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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4일 화요일

나무가 가득한 곳(Eugene, OR)으로.

지난 가을 논문을 제출하고, 디지털 인문학(DH) 석사 과정을 마쳤다. 나에게는 새로운 분야였고, 다양한 주제와 서로 다른 시각, 처음 접하는 프로젝트들과 알지 못했던 세상이 엇갈리는 시간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프로젝트들이 있고, 이토록 기발한 생각들이 있구나!'

흥미로움과 감탄이 교차했고,

'도대체 이게 왜 안 되는 걸까?'

좌절과 분노가 겹쳐졌다. 

(여전히 못하는) 코딩을 접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고, 이미 세상은 AI를 이용한 바이브 코딩이 대세가 되었다. 그래도 새로운 언어를 맛볼 수 있는 기회였고, 단순히 코딩 그 자체보다도 어떤 데이터를, 무슨 목적으로, 누가, 왜,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다음은 뭘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던 중, DH 라운지에서 잡담을 나누던 동료 학우의 작은 응원에 힘을 얻어 박사과정에 지원했다. ("No...There's no such thing as being old for a PhD."라고 말했던, 그도 나이가 적지 않았기에...) 새로운 분야에서 직접 일을 해 보는 선택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고, 실제로 이런저런 직종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지만, 결국은 좀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총 여섯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그중 절반은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나머지 절반은 철학 프로그램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과 분야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과 석사 논문의 주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의 절충안이었다.   

역시나 적합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였고, 연구 관심사/주제와 방법론이 가장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왔고, 아마도 유일할 듯하다. 

Philosophy, University of Oregon으로부터 정식 제안을 받기 전, 학과 소속인 두 명의 교수로부터 연락이 먼저 왔고, 그중 Colin Coopman 교수와는 열 번 정도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로 원하면 돈을 좀 더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돈 이야기는 없었고, 혹시나 다른 프로그램에 합격하게 되면 자기에게 연락을 달라는 부탁, 자신의 연구에 대한 설명, 자신이 맡고 있는 New Media and Culture 프로그램과 나의 관심사가 일치한다는 등의 연구 관련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여전히 제안을 기다리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고, 뉴욕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어서 고민이 많다는 나의 답장에는 학교의 가족 지원 프로그램들과 Eugene이 가족들과 살기 너무 좋다는 말, 자신이 두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자세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정도로 원하면 돈을 좀 더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돈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결정했다. 나무가 가득한 곳; Eugene, Oregon으로 가기로. (여전히 연락을 기다리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기도 하였고 - 비슷한 주제의식은 있으나 접근 방식이 조금 상이하고 무엇보다 프로그램 내 관심 교수가 한 명뿐이라서...- 연구 주제의 적합도가 높고, 무엇보다 내 연구를 지지해 줄 수 있는 교수와 함께 공부하고 싶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아내에게 먼저 허락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Y는 슬퍼했고, J는 단호했다.

"It sounds stupid. It just does."

자주 오겠다는 각오와 거짓말로 방어막을 만들고, 여름방학에 더 즐겁게, 더 많이 시간을 보내자는 약속을 했다.

현재.

기숙사를 배정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으며,  나 홀로 이사에 대해 연구하고, 떠나기 전 뉴욕 집에 필요하거나 고쳐야 하는 것들을 찾고 있고, <장길산> 마지막 장을 읽고 있으며, 바이브 코딩이라는 걸 한 번 시험해 볼까싶다. 

이렇게 청춘은 계속된다. ......될까? ......될 것이다!

- J의 농구 발전을 위해서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용기 있게 중도 하차할 것임을 다짐하며.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5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243-268)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
But is it also conceivable that there be a language in which a person could write down or give voice to his inner experiences a his feelings, moods, and so on a for his own use? —– Well, can’t we do so in our ordinary language? —–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he |89| words of this language are to refer to what only the speaker can know - to his immediate private sensations. So another person cannot understand the language. (#243, emphasis mine.)
 사적 언어는 발화자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감각'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발화자 이외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 개별자의 사적 언어는 가능한가? 
  •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이 '언어(language)'와 결합할 수 있는가? 
  • 사적 언어의 발화자로서의 '나(I)'는 자신의 감각에 지칭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공유된 규칙, 관습, 문화, 문맥 안에서 언어를 익히고 사용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기술(describe)되지 않은(마련되지 않은) 언어-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For “sensation” is a word of our common language, which is not a language intelligible only to me. So the use of this word stands in need of a justification which everybody understands. (...) But such a sound is an expression only in a particular language-game, which now has to be described. (#261, emphasis mine.)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이는 '아픔'이라는 감각에 대한 행동 변화, 가령 '악'하는 소리, 울음, 회피 등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를 대체할 뿐이다.(#245) 동시에 '아픔'이라는 내감이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날 때, 발화자는 특정한 문맥과 상황 - 올바른 환경(#250) - 을 동반한다. 이를 무시한 채로, 사적 감각과 특정 단어/낱말을 연결하는 것은 공허하다.   
When one says “He gave a name to his sensation”, one forgets that much must be prepared in the language for mere naming to make sense. And if we speak of someone’s giving a name to a pain, the grammar of the word “pain” is what has been prepared here; it indicates the post where the new word is stationed. (#257, emphasis mine.)
 우리가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듯(#202), 특정 단어/낱말을 사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발화자의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픔'이라는 낱말의 문법이 이미 그 자리 - 쓰임 - 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즉, 언어-게임이 이미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규칙을 따른다. 만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적 언어를 구사하길 원한다면, 그 정당화의 기준은 기존의 언어와 독립된, 별도의 곳에 근거해야 한다. 
But justification consists in appealing to an independent authority(#265, emphasis mine.)
 여기서 사적 언어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주관적 정당화는 가능한가? 
 이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주관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나'의 기준이 '나'의 낱말-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가 이에 만족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는 철학적 유아론(solipsism; 唯我論)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철학적 논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함께 던질 수 있다: 
  • 언어 공동체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해주는 독립적 기준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 최초 언어-게임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발화/인식 주체로서의 '나(I)'는 더 이상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정당화 기준의 담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언어 공동체로서의 '우리(we)' 안에 그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쟁점이 된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우리' 외부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 일은 무한 퇴행의 위험이 있고, 
  2. 일상 언어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주장 또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언어-게임, 즉 규칙의 적용과 언어의 사용이 교차하는 장(sphere; 場)의 작동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합의된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 특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 언어 행위에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복수성(plurality), 개방성(openness), 오류 가능성(fallibility)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의 성격과 그 구조에 대한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비판적 참여를 장려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러한 제안이 기준/규범에 대해 지나치게 완화된 정당화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철학적 수고를 성급하게 해소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탐구>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관심사는 일상 언어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일(showing)이지, 이에 대한 철학적 작업의 완성(saying)이 아니다. 

