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9일 화요일

데카르트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불안한거야! (Cartesian Anxiety)

대중적으로 익숙한 (가끔은 오해하고 있는) 철학 문구가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대중들이 창조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문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foundation)를 마련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이 철학적 명제는 근대 서구에서 시작되어 오늘 날 거의 모든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 수용되고 작동한다. 주체-객체, 신체-마음, 내부-외부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주체로 하여금 외부를 표상하게 만듦으로써 객관적 지식의 확장을 도모한다. 따라서 지식의 객관성을 담보해야하는 "나"는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곧 존재로 이행한다. 아니다. "생각하는 "이 이미 존재를 내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데카르트가 서구의 근대를 이 의심할 수 없는 토대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철학자들의 역할은 더욱 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완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그들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시도가 계속됨에 따라 오히려 우리는 불안해진다.

"지금 우리를 받치고 있는 토대가 과연 안전한 걸까?"
"고정된 토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이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 개념은 데카르트의 토대 메타포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번스타인이 주목한 것은 그 이면에 있는 - 그래서 철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 영혼의 여행에 관한 비유이다: 선한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 이 믿음이 지켜지지 못하면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리라는 불안!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강박! 번스타인은 우리의 이러한 믿음으로 부터 유래한 불안과 강박이 단지 인식론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존재론적이라고 주장한다.

It would be a mistake to think that the Cartesian Anxiety is primarily a religious, metaphysical, epistemological, or moral anxiety. These are only several of the many forms it may assume. In Heideggerian language, it is "ontological" rather than "ontic," for it seems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our being in the world. (Bernsetin R.,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9, emphasis mine.)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생각하는 나"에게 불안과 함께 고립을 선물한다. 고립되어 불안한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생각하지 않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나는 소멸해 간다. 소멸해 가는 나는 대립과 배제, 더 나아가 폭력으로써 나의 자취를 다른 것들에게 새긴다. 이건 아마도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나 다시 상기해보자. 확고한, 불변하는, 의심할 수 없는 토대에 대한 우리의 염원이 낳은 대립을. 번스타인은 이를 객관주의와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준다. 객관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체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모든 가치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상대주의는 우리가 지금껏 성취한 모든 사실과 가치를 외면하는 냉소를 우리의 존재방식에 투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자택일식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가다머의 해석학적 접근, 하버마스의 실천적 담론의 장, 로티의 실용주의적 비판, 아렌트의 판단력 개념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번스타인이 도착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Such a vision [cultivating the types of dialogical communities]is not antithetical to an appreciation of the depth and pervasiveness of conflict - of the agon - which characterizes our theoretical and practical lives. On the contrary, this vision is a response to the irreducibility of conflict grounded in human plurality. But plurality does not mean that we are limited to being separate individuals with irreducible subjective interests. Rather it means that we seek to discover some common ground to reconcile differences through debate, conversation, and dialogue. (Ibid. p.223, emphasis mine.) 

앞서 번스타인은 자신의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ontological)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이 곧 또 다른 형태의 고정된 토대로서 우리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껏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존재방식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불안한 선택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이기에, 오히려 우리 존재방식의 다양한 양상을 가능케 한다. 충돌과 다원성은 우리의 존재방식을 열린 장(the open sphere)으로 불러들이며, 고립이 해소된 불안은 오히려 (로티의 말을 빌리자면)창조적 언어로 이어질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새로운 가능성은 "나"의 불안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해소될 때 비로소 그 싹을 틔울 수 있다.

짧은 글의 끝자락에서 멈춰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건 어쩌면 너희(the Western)만의 불안이었던건 아닌가? 아니면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불안해진 건가? 아무튼 내가 딛고 서 있는 많은 것들이 불안하긴 하다.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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