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4일 화요일

New York City 9: Life_확실한 불안_Reaction to COVID-19?

 확실한 불안.

 "확실하다"와 "불안하다"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생소하다. 대부분의 경우 불안은 불확실한 대상, 사태, 미래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불안하다. 먼 곳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걱정하며 지냈던 지난 한달이라는 시간이 어느 샌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 곳의 뉴스를 통해 <문이 닫힌 학교 - 마이애미 해변가를 즐기는 젊은이>라는 매우 상반된 상황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리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확실한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아니었던가?

<School Closed> from DOE at NYC

College students from all over the country on the beaches of Fort Lauderdale during spring break.
<College Students at Miami Beach> from NY Times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채로운 빛깔로 채색한다. (위 사진의 젊은이들은 도대체 무슨 색을 자신의 삶에 더하고 있던걸까?) 그러나 주어진 삶의 방향은 모두에게 동일하며, 확실한 종착점에 다다른다: 불안한 삶이 성립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죽음. 

 모든 삶은 우연히 주어진 선물이지만,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을 동반한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에 대해 굳이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눈을 돌림으로써  죽음이라는 불안으로 부터 벗어나려 한다. 불안을 걷어낸 (걷어냈다고 믿는) 삶은 일견 명쾌하고 단순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확실한 목표와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추어진 불안이 이 삶을 위태롭게 한다. '설마. 나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 불안이 들어선다. 갑자기 밀려든 불안은 공포의 얼굴을 한 채, 폭력이라는 형태로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한다. 오만과 독선, 이기심과 무관심, 편견과 증오가 그들의 삶을 뒤덮는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듯 행동하고, 누군가는 남보다 먼저 생필품을 꾸역꾸역 쌓아둔다. 또 누군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휴지는 왜?> from Washington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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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총을 산다는거야?> from Time
 이 순간(March. 2020), 이 곳(New York, NY. USA.)의 확실한 불안.

 트럼프 대통령이 조금은 억지스럽게 중국으로 부터의 모든 비행을 금지한 덕분(?)에 미국은 이 사태를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 잠깐의 시간이 안일함만을 키운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 순간, 이 곳의 확실한 불안"을 마주해야 한다: 지금 당장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전염을 차단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당분간 상황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참고자료 1 & 2)

 한 경제관련 매체에 따르면 "2017년 뉴욕시가 생산한 GDP는 약 $1.5 trillion (한화 약 1800조 원) 이며, 이 수치는 미국 전체 GDP의 약 8%에 해당한다고 한다." (quoted from "Business Insider") 현재 여기저기서 확산 중인 COVID-19 사태에 미국 전체가 정말로 심각한 상황임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의 발원지기도 하였던 뉴욕시지만 오히려 그 여파가 타 국가, 지역들에 비해서는 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뉴욕시가 지니고 있는 관광자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거리와 일상이 멈춰버렸다. 세계 최대의 도시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들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필수 직종을 제외한 모든 직장이 폐쇄되었다. 그야말로 고립된 섬이 되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지만, 일상의 평범함이 오래전 잃어버린 선물처럼 느껴진다. 

 이른 아침, 아이들과 함께 아무도 없는 학교 놀이터에 간다. 텅빈 학교로 가는 사거리 건널목에 경찰 한분이 서있다. 그녀와 짧은 인사를 나눈다. 지금, 여기서,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확실한 불안 속에서, 그녀는 항상 있던 그 자리에 서있다. 다른 이들의 위태로운 일상까지도 버텨낸다. 신나서 뛰어가는 아이들에게 미소 짓는 그녀의 인사 한마디가 나의 멈춰 버린 일상을 위로 한다. 

 삶의 불안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의 행동은 억지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이어 나간다.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한 명의 성실함이 지금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존중과 연대, 배려와 양보, 협력과 상생을 기대하게 만든다.


참고자료: 

2020년 3월 9일 월요일

공정에 관한 그녀의 말

6년 6개월 인생의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의 진리.

Y: "Fair's fair."

2020년 3월 2일 월요일

정도의 차이 #1

모든 가치판단과 그에 관한 명제들은 결국 정도의 차이에 근거한다. 아마도 이는 사실판단과 그 명제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듯 하다. 실상 <사실-가치>는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판단 없이 사실을 바라보지 않으며, 사실판단 없이는 가치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다.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은 결코 이것과 저것의 본질적 다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 사건, 사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아주 미세한 정도의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논리적 구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