2023년 7월 5일 수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34-242)

 명제, 의미, 낱말, 문장, 읽기. / 들어맞음, 할 수 있음, 이해함.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있는가? 가령 세계와 언어를 연결하는 특정한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한 문장, 그 명제를 이해하는 과정은 특별한 규칙(또는 '마음의 과정')을 수반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단호하다: "이해가 '마음의 과정'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154)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있다. 그렇기에 언어 사용의 배후를 엿보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nonsense). '마음의 과정'을 개입'시키려'는 철학적 기획은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언어 사용(읽기)을 뇌/신경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는 물리주의도 언어의 이해 과정을 온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 (#158) 

 언어 사용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누군가 무엇을 읽는 다거나, 이해하는 것도 다양한 상황, 문맥 안에 있으며,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And in the same way, we also use the word “read” for a family of cases. And in different circumstances we apply different criteria for a person’s reading. (#164)
 언어-게임과 같이 언어 사용도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즉,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일상적 삶의 양식을 영위하는 이들의 언어 사용은 또 다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어-세계, 발화-이해, 규칙-적용 사이에 형이상학적 매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언어 공동체 안에서 공통된 삶의 양식을 공유한다. 우리의 삶 또한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To follow a rule, to make a report, to give an order, to play a game of chess, are customs (usages, institutions).
 To understand a sentence means to understand a language. To understand a language means to have mastered a technique. (#199)
  '규칙 따르기' 또한 '언어의 이해'와 같이 그 적용/사용의 정당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규칙은 관습, 용법, 제도, 습관, 훈련, 그리고 일상적 따르기의 한 형태다. 
 That’s why ‘following a rule’ is a practice. And to think one is following a rule is not to follow a rule. And that’s why it’s not possible to follow a rule ‘privately’; otherwise, thinking one was following a rule would be the same thing as following it. (#202, emphasis mine.)
Following a rule is analogous to obeying an order. One is trained to do so, and one reacts to an order in a particular way. (...) Shared human behaviour is the system of reference by means of which we interpret an unknown language.(#206, emphasis mine.)
  언어는 본질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 이면의 '이해'라는 특별한 인식론적 활동은 불필요/불가능하다. 
  규칙의 적용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다. 다른 선택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에 부연을 덧붙이는 일은 불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일상의 행위/행위자(or 언어/언어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기술(describe)하는 일이다.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65-133)

 "게임"은 무엇인가? (What is a game?)

 "~은 무엇인가? (What is ~?)"라는 물음은 어떤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그 대상에 대해 '설명(explanation)'을 요구한다. 본질을 상정하는 물음은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언어-게임'은 단지 경험적 기술(description)이 가능할 뿐이다. 다양한 게임들을 눈 앞에 늘어놓는다. 
And the upshot of these considerations is: we see a complicated network of similarities overlapping and criss-crossing: similarities in the large and in the small. (#66)

I can think of no better expression to characterize these similarities than “family resemblances”; for the various resemblances between members of a family - build, features, colour of eyes, gait, temperament, and so on and so forth - overlap and criss-cross in the same way. - And I shall say: ‘games’ form a family. (#67)

 '언어-게임'은 특정한 이론적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즉 고정된 개념으로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정립된다. 물론 언어는 그 자체로 개념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통해 '언어-게임'을 말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추상성, 개념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게임의 규칙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게임'은 규칙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공통된 규칙이 게임을 정의하는가? 그러나 각 게임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그에 따른 규칙 또한 고정되지 않는다. 규칙은 게임 안에서도 수시로 변형되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게임'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68)"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규칙' 또한 규정되어 있지 않다! 

How would we explain to someone what a game is? I think that we’d describe games to him, and we might add to the description: “This and similar things are called ‘games’.” And do we know any more ourselves? Is it just that we can’t tell others exactly what a game is? - But this is not ignorance. We don’t know the boundaries because none have been drawn. To repeat, we can draw a boundary a for a special purpose. Does it take this to make the concept usable? Not at all! Except perhaps for that special purpose. (#69, emphasis mine)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언어 '사용'이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녔던 편견,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철학적 기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리학은 어떤 의미에서 고상(sublime)한 것인가?(#89, emphasis mine.)"

 일상 언어의 규칙이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게 적용되기를 원한다면, 이 규칙의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 즉 이상적 논리가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논리는 이상적인가? 그 형식은 고정 불변하는 순수 형식인가? 그들이 말하는 논리의 고상함(the sublimity of logic)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턴(David G. Stern)은 이에 대해 반-회의적(non-Pyrrhonian)입장과 회의적(Pyrrhonian)입장을 나누어 본다.

(non-P.) 
논리는 일상 언어에 적용하는 철학적 방법이며 이는 형식 논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상함(sublime)'이라는 표현은 그 위치를 지나치게 격상시키고, 철학자로 하여금 환상에 가까운 정확성을 요구한다.(p.122)

(P.)
논리는 단순히 단어/낱말 사용을 위한 규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상한' 논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 과 말하기를 터무니없는 것(nonsense)으로 이끈다. 결국 논리를 단어 사용에 적용하는 단순한 규칙 이상의 그 무엇, 즉 형이상학적 쓰임으로 바꾸며, 이를 통해 철학적 문제들, 즉 언어의 본성을 해결할 수 있다 여기게(오표상; misrepresentation) 된다. (p.123)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논리'는 명제의 형식적 통일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다. 그러나 논리 그 자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 적용(employ; use)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언어-게임'이 그러하듯 '논리' 또한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가? 

 설명은 논리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기술(description)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활동/삶의 형식을 동반한다. 

All explanation must disappear, and description alone must take its place. And this description gets its light - that is to say, its purpose a from the philosophical problems. These are, of course, not empirical problems; but they are solved through an insight into the workings of our language, and that in such a way that these workings are recognized a despite an urge to misunderstand them. The problems are solved, not by coming up with new discoveries, but by assembling what we have long been familiar with. (#109, emphasis mine.)

 '논리'를 하나의 '규칙'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언제나 우리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훈련과 숙련을 요구한다. 그것은 언제나 문맥과 배경을 수반한다. 이는 '논리'를 포기하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철학적 탐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은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철학을 재구성할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 종언을 고할 것인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철학은 '언어-게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과 이해에 열려있다.

2023년 6월 17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64)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고백록; Confessions>을 인용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고 싶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These words, it seems to me, give us a particular picture of the essence of human language. It is this: the words in language name objects a sentences are combinations of such names. —– In this picture of language we find the roots of the following idea: Every word has a meaning. This meaning is correlated with the word. It is the object for which the word stands. (#1b, emphasis mine.) 

