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3.2022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by 유성호 |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이 다루는 전문적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선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특정 용어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소개하고 설명할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굉장히 좁은 지식/분야를 다루고, 그들의 글은 매우 촘촘한 논리적 틀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전문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제한해서 사용하는 대중적 글쓰기는 그 논리적 틀이 조금은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전문가/학자들은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더 큰 난관은 이 느슨해진 글 안에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전문가의 관점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가로서 새로운 통찰과 관점을 소개하고, 이를 독자가 자연스럽게 납득해야 한다. 그만큼 '좋은' 대중 교양 서적은 드물다.
(개인적으로 전문 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 중에서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가 매우 교묘하게(?) 잘 짜여진 구성을 갖추고 있다 생각한다. 더불어 데이비드 애드먼즈 & 존 에이디노, <비트겐슈타인은 왜?; Wittgenstein's Porker>은 정말 매력적인 대중 철학 서적이다.)
이제 책으로 돌아가자.
결론: 유성호 교수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좋은 책이다.
책의 초반 저자는 법의학이 바라본 죽음에 대해, 그리고 법의학자가 다루는 방법론과 개념들에 대해 설명한다.
- 사망의 원인 - 의학적 판단
- 사망의 종류 - 법률적 판단
법의학에 관한 이해나 정보가 전무한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각 개념들에 대한 명료한 설명과 분류, 하위 개념들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다양한 예들이 덧붙여져 있다.
이후 책의 대부분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성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죽음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이는 다음과 같다:
- 생명과 죽음에 대한 정의/의미
- 타자화된 죽음
- 안락사/존엄사 논쟁
- 자살
- 연명의료
- 과학의 발전과 미래 사회의 생명
위의 주제들과 함께 유성호 교수는 의사/법의학자로서 바라본 죽음의 모습들을 소개하고, 그로 인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명한다. 가령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연명의료와 존엄사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물음을 던졌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죽을 권리'를 상기한다.
더불어 저자는 현대 의료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오늘날 죽음의 변화/왜곡된 측면을 죽음을 맞이하는 주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의 죽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바로 예감이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예감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p.196)
옛날에는 인생의 시점이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했으며, 자신이 어느 시점에 죽을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시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제쯤 자기가 죽을지를 예감하고 나의 내레이션으로 나의 인생 스토리를 짤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요즘은 불분명한 그레이존 때문에 자신이 정확히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우울해하다가 적극적인 수용, 예컨대 초월과 승화라는 조금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겨를이 없이 죽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p.203-204)
죽음에 대한 '초월'과 '승화'는 앞서 말한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맞는 5단계 중 마지막 수용을 거친 후 또다시 도달해야 하는 최종적인 단계다. (...)그런데 우리 현대 의학은 그러한 승화를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 현대 의학에 의해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p.219-220)
이처럼 저자는 개인의 건강한 죽음과의 관계 맺음,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의 중요성, 그 죽음이 갖는 존엄성, 이를 실천하기 위한 그 나름의 계획을 유쾌하면서도 진중하게 풀어낸다.
삶은 언제나 그 앞에 놓인 어두운 간극을 메우며 앞으로 한 발작을 내딛는다. 생명이 꽃 피운 삶은 언제나 그 익명의 순간을 향한다. 죽음은 이해의 대상도, 소유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구에게나 이번 생이 처음이듯, 죽음도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시 <참을 수 없을 만큼>을 남기며 짧은 감상평을 남긴다.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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