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1일 목요일

이천이십년은 말이야.

이천이십년은 말이지.

지루하고 길게 늘어진 하루하루가 뭉쳐져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일주일을 만들고, 한달을 보내고, 일년을 끝내더라고. 

식탁 위에 놓인, 먹고 배탈난 인절미를 마구 짓누르는 기분이 이럴거야.

아무튼 그렇더라고. 

언젠가 되돌아 보면, 미치도록 그립지만 꼴보기 싫은 그런 일년이 될거같아.

안녕 2020.

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New York City 12: Culture_영화 <미나리>

 


<미나리; MINARI, 2020>

"포스터를 보라. 성조기가 걸려있다. 이건 미국 영화잖아!"

영화 <미나리>에 대한 논쟁이 있다.: <여기>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Awards)는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렇다면 영화 <아포칼립토>는 마야 영화인가?"

당신이 미국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차별과 폭력을 당해봐야 한다. 차별 받지 않고 우연히 또는 너무 쉽게(?) 얻어낸 시민권은 결코 당신에게 소속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와서 시민권자가 된다면? 뭐가 달라질까? 

아이와 함께 125가(125th Street, co-named Martin Luther King Jr. Boulevard in NYC)를 지나가고 있을 때 다가온 할아버지의 말이 기억난다.

"They are so cute. They don't look different to me. We are all the same."

 그는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견뎌왔을까? 

여가와 관조 #1: 조국 전 장관, 윤석열 검찰총장, 그리고 슬픔.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정경심 교수와 그의 딸 조모씨 (결국은 조국 전 장관) 에게는 죄를 물었고, 윤석열 검찰총장은 돌아왔다. 한쪽에서는 성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식을 반겼다. 이 밖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아웅다웅, 얽히고설켜 말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살며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소식을 접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사법부마저 스스로 신뢰를 잃어버린 암담한 상황,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검찰 개혁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했다. - 물론 나와 같은 일반 시민들은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충돌, 타협, 투쟁을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 적어도 나의 눈에는 차근 차근 미리 준비한 계획에 맞춰 진행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듯, 이런 저런 참가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충돌은 점차 격화 되었고, 지금은 그 시작점도, 가치판단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지금껏 합의하여 마련해 온 규범과 규칙을 적용하고, 이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현재의 모든 상황은 권력투쟁의 결과물이고, 권력투쟁은 계속된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문재인 정부는 수세에 몰렸고, 검찰과 사법부의 기득권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나는 이 사실이 슬프다. '슬프다'는 나의 감정은 가치판단이 배제되어있다. 

내가 옳고-그름의 기준으로 이 사항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담담한 사과의 말 - 자신의 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가치,  지나치게 관대했던 자신의 태도 (혹은 무관심),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실망하였음을 알고 있다는 - 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정치세력 간의 순수한 권력투쟁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서로 물고 뜯어가며 외쳐대는 말들은 언제나 <옳고-그름>의 틀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넌 뭐 깨끗하냐?" 그렇다. 원래 날 것의 욕망에서 비롯된 싸움일수록 유치한 법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참가자들 중 품위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또한 조국이었다. (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권력투쟁'의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부터, 논리는 단순해지기 시작했고, 편가르기는 더욱 쉬워졌다. 정치행위의 실상은 권력투쟁이고 적/동지의 구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지향점이 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지속적인 충돌과 합의의 교차점으로부터 발생하며 이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틀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치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동반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충돌하는 세력 (또는 가치) 사이의 권력투쟁이 민주주의 질서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개방성이 요구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그리고 이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러시아 칸트학회가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왕 시작된 권력투쟁이라면 기득권이 전복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검찰총장이라는 직위에 오르는 인물이 '조직에 충성하는' 일은 사라지기를 기대했다.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슬플 수 밖에.

문재인 정부의 패착, 개인으로서의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 윤석열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넘쳐나는 확신들까지. 지금 느끼고 있는 나의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런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아~아까비!"

2020년 11월 26일 목요일

Zuka Zama zom zom zom.

 


Y & J: "Zuka Zama zom zom zom."

Y: "허니베저 처럼 살고 싶어."

M: "......"

J: "응. 얘는 막 살아."