 언어가 지닌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 낱말과 의미의 단칭적 관계, 낱말이 부여한 대상의 이름, 그리고 대상과 낱말의 대응적 관계가 보여주는 특정한 그림. 이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저서 <논고>를 겨냥한 것인가? (small-picture reading) 또는 책 전반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 수 많은 철학적 편견/독단의 구조를 조망하고 있는 것인가?(big-picture reading)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일면만을 오독하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d에서 제시된, 매우 단순화한 언어-게임(language-game) 속 목소리: "Well, I assume that he acts as I have described. Explanations come to an end somewhere.(#1d, emphasis mine.)"는 비트겐슈타인을 행동주의자(behaviorist)로 만드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그 특정한 문맥 속 [낱말-대상]의 지칭적 관계를 언어의 보편적 구조로 확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I do not wat to call this "ostensive explanation" or "definition", because the child cannot as yet ask what the name is. I'll call it "ostensive teaching of words". (...) No doubt it was the ostensive teaching that helped to bring this about; but only together with a particular kind of instruction. With different instruction the same ostensive teaching of these words would have effected a quite different understanding.(#6)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언어 학습은 한 단어에 대한 "지칭적 가르침"이다. 그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문맥/배경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I shall also call the whole, consisting of language and the activities into which it is woven, a “language-game”. (#7)

 언어-게임은 고립된 언어가 아니다. 각각의 게임이 그러하듯, 언어도 특정한 양식, 패턴, 규칙, 배경을 지닌다. 즉 언어의 사용 방식은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을 낳는다. 

And this diversity is not something fixed, given once for all; but new types of language, new language-games, as we may say, come into existence, and others become obsolete and get forgotten. (We can get a rough picture of this from the changes in mathematics.) The word “language-game” is used here to emphasize the fact that the speaking of language is part of an activity, or of a form of life. (#23, emphasis mine.)

 이와 마찬가지로 "지시적 정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28) 쓰임을 배제한 [낱말-대상]의 지칭적 정의는 무한 퇴행을 야기한다. 이는 마치 모르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전을 찾는 일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쓰임을 배제한 채, 그것의 보편적/이상적 논리 구조를 형이상학적으로 추출할 수 없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활동/삶의 형식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역할, 즉 "느슨한 선험적 기능; loose apriority"을 담당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칸트(I.Kant) 식의 특정한 "정신적 작용; mental-process or mind"과 같은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를 개인들의 범위를 넘어선 공동체의 규약/합의(the communal agreement beyond the reach of individuals)로 해석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본다.  

 #39의 한 문장: 이름은 실제로 단순한 것을 지시해야 한다.; A name ought really to signify a simple.(#39) 

 이 문장은 언어-게임의 논리적 구조가 <논고>에서 제시된 그림 이론과 배치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다. 단어가 문장을 구성하듯, 단순한 것(simples)은 우리 언어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복합적인 것(composite)을 구성한다. 그러나 '단순' 또는 '복합'이라는 개념조차도 문맥 의존적이다. 

 We use the word “composite” (and therefore the word “simple”) in an  enormous number of different and differently related ways. (#47)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명할 수 밖에 없는 '요소(primary element)'는 마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는 듯 보인다. 이는 순수한 언어, 이에 대응하는 단일한 논리 구조를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환상/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We can put it like this: This sample is an instrument of the language, by means of which we make colour statements. In this game, it is not something that is represented, but is a means of representation. (...) What looks as if it had to exist is part of the language. It is a paradigm in our game; something with which comparisons are made. (#51)

 언어의 단일한 구성 요소가 언어 전체의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지칭적 정의/설명 또는 가르침"은 언어-게임의 한 부분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다.  언어-게임의 범례(paradigm)는 고정되지 않는다.

2023년 6월 10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1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진보란 대체로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 - 네스트로이 

 <철학적 탐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며, 스턴(David G. Stern)은 책의 첫 장, 첫 문장, 네스트로이의 희곡 속 주인공의 대사에 주목한다. 책의 금언(the motto)이 되는 이 문장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지향,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말한다. 그는 이를 일상적 대화의 문체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Motto: 'Anyway, the thing about progress is that it looks much greater than it really is.'  (Nestory) (Stern 2004, p.58)
 이 문장에 대해, 그리고 책 전반에 걸쳐, 더 넓게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두 가지 접근 방식-내재적 읽기(immanent reading) or 외재적/발생적 읽기(genetic reading)-의 의미와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스턴의 시선은 <논고; Tractatus>와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탐구>는 자신의 첫 철학적 성취 <논고>를 배격하는가? 혹은 두 저작은 서로 같은 철학적 지향을 함축하고 있는가? 
 
 네스트로이의 희곡이 지닌 당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 희곡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흐름이 지닌 특징은 다음과 같다.
Each verse divides into three parts: (1) how bad things used to be. (2) how much better they seem now, (3) why they're actually worse than ever. (Stern 2004, p.64)       

 이는 철학적 대화(dialogue)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탐구> 속 목소리, 그 논증 구조와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이와 같은 비판적 시각은 비트겐슈타인이 목도한 당시 세계를 향한 것일 수도, 남들이 찬양하는 자신의 철학적 성취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논고>를 통해 바라보던 '세계-언어' 관계의 경직성을, 또는 <탐구>가 딛고 서있는 '일상 언어'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문맥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탐구>의 첫 문장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스턴은 이 문장을 통해, 이 문장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해 그 자체를 <탐구>를 향한 첫 걸음으로 삼는다. 

 Context will play a crucial role in Wittgenstein's subsequent investigations, for he thinks that philosophy goes wrong precisely when it tries to abstract from context, taking words that have multiple meanings in multiple contexts and trying to understand those words taken out the particular contexts in which they are used. (Stern 2004, p.70, emphasis mine.) 

 근대의 기획, 주체의 출현, 주체에 주어진 인식적 특권, 주체가 표상하는 세계, 고립된 언어, 경직된 논리, 그리고 진보에 대한 확신.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이 모두를 향한다. 어쩌면 철학 그 자체의 종말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해석과 이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며, 특정한 문맥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탐구>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한 것(saying)은 그 너머의, 그 자신이 보여주려 한 것(showing)에 대한 이정표가 이미 우리의 삶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이를 탐구하고자 하는 용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alytic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Saul Kripke (1940-2022)

Professor Kripke was well-known for his work in philosophy of language and logic, with his Naming and Necessity, the book version of lectures he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in 1970, widely recogniz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ks of 20th Century analytic philosophy. An overview of his influential work can be found here and a list of his publications can be viewed here.

At the time of his death, Kripke was Distinguished Professor of Philosophy and Computer Science at CUNY Graduate Center. From 1977 to 1998 he was a professor of philosophy at Princeton University. Prior to that, he held positions at Rockefeller University, Harvard University, and Princeton, and even before he earned his BA from Harvard in 1962, he taught courses at Yale and MIT. He held many visiting positions around the world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including at Cornell University, UCLA, Oxford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Utrecht, and Hebrew University, to name just some of them.

A 1977 New York Times article about Kripke’s life and career up to that point, and his reputation as a genius, conveys his standing at the time, at least among some philosophers:

Kripke’s potential, his controversial views and his position as [a] budding genius in world analytic philosophy have combined to make him a man who inspires awe and excitement among philosophers. In fact, he has already become something of a cult figure in philosophical circles—gossiped about, studied, analyzed and claimed as a kindred mind. Some philosophers lose their reserve when speaking of him. The cult phenomenon is itself remarkable, for philosophers as a group have such large egos that they correct Aristotle as they would a schoolchild, and they have such a healthy sense of skepticism that they doubt whether such things as proper names exist. Even in groups of two or three, they lace their conversation with exit clauses and qualifiers to guard against having a trapdoor sprung under some private reality. They do not, in short, subordinate or let go of themselves easily, and yet Kripke has been known to bring to their brain‐twisting conclaves the atmosphere of an early Beatles concert.

