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독서) 고래 by 천명관

고래 by 천명관

 한 사내가 마을에 나타났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강 건너 옆 마을, 그 너머 최근 들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강 주변의 작은 도시까지도 소문이 난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다. 누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를 천 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세상의 규칙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자유인이며, 언제고 어딘가로 떠나 버릴 수 있는 방랑자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인생을 망친 잉여 인간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혹여나 그가 내일 아침이면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고 떠나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내놓은 이야기를 두고, 혹자는 그저 현란한 구라에 지나지 않는다 무시하기도, 기존의 이야기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온 방식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이 사내의 재주를  깎아 내리려 했지만, 깨나 멀리 떨어진 도시의 사람들까지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어 그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그의 말솜씨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수결의 법칙이었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도 옮겨졌다. 가끔은 무시무시한 전래 동화로, 가끔은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랫말로, 그리고 아주 가끔은 비정한 세상사의 한 토막 뉴스 정도로 편집, 각색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대부분의 경우 아랫도리에 피가 쏠려 몸을 배배 꼬게 만들만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급작스레 아연실색 놀래 자빠질 결말로 끝을 맺곤 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천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114)
 발도 없이 퍼지고 퍼진 천 선생의 이야기는 멀리 떨어진 큰 도시 사람들의 귀에 까지 다다랐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명절 연휴가 지나고 직장에 돌아온 이 나라의 산업역군이 고향 집에서 전해 들었다는 야시시한 이야기가 그 발단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작가가 천명관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항간에는 천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무명의 작가가 그의 성씨를 빌려와 작가의 이름으로 삼고, 선생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짜깁기 했을 뿐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 책 또한 그 맛과 향과 감촉이 알싸하고 시큼하고 끈덕진 것이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는 인기의 법칙이었다. 그 책의 대중적 인기에 발맞추어 큰 도시의 식자층은 고심 끝에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그래야 그들도 야시시한 농담을 좀 써먹을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들의 분류표를 개의치 않았다. 천 선생은 이미 어디론가 떠난지 오래고, 그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갑자기 든 생각 #2: 조용한 삶

1. 조용한 삶을 원했다. 어지럽지 않은 세상이기를 바랐다. 어렸다. 어려운 일을 바랐으니 그리 말할 수 있으리라. 어렸다고. 이제는 '모두가 세상을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라는 짧은 생각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어간다. 길지 않은 생을 살아오며 세상에 내놓은 건 거의 없지만, 이제야 고작 한 움큼의 지각을 얻은 기분이 든다. 따뜻한 냉소라 할 수 있을까? 타고난 천성을 반할 수는 없는 일이고, 조금도 세상을 냉소하지 않는 인간은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인간이리라. 그런 인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을 응시하는 완전한 비관론자가 아니라면 필시 유치한 인간일 테니 말이다.

2. 모든 변화는 익숙한 것들의 뒤틀림과 그에 대한 의심, 안일한 확신이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을 동반한다. 

3.  메마른 새벽 공기에 목이 말랐다. 모른 척 다시 잠에 들고 싶었지만 오늘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벽 잠에서 깬 후 바라본 이불은 평평하고 하찮은 무게로 나를 덮고 있었다. 내 삶이 저러하다. 하찮은 삶도 무게가 있다. 그리고 그 안은 따뜻했다. 

4. 너를 꼭 안은 채 세상에 뛰어들었다 믿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네가 나를 안고 있었구나.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11-12.2021: Pachinko by Min Jin Lee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11-12. 2021

<Pachinko> by Min Jin Lee

 첫 문장이 눈에 띈다. 어쩌면 조금 과하기도 하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p.3) 

 방점은 뒤의 "...but no matter."에 찍혀있다. 삶을 이어온 가족의 이야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다. 실상 이는 우리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 살아남는 것이 생()의 주요한 목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살아남기 그 자체가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자신의 삶에 색을 더하고, 의미를 찾는다. '생존'이라는 삶의 맹목적 의지마저도 의미를 갖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가 지속되어 왔다. 이민진 작가의 책 <파친코>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역사 한 부분을 조명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람들의 인식을 보편적이고 쉽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는 분명 작가의 자료 수집과 고증을 위한 노력이 수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기독교를 믿는 이삭의 가족들이 평양 출신이라는 설정, 전후 민단과 조청련 사이의 갈등, 일정 나이가 되면 외국인 등록을 하고 지문을 남겨야 한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역사적 배경의 무게가 등장 인물들을 짓누른다. 양진, 순자, 경희는 책의 마지막까지 "A woman's lot is to suffer."(p.414)이라는 굴레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시대에 짓눌린 채 입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백요셉, 백이삭, 심지어 꽤 매력적인 인물로 등장했던 고한수조차 그 시대의 그저 그런 누군가로 머물러 있다. 이는 아마도 소설의 전체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길게 설정된 시간과, 많은 수의 등장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그중 백노아는 가장 아쉬웠던 인물이다. 
 The big secret that he kept from his mother, aunt, and even his beloved uncle was that Noa did not believe in God anymore. (...) Above all the other secrets that Noa could not speak of, the boy wanted to be Japanese; it was his dream to leave Ikaino and never to return. (p.176)
 Noa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when he was with her; in fact, he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or Japanese with anyone. He wanted to be, to be just himself, whatever that meant; he wanted to forget himself sometimes. But that wasn't possible. It would never be possible with her. (p.308)
 That evening, when Noa did not call her, she realized that she had not given him her home number in Yokohama. In the morning, Hansu phoned her. Noa had shot himself a few minutes after she'd left his office. (p.385)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이 인물의 심리 변화와 행동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단서가 부족하다. 좀 더 집요하고 치열하게 노아의 심리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면 좋았을 듯 하다. 
  • 고한수가 자신의 친부임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 어머니 순자에게 화내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 수치심이 그를 떠나게 만들었나?
  • 결국 백노아는 일본인이 되고자 자살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속일 수 없는 그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었기 때문에 문장의 리듬감이나, 표현의 섬세함에 대해서는 자세히 평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 또한 단조롭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내용과 흐름은 대체로 평이하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 받기로 하는 장면, 남편 백이삭의 무덤을 찾았던 순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럽게 책을 마무리한다.

 냉정한 평은....영어로 쓰여진 한국 근현대사 배경의 (외국인 독자들에게)흥미로운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