됐고, 나는 나 자신과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p.52)
 작가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녀는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이야기, 그의 자리에 대한 그녀의 짧은 고백이 나의 마음을 흔든다. 외면할 수 없었던, 떠나온 곳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이 모두의 마음을 스쳐간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한 남자의 삶. 그 삶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나'의 새로운 세상. 참혹하고 서글픈, 거칠고 따뜻한, 연민과 존경, 유쾌와 엄숙이 엇갈린, 그 누군가의 생을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