A 1996 Lingua Franca article by Jim Holt looks at some of the controversial aspects and upshots of Kripke’s reputation.

Among his many honors were the 2001 Schock Prize in Logic and Philosophy from the Swedish Academy of Sciences.

He died on September 15th.

Reference: 

https://dailynous.com/2022/09/16/saul-kripke-1940-2022/

 전공자(분석철학 전공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가 아니어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학부 전공자를 의미합니다!)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 또한 전공자가 아니지만, 그의 철학에 대한 짧은 논문 정도는 읽어봤을 정도다. 물론 나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천재로서, 괴짜로서 -일화에 더 관심이 있긴 했지만. 

 2022년. 뉴욕시는 당대의 철학자들과 작별 중이다.

Richard J. Bernstein (1932 - 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할 때였다. 이제 가을이 되었다. 

 수년 전, 수업이 끝난 밤 9시 가을 밤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기억난다. 집에 가는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와 나누는 짧은 대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Richard Rorty의 철학에 관한 짧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프래그머티즘과 한나 아렌트 철학과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였다.   

이런 저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슬픔과 존경을 담아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의 책 <The Pragmatic Turn> 한쪽 구석에 받은, 젊은 철학도에게 남긴 그의 짧은 응원을 여전히 기억한다. 

To Michael "A fellow admirer of pragmatism." Richard J. Bernstein


(Reference)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표현과 진리, 혹은 존재

수학적/과학적으로 표현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명제는 보편적 지식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근대의 학문적 성과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오늘날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 매우 유효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문은 그 자신들도 과학(science)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오늘날 많은 학문영역과 학자들이 <Me-Too-ism>에 빠져 있다며 농담섞인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을 일정 부분 이해하면서도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 수학적 명제는 발견(discovery)의 대상인가? 또는 발명(invention)의 대상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인가?

Invented or Discovered?
Invented or Discovered? from Google

현재는, 매우 잠정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수학적 명제 (또는 간단히 체계, 더 간단히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공식) 는 어디까지나 발명의 영역이다. 세상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술, 종교, 신화, 문학, 과학 등. 그러나 명제라는 것은 단순히 공책 위에 쓰여져 있는 하나의 문장 또는 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장 또는 수식이 지닌 '의미'와 '진리값'을 동반한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가 지닌 의미와 진리값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표현되지 않은 명제'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학적 명제', 그 표현방식의 대상인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 - 가령 1+1=2 - 라는 공식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들의 존재방식 그 자체 - 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이 질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진리값을 동반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발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발명이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발명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학적 질서는 주체로서의 인간 이전 부터 있었고, 인간이라는 종 이후의 세계에도 실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되기 전의 그 어떤 존재를 진리라 부를 수 있는가? 표현되지 않은, 비명제적 진리는 인식 가능한 것인가? 

근대에 들어선 주체는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각각의 표현 방식과 그 객체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도저히 의심이 불가능한 토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마침내 발견했다 믿었던 그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주체는 객체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아마도 이러한 철학적 작업을 가장 세심하고 꼼꼼히 다루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의 인식론은 철저히 명제화된 지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명제적 지식에 다다를 뿐이었고, 바로 이 지점이 칸트 인식론의 가장 큰 성취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의 한계!

다시 한번 수학적 명제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명제가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그 어떤 표현 방식도 결국 존재 그 자체에 이르지 못 할 것이다. 표현은 존재에 다가서려 하지만 존재는 언제나 뒷걸음 친다. 존재는 드러나며 동시에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회의적인 나의 태도는 아마도 존재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 0 뒤에 있는 숫자는 뭐야?" 라는 아이의 질문에 "-1이야."라고 답한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진 어느 날의 짧은 글.>

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정도의 차이 #2

"The way I see it, unethical ethics are better than no ethics at all."
from glasbergen.com

윤리적 규범의 형식과 논리가 무력해지는 지점에 정도의 차이가 들어선다. 그 곳에서 우리는 행위자들 간의 구체적 내용을 목격한다. 현실에서 목격하는 모든 가치의 충돌은 그 당사자들에게 언제나 생생하고, 치열하며, 많은 경우 상처를 남긴다. 또한 그 충돌의 뒤편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 때로는 그것이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 다양한 이유와 사건들이 얽혀 있기도 하다. 윤리학/도덕철학(가치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들)은 많은 경우 대상/사건/행위자와 거리를 유지하고, 때로는 그 내용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배제한 채 논증을 전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문은 규범의 형식/논리와 구체적 내용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 불분명하고 모호한 지점을 목도하고, 사유하고, 기록해야 할 책임이 있다.:
  • 대상에 대한 논증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or 논증에 적용하는) 윤리적 규범의 형식/논리를 더욱 더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 어느 경우에나 특정 형식/논리가 담아낼 수 없는 구체적 내용,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 그러나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을 윤리/도덕 환원주의적 (or 허무주의적) 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 이 개념은 오히려 서로 다른 규범/형식 간의 대화와 충돌을 허용하는 개방성(openness)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어떤 형식/논리에도 기대지 않고, 특정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는 가치와 사실의 혼재 속에서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특정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특정 형식/논리를 내재화 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간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이론적으로 완전한 토대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그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자기논파적일 뿐이다. 그렇기에 특정 형식/논리의 맹점을 보완하고, 정도의 차이에 대한 맹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규범-인식론적 개방성이다.

2020년 4월 27일 월요일

갑자기 든 생각 #1: 스피노자 & 칸트

스피노자는 단호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그에 반해 칸트는 참 신중하다. 신중한 만큼 그의 철학은 조심스럽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기준이 된다. (전공자가 많다는 소리다.) 

아무튼 칸트 국적은 현재 러시아다.

2020년 3월 2일 월요일

정도의 차이 #1

모든 가치판단과 그에 관한 명제들은 결국 정도의 차이에 근거한다. 아마도 이는 사실판단과 그 명제들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듯 하다. 실상 <사실-가치>는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판단 없이 사실을 바라보지 않으며, 사실판단 없이는 가치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다.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은 결코 이것과 저것의 본질적 다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실, 사건, 사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아주 미세한 정도의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논리적 구성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9년 12월 16일 월요일

왜 하필 인.문.학. 일까?

왜 하필 인.문.학. 강의일까? 왜 하필 인.문.학. 강사일까?