2020년 11월 23일 월요일

국민학교 토요일 3교시가 끝난 시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난 그 소란(?)을 간신히 피했다. 사실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 하는 것은 토요일 3교시가 끝난 직후의 시간이다.

"10분의 쉬는 시간. 40분을 꽉 채우지는 않을 담임 선생님과의 4교시가 시작되겠지."

그리운 그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표현과 진리, 혹은 존재

수학적/과학적으로 표현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명제는 보편적 지식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근대의 학문적 성과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오늘날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 매우 유효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문은 그 자신들도 과학(science)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오늘날 많은 학문영역과 학자들이 <Me-Too-ism>에 빠져 있다며 농담섞인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을 일정 부분 이해하면서도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 수학적 명제는 발견(discovery)의 대상인가? 또는 발명(invention)의 대상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인가?

Invented or Discovered?
Invented or Discovered? from Google

현재는, 매우 잠정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수학적 명제 (또는 간단히 체계, 더 간단히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공식) 는 어디까지나 발명의 영역이다. 세상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술, 종교, 신화, 문학, 과학 등. 그러나 명제라는 것은 단순히 공책 위에 쓰여져 있는 하나의 문장 또는 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장 또는 수식이 지닌 '의미'와 '진리값'을 동반한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가 지닌 의미와 진리값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표현되지 않은 명제'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학적 명제', 그 표현방식의 대상인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 - 가령 1+1=2 - 라는 공식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들의 존재방식 그 자체 - 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이 질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진리값을 동반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발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발명이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발명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학적 질서는 주체로서의 인간 이전 부터 있었고, 인간이라는 종 이후의 세계에도 실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되기 전의 그 어떤 존재를 진리라 부를 수 있는가? 표현되지 않은, 비명제적 진리는 인식 가능한 것인가? 

근대에 들어선 주체는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각각의 표현 방식과 그 객체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도저히 의심이 불가능한 토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마침내 발견했다 믿었던 그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주체는 객체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아마도 이러한 철학적 작업을 가장 세심하고 꼼꼼히 다루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의 인식론은 철저히 명제화된 지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명제적 지식에 다다를 뿐이었고, 바로 이 지점이 칸트 인식론의 가장 큰 성취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의 한계!

다시 한번 수학적 명제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명제가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그 어떤 표현 방식도 결국 존재 그 자체에 이르지 못 할 것이다. 표현은 존재에 다가서려 하지만 존재는 언제나 뒷걸음 친다. 존재는 드러나며 동시에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회의적인 나의 태도는 아마도 존재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 0 뒤에 있는 숫자는 뭐야?" 라는 아이의 질문에 "-1이야."라고 답한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진 어느 날의 짧은 글.>

2020년 10월 27일 화요일

New York City 11: A Guide


<뉴욕에 관한 여행책자들은 많다. 그리고 뉴욕여행에 관한 블로그 자료들도 많다. 그래서 내가 이 곳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뉴욕의 여러 모습들과 그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기억들이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쯤 뉴욕은 활기를 되찾을지 모르겠지만......



2020년 8월 3일 월요일

자식 사랑에 관한 그의 말

곰 놀이를 하던 중, 난 J를 잡아먹기로 했다. 그를 잡아서 품에 넣은 채로 잡으먹으려고 하자...

J: "(울먹이며) 누나만-- 사-랑-하는거 같----네-----?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정도의 차이 #2

"The way I see it, unethical ethics are better than no ethics at all."
from glasbergen.com

