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일요일

(독서) 섬; LES ILES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섬>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온몸으로 읽는 문장을 마주한다. 그것은 조심스레 다가왔고,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저 그 문장들을 이곳에 옮기려 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공의 매혹 中, p.25)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고양이 물루 中, p.36 & 40)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中, p.77 & 8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中, pp.96-97)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앎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無)의 섬뜩함이었다. (이스터섬 中, p.120-121)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적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 준다. (사라져 버린 날들 中, p.165)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글을 대신하여 작가와 역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pp.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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