'인문학 강사라고 불리우는' 누군가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무런 주제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꽤나 그럴듯한 논리와 숙련된 화술, 무엇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중요하다. 그러니깐 '아무렇게나'는 아닌건가?),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문.학. 입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여 주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공간과 빛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꺼내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은 떨군다.) 그러나 다시 '인문학 강사라고 불리우는' 누군가가 "여러분. 스티브 잡스는 할 수만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과 소크라테스와의 한끼 식사를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외친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음미하며 인문학의 위대함에 감동한다.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의 몸짓을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바라본다.
철학과  어느 노교수: "내가 여지껏  학생들한테 거짓말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어." 
from Google Image

어느 날, 할 일을 미뤄둔 채 컴퓨터 화면 속 세상을 배회하던 중 "학생들에게는 수능을, 성인에게는 인문학을 강의하는 ooo 입니다."라는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어떤 강사의 인문학 강의 동영상을 우연히 본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강연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강연자의 한마디 한마디 모든 것이 소중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 IT와 인문학의 그 긴밀한 관계를 짧은 시간 안에 엮어내야 하는 그의 막중한 책무가 그를 몰아 붙인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의 압박은 익숙하다는 듯 강연 중간중간에 청중들을 위해 준비해 온 농담을 자연스레 배치한다. 그는 완급조절에도 능한 것이다! 열변을 토하며 기업들의 입사 시험 문제와 면접 질문들을 나열한 후에 나지막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크라테스로 시작해서 보드리야르까지 다다른 그의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자니, 강연 중간중간에 그가 아무런 의심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쏟아낸  몇몇의 문장들이 그의 전체 강연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연의 끝을 알리는 그의 요점 정리를 듣는다. 보드리야르의 <이미지-소비 사회> 개념과 <스토리-인문학>을 엮는 강연자의 말솜씨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청중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를 듣는다.

'청년들이 인문학을 공부해서 스토리를 생산하고, IT 기업에 취직해서 지금의 이미지 소비사회를 촉진시키자는 건가?'

도대체 그는 왜 갑자기 보드리야르의 소비 사회를 인용한 것일까? 단순히 [이미지-스토리-인문학]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띄어 놓은 유명 학자의 사진과 저작이 그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해준다고 믿었던 것일까? 인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의심스럽다. 그래서 조금 더 찾아본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인문학을 강조하는가?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찾다보니 그의 철학 강의가 눈에 띈다. 서양과 동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방대한 양의 강의들이 이미지 세상 속에 나열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면을 아래로 약간 내려본다. 경제, 역사, 미술, 식문화, 재태크, 주식.....('그래 왜 없겠어.')...... 정치까지!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그 개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곧 오늘 날의 한국사회인 것을. 모두가 모든 것을 알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회.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조급한 사회. 그렇다. 더 이상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전문가의 권위는 위키피디아에 넘어간지 오래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강연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의심하는 점 한가지가 있다. '적어도 강연자 스스로가 자신이 사용한 내용과 개념들에 대해 위키피디아라도 열심히 찾아봤을까?' 라는 것.)  전문가도 더 이상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전문가 처럼 보여야' 한다. 확신에 차야한다. 일말의 주저없이 자신의 의견을 쉴 틈 없이 쏟아내야 한다. 사실 그것이 굳이 자신의 의견일 필요도 없다. 쏟아지는 정보들 아래 깔려 죽을 판인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스타 강사인 그가 [IT-인문학]을 연결하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개똥-철학] 두 단어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고민해 봤더라면 더 설득력 있고 유의미한 인문학 강연이 되지 않았을까? (고백하자면 '개똥철학'이라는 단어는 전공자들에게 -적어도 나에게는- 묘한 자부심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 마나 한 물음: "인문학의 위기인가?"

먹고 살길만 열어줘도 돈 안 되는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자 하는 이들이 내 주위에는 꽤 많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돈 안 되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차라리 솔직해지자. 요즘은 인.문.학.이 돈이 된다고. 사람들의 조급함이 낳은 상.품.으.로.서.의. 인.문.학. 그런데 어쩌랴. 조급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인것을. 조급함이 돈을 가져다 준다. 물론 제대로 갖춰진 전문가 이미지가 있어야 겠지만 말이다. 이 강연자는 그 이미지 만들기에 성공한 듯 보였고, 내가 아는 전문가들 - 좁게는 철학 전공자들 - 은 그 이미지를 만들기에는 너무 확신이 없다.

철학과 어느 노교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여지껏 학생들한테 거짓말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어." 

2017년 8월 2일 수요일

올빼미는 내일도 날아올라야 한다

(1) <개별적 특수성이 보편적 인륜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곧 역사의 진보/발전이다. 개별자들이 인륜성 안에서 자신의 본 모습('이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역사 발전의 필연성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이성적인 것은 곧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곧 이성적인 것이다.>

내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이 현실화를 향한 여정에 들어서면 (1)의 철학적 구조는 '가족-시민사회-국가'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나의 의식은 결코 어떠한 대상도 즉자적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이는 그 자신의 의식 조차도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삼는, 끊임없는 '인식-부정-극복'의 관계적 구조 안에서 발견해내려 하는 '이성'의 본래적 모습이며, 이러한 이성이 현실화 되어가는 여정의 목적은 차이를 폐기하지 않는 개별과 보편의 내적 통일, 즉 완전한 '자유'이다.

따라서 (2) <헤겔의 철학은 결코 전체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전체주의는 사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륜성을 기반으로 하는 헤겔의 국가는 그 안에 개별적 특수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 

개별자들의 상호 침투적 행위는 칸트가 남겨놓은 예지계를 우리 앞의 지금/여기에서 현실화 시킨다. 그리고 이 현실화는 국가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헤겔에게 있어서 국가는 최종적이다. 다시 말해 (1)은 (2) 안에서 현실화 된다. 이 둘은 형이상학적 위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절대적 정신은 국가 안에서 현실화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화된 절대 정신이 곧 국가다.

(1)과 (2)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C-1) (1)의 구조가 지닌 폐쇄성
(C-2) (2)의 주장이 보이는 헤겔 철학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

헤겔 철학이 지닌 지나치게 방대한 철학적 구조가 비판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그 구조 안에서 용해시켜 버린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다시 말해 이 철학이 지닌 구조적 폐쇄성이 그 자신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동반한다. 헤겔에게 있어서 현실화 과정은 곧 이성이 완벽한 자유를 찾아가는 이상화 과정이다. 그렇기에 헤겔이 상정한 국가는 지나치게 완벽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완벽한 것들은 언제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곧 헤겔 철학에 대한 성급한 폐기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헤겔 철학 = 전체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은 오히려 이 철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

헤겔은 국가가 일정한 도덕적 가치를 현실 속에서 드러낸다고 믿었지만, 이러한 가치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적 구조가 딛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두 개념, 즉 '이성'과 '자유'는 눈 앞의 장애물들을 부정하고 극복해가는 운동을 가능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 운동을 통해 현실적으로 드러난 국가는 그 자신이 체현하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 눈먼 보편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자유를 향한 인간 이성의 여행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현실화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는 언제나 대상과의 비판, 충돌, 극복을 동반한 역사적 운동이다.