윤리적 규범의 형식과 논리가 무력해지는 지점에 정도의 차이가 들어선다. 그 곳에서 우리는 행위자들 간의 구체적 내용을 목격한다. 현실에서 목격하는 모든 가치의 충돌은 그 당사자들에게 언제나 생생하고, 치열하며, 많은 경우 상처를 남긴다. 또한 그 충돌의 뒤편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 때로는 그것이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 다양한 이유와 사건들이 얽혀 있기도 하다. 윤리학/도덕철학(가치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들)은 많은 경우 대상/사건/행위자와 거리를 유지하고, 때로는 그 내용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배제한 채 논증을 전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문은 규범의 형식/논리와 구체적 내용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 불분명하고 모호한 지점을 목도하고, 사유하고, 기록해야 할 책임이 있다.:
  • 대상에 대한 논증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or 논증에 적용하는) 윤리적 규범의 형식/논리를 더욱 더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 어느 경우에나 특정 형식/논리가 담아낼 수 없는 구체적 내용,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 그러나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을 윤리/도덕 환원주의적 (or 허무주의적) 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 이 개념은 오히려 서로 다른 규범/형식 간의 대화와 충돌을 허용하는 개방성(openness)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어떤 형식/논리에도 기대지 않고, 특정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는 가치와 사실의 혼재 속에서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특정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특정 형식/논리를 내재화 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간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이론적으로 완전한 토대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그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자기논파적일 뿐이다. 그렇기에 특정 형식/논리의 맹점을 보완하고, 정도의 차이에 대한 맹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규범-인식론적 개방성이다.

2020년 6월 25일 목요일

자기본위?

자기본위의 삶, 사유, 행위, 자율,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

주변 세계의 구조, 규범, 요구, 변화와 지속을 동반하는 시간의 흐름은 이겨내야 할 대상인가? 감당하고 품어내야 할 조건인가? 또는 그저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한가?

2020년 6월 15일 월요일

진학에 관한 그의 말

J: "Bye guys. I am giving up kindergarten. I'll be staying at PreK forever. I'll miss you."

2020년 6월 13일 토요일

X를 쓸 줄 아는 그.

J는 영어 철자 X를 쓸줄 안다.

1. 그는 가운데에 점을 먼저 찍는다.
2. 대각선으로 네개의 선을 조심스럽게 긋는다.

그는 만족스럽다.

2020년 6월 2일 화요일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 관한 그의 말

M: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야?"

J: "이 도시의 사람들 다."

그는 슈퍼 영웅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다.

2020년 5월 8일 금요일

단막극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카페의 구석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입구가 마주 보이는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기엔 토요일 오후 두 시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사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였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는 물음을 대신하여,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남성과 가벼운 눈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직 학생 같기도 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듯 보이는 그 남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 자리에 돌아와 앉은 그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소설책을 주로 읽었지만, 그날 그녀가 가방에 넣어서 가져온 책은 어느 시인의 여행 관련 책이었다. 

이런 것도 다시 유행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글의 첫 문장부터 어색하게 느껴졌다.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시어들이 산문의 온전한 문장 안으로 들어가자 부담스럽고 과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여행을 할 때면 눈으로 보기 보다는 소리를 담아온다는 둥,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바람의 결을 바라본다는 둥, 자신이 겪은 세상은 남들과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는 듯 과시하는, 정돈되지 않은 감상문이었다. 이 작가에게는 산문을 시처럼 쓴 것도 일종의 실험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글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싫어하는 게 뭐예요?"
"왜 그런걸 묻죠? 보통은 좋아하는 것을 묻잖아요.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작가라든지, 하다못해 좋아하는 색이라든지 말이에요." 읽던 책을 엎어 놓으며 그가 되물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좋아하는 것 보다는 싫어하는 걸 아는 편이 수월해요. 참고로 저는 지금 이 책이 싫어요." 여자가 자신이 읽던 책의 표지를 보여주며 답했다.
"그런데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남자가 다시 되물었다.
"듣고 보니 맞네요. 정정해야겠어요'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으로."

대체 대화를 나눈다는 게 뭘까?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면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이에도 대화가 가능할까? 그녀 자신의 질문이 또 다른 물음들로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 넣으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재촉하듯 남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싫어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 뭐랄까. 욕망에 대한 사람들의 어설픈 위선이 싫어요. 그런데 자신들의 욕망을 유치하게 드러내는 위악은 더 싫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만큼 최악은 없으니까요.”
"결국 위선이든 위악이든 서툴고 미숙한 것들이 싫은가 보네요?"
". 그렇긴 한데, 사실 다들 누구나 유치하고 어설프게 행동하고 말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적어도 그 순간들을 떠올렸을 때 부끄럽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위선이든 위악이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들 미성숙한 인간들이거든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몸서리쳐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본인의 판단 기준이 분명하네요. 머릿속에 뭐든지 그렇게 잘 정리되어 있나요?"
"기준이 없으면 불안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을 할 때마다 정리해서 기억해두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 아마도 제가 아직 성숙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미성숙한 단계를 이제 막 빠져 나왔다고 해서 단번에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그가 답할 때마다 중간에 섞여 들어가 있는이라는 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성실한 얼굴빛과 닮은 소리였다. 대화 속 물음들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말투도 듣기 좋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의 이런 태도와 말투 덕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카페 옆자리에 앉아서 귀찮게 말을 걸고 있는, 방금 처음 본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무거워서 당혹스럽다거나, 너무 가벼워서 장난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어쩌면 지금 그녀의 이런 호감은 오후 두 시라는 애매한 시간과 그 시간을 어정쩡하게 채우던 어느 시인의 여행 산문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대화는 싫지 않아요.”
?”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의 말이 그녀에게는 마치 질문같이 느껴졌다.
지금 이 대화는 좋다고요.” 남자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저도요.”                           