헤겔 철학이 지닌 역사성으로부터 필연성을 분리하고, 절대적 이성을 비판적 탐구에 대한 개방성으로, 국가 안의 내재적 인륜성을 개별 구성원들의 발산적 연대성으로 대체해본다면 어떨까?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은 이 철학의 폐기 또는 완성이 아닌, '지속적인 이어짐'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헤겔은 자신이 몸 담고 있었던 시대가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아 오를 마지막 황혼 녘이라 믿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의 결론은 이와 같다: '날아오른 올빼미는 아직 죽지 않았고, 이 세상에 올빼미는 한 마리가 아니다.'

2017년 5월 23일 화요일

대화의 가치(The Value of Conversation)

이론(theory)과 실천(practice)의 관계는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다. 양자 간의 관계에서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그 철학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논의는 이론적인 작업이다. 기존 개념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 새로운 개념의 창조, 개념들의 실천적 사용과 적용에 관한 논의.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모든 이론적 작업은 언제나 실천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글과 말을 통해, 비판과 논쟁을 통해, 소통과 교류를 통해서 하나의 이론이 탄생하고, 다듬어지고, 발전하고, 반증되고, 사라진다. 그렇기에 모든 철학의 태동은 언제나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정도의 차가 있으나) 모든 철학적 논의는 대화를 통해 시작되었다.

앞서 <편견의 가치>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아렌트의 지적을 상기해보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설립은 곧 서구철학이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영역 - 아렌트는 그녀의 철학에서 이를 크게 철학과 정치 영역의 분리됨으로 보고 있다. - 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Today we know that Plato and Aristotle were the culmination rather than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which had begun its flight when Greece had reached or nearly reached its climax. What remains true, however, is that Plato as well as Aristotle became the beginning of the occidental philosophic tradition, and that this beginning, as distinguished from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occurred when Greek political life was indeed approaching its end…Even more serious was the abyss which immediately opened between thought and action, and which never since has been closed. All thinking activity that is not simply the calculation of means to obtain an intended or willed end, but is concerned with meaning in the most general sense, came to play the role of an “afterthought,” that is, after action had decided and determined reality. Action, on the other hand, was relegated to the meaningless realm of the accidental and haphazard. (Hannah Arendt, The Promise of Politics. pp.5-6)

소크라테스의 고백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 은 어느 누구도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그 자신이 철학자로서, 그리고 정치 공동체(polis)의 일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자의 역할은 폴리스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이 아닌,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시민들의 진실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죽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폴리스로 부터 유리된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지식(episteme)의 정당성을 실천(praxis)의 영역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식은 이성을 통한 관조만으로도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주체(나)의 사유만을 통해 지식의 절대적 토대를 찾고, 객체(대상)를 주체의 보편적 개념틀 안에서 표상하였다. 주체는 인식대상을 자신의 이성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 속에서 지식의 보편적 정당성을 얻으려하고, 그 지식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다시 말해, 주체는 객체와의 대립적 관계(confrontation) 속 에서 지식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결국 인식론적 특권은 '객체와 대립하고 있는 주체'에게 귀속되었다. 아렌트는 주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 아닌, 끝으로 향하는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철학의 시작이었다." 대화를 잊은 '객체와 대립하는 주체'의 시작.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도전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논의를 이끌어 간 철학자는 바로 로티(Richard Rorty)다.

로티가 그의 철학 전반에 걸쳐 비판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분석(analytic)-종합(synthetic), 마음(ideas)-대상(objects), 주체(the knowing)-객체(the known), 그리고 이론(theory)-실천(practice). 로티는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을 전복하려 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confrontation)을 참여자들 간의 대화(conversation)로, 지식의 객관성(objectivity)를 공동체의 연대성(solidarity)으로 교체함으로써:

I shall be arguing that their [Sellars and Quine's] holism is a product of their commitment to the thesis that justification is not a matter of a special relation between ideas (or words) and objects, but of conversation, of social practice…Once conversation replaces confrontation, the notion of the mind as Mirror of Nature can be discarded. (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170.)

로티가 그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영미분석철학계의 총아가 배신자가 되다니!"

로티는 기존의 체계적 철학, 즉 대문자 P로 시작하는 철학(Philosophy with a capital P)을 거부한다. 철학은 더 이상 거대 형이상학적 담론의 생산지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진리 추구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비평가("a kibitzer or a therapist or an intellectual historian" in Consequences of Pragmatism)가 되기를 요구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pragmatists) have a new, non-Platonic set of answers to Platonic questions to offer, but rather that they do not think we should ask those questions anymore…They would simply like to change the subject…Pragmatists are saying that the best hope for philosophy is not to practice Philosophy. (Ibid. xiv-xv. emphasis mine.)

그는 기존 철학의 '인식론적 작업과 이론적 개념'이 '사회적 합의와 실천'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철학의 기획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할 수 있는 개방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티는 기존의 실용주의적 관점, 즉 이론과 실천 영역을 이으려는 노력을 굉징히 급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기존 철학들의 이론적 작업, 더 나아가 이론영역 그 자체에 의문 부호를 던진다. 로티는 우리의 그 어떤 문제들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론적 객관성(epistemic objectivity)이 아닌, 사회적 연대성(social solidarity)이 된다.

로티의 실용주의가 지닌 이러한 급진성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기존의 이론영역과 인식론적 개념들에 대한 그의 성급한 폐기 주장은, 오히려 기존 철학들에 대한 실용주의의 가장 큰 비판, 즉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묻는다. '모든 사건과 사태가 사회적 사안으로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로티 그 자신이 주장한 대로 새로운 철학적 작업이 다양한 목소리를 위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라면, 기존 철학의 목소리가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은 그의 글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is time that Rorty himself should appropriate the lesson of Peirce, “Do not block the road to inquiry,” and realize that rarified metaphilosophical or metatheoretical discussion can never be a substitute for struggling to articulate, defend, and justify one’s vision of a just and good society. (Richard Bernstein, The New Constellation. p.253.)

분명 로티의 철학은 급진적이다. 그래서 그의 요구는 성가시다. 그러나 실천과 행위의 영역, 즉 공동체 속 참여자들의 대화를 다시금 철학의 장 안으로 이끌려 한 그의 주장은 또한 분명 유의미하다. 대화가 지닌 개방성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소리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시작점을 얻는다. 따라서 대화는 이론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화는 이론의 과정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론적 작업이 곧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모든 탐구는 편견으로 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 얻어진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지식은 틀릴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는 실용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렇기에 로티의 철학은 실용주의의 정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2017년 5월 16일 화요일

오류의 가치(The Value of Error)

퍼스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 실제로 그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자기 철학에 대한 왜곡과 오해라고 생각하였다. -, 실용주의는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며 발전했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면서도 그들이 '실용주의자'로 묶일 수 있는, 그들이 함께 자라날 수 있었던 토양은 무엇이었을까? 퍼스가 철학적 탐구의 배경지식으로서 편견을 재해석하고, 절대적 진리의 발견이 아닌 상호 대립적인 의견들의 지속적인 재조정을 철학적 탐구의 목표로 삼았을 때, 철학은 '나'의 고립으로 부터 '우리'의 개방으로 이행하였으며, 이는 곧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은 개념/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편견/의견(prejudices/opinion),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quiry),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 이론과 실천의 관계(theory and practice). 그리고 실용주의가 이러한 주제들로 부터 다양한 조류를 형성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토양은 이 철학이 지닌 개방성(openness)에서 찾을 수 있다.

실용주의의 '개방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허울 좋은 포장지가 아니다.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하는 것은 실용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실천적 의무이자, 동시에 인식론적 의무이다. 이는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용인하고 (퍼스는 이게 너무 괴로워서 pragmaticism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나 보다.), 공통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기꺼이 대화의 상대가 되고자 하는 자세이다. 더불어 이러한 실용주의의 개방성은 하나의 주장이 타당한 이유에 의해 도전 받고, 비판 받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 있다는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의 근거가 된다.

개방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오류가능주의는 회의주의(skepticism)와 분명히 구분된다. 현대과학에 익숙한 오늘날의 회의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악신이라는 유령학적 개념보다는 통속의 뇌(Brain-in-a-Vat)라는 사고실험을 선호한다. 이들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적 믿음들에 - 가령, '내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창 밖의 나무를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신체가 있다.' - 의문부호를 붙인다. 극단적 형태의 회의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될 수 있다.

(S-1) There is nothing we can call knowledge, because we can never be justified in believing.

이러한 형태의 회의주의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논박적이다. 만일 (S-1)이 참이라면, 이는 회의주의 논증 그 자체의 정당화 가능성마저 부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회의론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논증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그 논증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제한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외부세계 회의론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오류가능주의를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실용주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인 반회의주의(anti-skepticism)의 출발점이 된다.

오류가능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우리의 지식은 절대적 확실성을 담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새로운 반증과 비판, 더 나아가 폐기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 지식의 정당화 과정은 언제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류가능주의와 회의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이론적 구조 안에 개방성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우리도 믿음(belief) 차원에서는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류 가능성을 담보한 정당화된 지식(knowledge)은 불가능하다.' 즉, 그들은 지식의 정당화 과정에 있어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한다.

(S-2)
(1) In order to know that P, P must be justified to degree N.
(2) P is not justified to degree N.
Therefore,
(3) We do not know that P. 

회의주의의 약화된 논증 (S-2)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to degree N)'라는 표현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인가?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P를 알기 위한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P를 알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오류가능주의의 지식개념, 즉 잠정적으로 정당화된 믿음(provisionally justified belief)에 만족한다면, 오류가능주의를 못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오류가능주의와 선을 그을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적어도 N 정도의 확실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지식은 불안하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이 불안을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P를 지식이라 할 수 없다.'

이는 회의주의가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 개념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Either there is some support for our being, a fixed foundation for our knowledge, or we cannot escape the forces of darkness that envelop us with madness, with intellectual and moral chaos. (Bernstein, Richard,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8.)  

그리고 이러한 회의주의의 데카르트적 불안은 그들이 지닌 주관주의(subjectivism)와 연결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실용주의는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한다. 개별주체는 더 이상 지식/진리에 대한 마지막 심판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정한 편견을 배경지식으로 삼아 탐구과정에 참여한다. 탐구과정을 통해 확립된 우리의 지식은 잠정적이다. 현재의 지식은 언제든지 다음 탐구과정의 배경지식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확실성 보다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Despite Peirce's insistence on fallibilism, he is far from being an epistemological pessimist or sceptic: indeed, he is quite the opposite. He tends to hold that every genuine question (that is, every question whose possible answers have empirical content) can be answered in principle, or at least should not be assumed to be unanswerable. For this reason, one his most important dicta, which he called his first principle of reason, is “Do not block the way of inquiry!” (Robert Burch, "Charles Sanders Peirc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0 Edition)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방적 탐구과정 안에서 활력을 얻는다.그렇기에 오류는 결코 부정적 개념으로서만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충돌과 갈등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탐구와 대화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2017년 5월 13일 토요일

편견의 가치(The Value of Prejudices)

실용주의(Pragmatism; or pragmaticism for Peirce)는 그 이전까지의 인식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편견(prejudice; prejudgment)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이 정치 공동체(polis)의 외부에 아카데미아(Academy)를 세움으로써, 철학은 일상으로부터 독립되었다. 아카데미아의 설립은 철학에게 자유로운 - 물리적/이론적인 의미 모두에서 - 공간을 내주었지만, 사유(thought; philosophy)와 행위(action; politics)의 분리는 철학으로 하여금 말그대로 순수한 학문이 되어야한다는 강박을 심어주었다. 더불어,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이성에 기반을 둔 참된 지식(episteme)은 경험 일반으로 부터 얻는 의견(또는 억견; doxa)과 다른 층위에 놓이게 되었다. [1]



[1]아렌트(H. Arendt)는 이를 서양의 정치철학이 지금껏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ion) 개념을 상실한 채, -정치적(anti-political)인 모습으로 계승되어 왔다는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고립된 지식의 탐구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아렌트의 자유(freedom) 개념은 단순히 필요로 부터의 자유에 그치지 않는다. 필요로 부터의 자유는 적극적인 공적 담론에의 참여로 이행되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억견의 교환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사유와 행위의 접점으로서의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ion)는 정치 공동체의 다원성과 개방성을 확장시키며시민으로서의 정치 참여를 유도한다아렌트의 이러한 논의는 퍼스로 부터 시작되어 제임스, 듀이, 로티, 번스타인, 후기 퍼트넘, 더 나아가 하버마스에 이르는, 실용주의의 서로 다른 조류가 각각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도 공유해 나가는 일련의 개념들과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번스타인이 말하듯, 아렌트의 철학과 실용주의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또한, 아렌트가 정치/행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인식/사유 (정확하게는 "판단")의 문제로 넘어가는 반면, 실용주의는 인식/사유의 문제로부터 정치/행위의 문제로 확장해나가는 방향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관계에 대한 양자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이 후의 발전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편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배제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코기토(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 명제로 부터 시작한다. 방법적 회의(methodic skepticism)를 통해 명석판명한 인식론적 토대를 세우는 작업은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기존 철학과의 비판적 대결이었으며, 동시에 철학의 재구성이었다. 수학의 명제 까지도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의심한 데카르트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한계선, 즉 '생각하는 주체'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을 회의한다. 근대학문의 모든 영역, 더 나아가 서구 근대성의 시작을 알린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철학적 문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그의 철학이 절대적 확신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의 철학적 작업이 완성된 지점은 퍼스(C. S. Peirce)에게 있어서 데카르트 이후로 이어져온 기존 철학들에 대한 비판의 시작점이 되었고, 동시에 실용주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모든 비판은 편견에 대한 재해석으로 부터 시작한다.