가볍게 말하며 뒤집어 놓은 책의 겉 표지를 훑어 본다. 시인의 이름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껏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얼굴 생김새와 목소리도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 끝이 이 책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여전히 밝았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야 할거 같아요.’라는 말 대신에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테이블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들어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빠져나갔다. 마시던 커피 잔을 카운터 위에 올려 놓고 아르바이트생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본다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줄곧 성실히 답하던 방금 전의 그 얼굴로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대화의 끝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20년 4월 27일 월요일

갑자기 든 생각 #1: 스피노자 & 칸트

스피노자는 단호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그에 반해 칸트는 참 신중하다. 신중한 만큼 그의 철학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기준이 된다. (전공자가 많다는 소리다.) 

아무튼 칸트 국적은 현재 러시아다.

2020년 4월 17일 금요일

New York City 10: Life_나의, 너의, 우리 모두의 대통령, Donald Trump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라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적어도 4년은 버텨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요즘 그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어져 간다.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한편의 리얼리티 쇼를 진행하고 있는 지금껏 우리가 목도해온 광경은 때론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동반했고, 대부분은 참담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의 무지와 독선, 유치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한다.

트럼프와 그 주변인들이 이제껏 펼쳐놓은 리얼리티 쇼의 주요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1.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즉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개념.
  2.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자들과 언론을 향해 "당신은 가짜."라고 주장.
  3. 자신의 딸과 사위를 백악관 선임 고문으로 임명.
  4. 노벨상을 연호하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엄지를 들어올리던 모습.
  5. 멕시코와의 국경 사이에 "아무도 넘어 올 수 없는(?)" -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전동톱으로 쉽게 뚫고 넘어왔다. - 장벽을 설치함.
  6. 덴마크의 그린란드(Greenland)를 사고 싶어함.
너무 많으니 이쯤에서 생략하자! 그리고 오늘 트럼프가 선동하듯 남긴 트위터 글:
"LIBERATE MINNESOTA." "LIBERATE MICHIGAN." "LIBERATE VIRGINIA, and save your great 2nd Amendment. It is under siege."
미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지점 - 의료보험 & 공공의료 -이 코로나(COVID 19)의 공습에 맥을 못 추고 있다. 이 와중에 트럼프는 주지사들과의 대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 싶어 울부짓는 한명의 어린아이가 되어 유치하고도 광기어린 트위터 글을 남겼고, 이 무책임한 발언에 올라탄, 꽤 많은 수의 생각없는 사람들(극심한 이기주의와 인종주의를 무기로 삼는......그러니깐 그냥 병신들)이 미국사회의 감춰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진실을 드러낸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끔찍한 정치 지도자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광기와 독선에 사로잡힌 권력자는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고, 때로는 거짓 선동과 이념을, 때로는 대중의 무지와 분노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트럼프라는 인간은 뭘까? 어떤 범주에 속하는 인간일까? 오늘 미완성의 결론을 내보자!

  •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되지 못한, 그래서 유치하고 위험한 어린이.

그렇다면 도대체 미국이라는 사회는 왜 이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았을까?

  • 그냥! 뽑을 수 있으니깐! 웃기고 신나니깐!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Philosophy and Comedy>라는 수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수업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껏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타자로부터 유리된 채 고립되어 있는 근대적 주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동체 속의 주체를 희극을 통해 재발견해보자!>
이 수업을 통해 바라본 고전 희극 속의 주체는 언제나 타자와의 갈등 속에 서있지만, 또 언제나 공동체 안의 정치적 주체로서 이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희극의 주체가 과연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과연 근대적 질서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았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것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희극 속의 주체는 때론 너무 순진하고, 그 갈등의 해결은 가끔 너무 우연적이다. 그렇기에 서구 근대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물려받은 오늘날의 정치는 아마도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싶다. 이 위태로운 줄을 타고 건너편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 적어도 트럼프가 진행하는 저급한 리얼리티 쇼의 저질 음담패설과 유치한 대결을 공공의 영역에서 몰아내야 할것이다. 이런 쇼는 아주 가끔, 혼자 낄낄거리며 보는 것이지, 남들과 함께 보기에는 너무 유치하다.

2020년 4월 15일 수요일

대학에 관한 그녀의 말

엄마와 나눈 대화.

S: "엄마도 대학교 첫 날 밤에 많이 울었어."

Y: "왜 울었어?"

S: "부담이 되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죄송스러워서. 돈이 많이 필요하거든."

Y: "그럼 가지 말았어야지."

M: "오~천재네."


That is still up in the air.

Everything is still up in the air. 

2020년 3월 24일 화요일

New York City 9: Life_확실한 불안_Reaction to COVID-19?

 확실한 불안.

 "확실하다"와 "불안하다"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생소하다. 대부분의 경우 불안은 불확실한 대상, 사태, 미래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불안하다. 먼 곳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걱정하며 지냈던 지난 한달이라는 시간이 어느 샌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 곳의 뉴스를 통해 <문이 닫힌 학교 - 마이애미 해변가를 즐기는 젊은이>라는 매우 상반된 상황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리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확실한 불안"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아니었던가?

<School Closed> from DOE at NYC

College students from all over the country on the beaches of Fort Lauderdale during spring break.
<College Students at Miami Beach> from NY Times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채로운 빛깔로 채색한다. (위 사진의 젊은이들은 도대체 무슨 색을 자신의 삶에 더하고 있던걸까?) 그러나 주어진 삶의 방향은 모두에게 동일하며, 확실한 종착점에 다다른다: 불안한 삶이 성립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죽음. 

 모든 삶은 우연히 주어진 선물이지만, 모두가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을 동반한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에 대해 굳이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눈을 돌림으로써  죽음이라는 불안으로 부터 벗어나려 한다. 불안을 걷어낸 (걷어냈다고 믿는) 삶은 일견 명쾌하고 단순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확실한 목표와 성공을 향한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추어진 불안이 이 삶을 위태롭게 한다. '설마. 나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확신이 무너진 자리에 불안이 들어선다. 갑자기 밀려든 불안은 공포의 얼굴을 한 채, 폭력이라는 형태로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한다. 오만과 독선, 이기심과 무관심, 편견과 증오가 그들의 삶을 뒤덮는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듯 행동하고, 누군가는 남보다 먼저 생필품을 꾸역꾸역 쌓아둔다. 또 누군가는 주변의 사람들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휴지는 왜?> from Washington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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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총을 산다는거야?> from Time
 이 순간(March. 2020), 이 곳(New York, NY. USA.)의 확실한 불안.

 트럼프 대통령이 조금은 억지스럽게 중국으로 부터의 모든 비행을 금지한 덕분(?)에 미국은 이 사태를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 잠깐의 시간이 안일함만을 키운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 순간, 이 곳의 확실한 불안"을 마주해야 한다: 지금 당장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전염을 차단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당분간 상황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참고자료 1 & 2)

 한 경제관련 매체에 따르면 "2017년 뉴욕시가 생산한 GDP는 약 $1.5 trillion (한화 약 1800조 원) 이며, 이 수치는 미국 전체 GDP의 약 8%에 해당한다고 한다." (quoted from "Business Insider") 현재 여기저기서 확산 중인 COVID-19 사태에 미국 전체가 정말로 심각한 상황임을 느끼기 시작한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의 발원지기도 하였던 뉴욕시지만 오히려 그 여파가 타 국가, 지역들에 비해서는 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뉴욕시가 지니고 있는 관광자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거리와 일상이 멈춰버렸다. 세계 최대의 도시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들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필수 직종을 제외한 모든 직장이 폐쇄되었다. 그야말로 고립된 섬이 되었다.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지만, 일상의 평범함이 오래전 잃어버린 선물처럼 느껴진다. 

 이른 아침, 아이들과 함께 아무도 없는 학교 놀이터에 간다. 텅빈 학교로 가는 사거리 건널목에 경찰 한분이 서있다. 그녀와 짧은 인사를 나눈다. 지금, 여기서,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확실한 불안 속에서, 그녀는 항상 있던 그 자리에 서있다. 다른 이들의 위태로운 일상까지도 버텨낸다. 신나서 뛰어가는 아이들에게 미소 짓는 그녀의 인사 한마디가 나의 멈춰 버린 일상을 위로 한다. 

 삶의 불안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의 행동은 억지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이어 나간다.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한 명의 성실함이 지금 그리고 여기서 우리에게 존중과 연대, 배려와 양보, 협력과 상생을 기대하게 만든다.


참고자료: 

2020년 3월 9일 월요일

공정에 관한 그녀의 말

6년 6개월 인생의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의 진리.

Y: "Fair's fair."

2020년 3월 2일 월요일

정도의 차이 #1

모든 가치판단과 그에 관한 명제들은 결국 정도의 차이에 근거한다. 아마도 이는 사실판단과 그 명제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듯 하다. 실상 <사실-가치>는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판단 없이 사실을 바라보지 않으며, 사실판단 없이는 가치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다.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은 결코 이것과 저것의 본질적 다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 사건, 사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아주 미세한 정도의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논리적 구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20년 1월 21일 화요일

마음이 아픈 그의 말

학교에서 나온 J는 내 앞에 서서 눈물을 떨구었다. 뒤이어 나오는 Y의 표정을 보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지만,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땅에 대고 앉은 나는 분명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J: "아빠. 나 너무 아파."
M: "왜? 어디가 아파?"
J: "아빠. 나 마음이 너무 아파."
M: "무슨 일 있었어? 말해봐 괜찮으니깐."
J: "나 바지에 응가 했어."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집에 온 그는 욕실에서 씻은 후 즐겁게 놀고 있다.
이것이 그의 생일 선물인가?

-2020년 1월 21일 화요일-

2020년 1월 8일 수요일

New York City 8: People_타지키스탄(Tajikistan) 아빠

일요일 아침. 뉴욕의 겨울이 드디어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추위는 놀이터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에 치여, 속절없이 물러서는 작은 돌맹이와 다를 바 없다. 난 밖으로 나가야 한다. 주말 아침의 맑은 하늘을 탓할 수 없었고, 차가운 바람은 이미 마음껏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추위 속, 놀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두 딸의 아빠는 타지키스탄(Tajikistan)이라는 (적어도 나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나라에서 왔다.

여기 
Map of Tajikistan with its capital Dushanbe
Tajikistan from Google Image

그의 첫 마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르는 J를 가리키며) "Boys are different, right?"
나의 대답: "Totally"

두 딸의 아빠는 아들이 있는 아빠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내게도 딸 Y가 있으니, 나는 그가 두 딸의 아빠로서 살아가는 고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현재 UN에서 여러 사람들과 협상(?) 중인 외교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곧 3년 6개월 간의 시간을 끝으로 뉴욕을 떠난다고 한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그의 영어에는 매력적인 억양이 함께 하고 있었고, 어린 시절 3년의 시간 동안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닌 그의 두 딸은 매끄러운 영어를 구사하며 뛰어 놀고 있었다.

뉴욕에 온지 몇 년이 지나, 각자의 영어에 각자의 억양이 묻어나온다는 사실이 꽤나 멋지다고 느낄 즈음, 나는 뉴욕의 매력을 점차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나라, 문화, 역사, 정치, 자연들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알게 되었을 즈음, 내가 미국이 아니라 뉴욕에 살고 있음을 재차 깨닫는다.

내가 언제 또 타지키스탄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2020년 1월 1일 수요일

<소개> 안녕 노트

<소개> 안녕 노트. >>>>>>> https://tumblbug.com/annyung_note

직장생활의 안녕을 바라는 당신에게, [안녕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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