We cannot begin with complete doubt. We must begin with all the prejudices which we actually have when we enter upon the study philosophy. These prejudices are not to be dispelled by a maxim, for they are things which it does not occur to us can be questioned. (...) A person may, it is true, in the course of his studies, find reason to doubt what he began by believing; but in that case he doubts because he has a positive reason for it, and not on account of the Cartesian maxim. Let us not pretend to doubt in philosophy what we do not doubt in our hearts. (Ibid., pp.28-29, emphasis mine.)

퍼스는 편견을 철학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 우리의 철학적 탐구는 편견을 그 배경지식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기존의 의견, 즉 편견을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인식론적 토대를 위한 의심이 아니다.


The irritation of doubt causes a struggle to attain a state of belief. I shall term this struggle inquiry...The irritation of doubt is the only immediate motive for the struggle of attain belief...With the doubt, therefore, the struggle begins, and with the cessation of doubt it ends. Hence, the sole object of inquiry is the settlement of opinion. (Ibid., pp.114-115, emphasis mine.)

의심으로 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이 곧 탐구(inquiry)이며, 탐구의 목적은 언제나 의견의 '잠정적' 해결이다하나의 의견(opinion; doxa)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의견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은 의심으로 부터 믿음으로, 다시 믿음으로 부터 의심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므로 탐구과정은 결코 인식론적 주체로서의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그것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다시 말해 우리에 의해 구성된다.

We individually cannot reasonably hope to attain the ultimate philosophy which we pursue; we can only seek it, therefore, for the community of philosophers. (Ibid., p.29)

이렇듯 편견에 대한 퍼스의 재해석은 데카르트주의의 주요한 측면 - 주관주의, 직관주의, 토대주의 - 모두에 대한 비판이다. 더불어, 편견을 철학적 탐구과정의 시작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는 인식론의 범위를 개인으로부터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인식의 주체는 더 이상 ''가 아닌 '우리'가 되며, 철학은 더 이상 고립된 영역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관계를 재조명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2017년 5월 9일 화요일

데카르트가 아니야. 지금 우리가 불안한거야! (Cartesian Anxiety)

대중적으로 익숙한 (가끔은 오해하고 있는) 철학 문구가 몇 가지 있다. 그 중에서도 대중들이 창조적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문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foundation)를 마련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이 철학적 명제는 근대 서구에서 시작되어 오늘 날 거의 모든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 수용되고 작동한다. 주체-객체, 신체-마음, 내부-외부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주체로 하여금 외부를 표상하게 만듦으로써 객관적 지식의 확장을 도모한다. 따라서 지식의 객관성을 담보해야하는 "나"는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이 곧 존재로 이행한다. 아니다. "생각하는 "이 이미 존재를 내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데카르트가 서구의 근대를 이 의심할 수 없는 토대 위에 올려 놓았을 때, 철학자들의 역할은 더욱 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완전한 토대를 마련하려는 그들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시도가 계속됨에 따라 오히려 우리는 불안해진다.

"지금 우리를 받치고 있는 토대가 과연 안전한 걸까?"
"고정된 토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이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이 개념은 데카르트의 토대 메타포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번스타인이 주목한 것은 그 이면에 있는 - 그래서 철학자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 영혼의 여행에 관한 비유이다: 선한 신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리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 이 믿음이 지켜지지 못하면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리라는 불안!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강박! 번스타인은 우리의 이러한 믿음으로 부터 유래한 불안과 강박이 단지 인식론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매우 존재론적이라고 주장한다.

It would be a mistake to think that the Cartesian Anxiety is primarily a religious, metaphysical, epistemological, or moral anxiety. These are only several of the many forms it may assume. In Heideggerian language, it is "ontological" rather than "ontic," for it seems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our being in the world. (Bernsetin R.,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9, emphasis mine.)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우리의 존재 방식은 "생각하는 나"에게 불안과 함께 고립을 선물한다. 고립되어 불안한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생각하지 않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다. 나는 소멸해 간다. 소멸해 가는 나는 대립과 배제, 더 나아가 폭력으로써 나의 자취를 다른 것들에게 새긴다. 이건 아마도 논리적 비약이다. 그러나 다시 상기해보자. 확고한, 불변하는, 의심할 수 없는 토대에 대한 우리의 염원이 낳은 대립을. 번스타인은 이를 객관주의와 상대주의가 대립하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준다. 객관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체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모든 가치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상대주의는 우리가 지금껏 성취한 모든 사실과 가치를 외면하는 냉소를 우리의 존재방식에 투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자택일식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가다머의 해석학적 접근, 하버마스의 실천적 담론의 장, 로티의 실용주의적 비판, 아렌트의 판단력 개념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번스타인이 도착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Such a vision [cultivating the types of dialogical communities]is not antithetical to an appreciation of the depth and pervasiveness of conflict - of the agon - which characterizes our theoretical and practical lives. On the contrary, this vision is a response to the irreducibility of conflict grounded in human plurality. But plurality does not mean that we are limited to being separate individuals with irreducible subjective interests. Rather it means that we seek to discover some common ground to reconcile differences through debate, conversation, and dialogue. (Ibid. p.223, emphasis mine.) 

앞서 번스타인은 자신의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ontological)이라고 하였으나, 그것이 곧 또 다른 형태의 고정된 토대로서 우리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껏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존재방식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불안한 선택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존재방식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다. 데카르트적 불안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이기에, 오히려 우리 존재방식의 다양한 양상을 가능케 한다. 충돌과 다원성은 우리의 존재방식을 열린 장(the open sphere)으로 불러들이며, 고립이 해소된 불안은 오히려 (로티의 말을 빌리자면)창조적 언어로 이어질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새로운 가능성은 "나"의 불안이 "우리"의 대화 속에서 해소될 때 비로소 그 싹을 틔울 수 있다.

짧은 글의 끝자락에서 멈춰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건 어쩌면 너희(the Western)만의 불안이었던건 아닌가? 아니면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불안해진 건가? 아무튼 내가 딛고 서 있는 많은 것들이 불안하긴 하다. 이곳에서나 그곳에서나.

2017년 4월 26일 수요일

Gadamer's understanding of openness.

이번 학기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 교수의 배려로 그의 <Gadamer's Truth and Method> 세미나 수업을 청강하고 있다. 책의 중반이 훨씬 지나서야 가다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논의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오늘 수업에서는 경험(Erfahrung) - 또 다른 경험(Erlebnis)과 대조적 의미에서- 의 개념과 해석학적 경험(hermeneutic experience)에 관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H. Gadamer, Truth and Method (Bloomsbury 2013)

"If we thus regard experience in terms of its result, we have ignored the fact that experience is a process. In fact, this process is essentially negative." (p.361)
                                                                        
"In fact, as we saw, experience is initially always experience of negation: something is not what we supposed it to be." (p.363)

"Real experience is that whereby man become aware of his finiteness." (p.365)

이와 더불어 대화와 개방성에 관한 가다머의 설명은 단순히 철학적 논증이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Openness to the other, then, involves recognizing that I myself must accept some things that are against me, even though no one else forces me to do so." (p.369)

번스타인 교수가 말한다.

"Think about it. How many times have we really had a conversation with others? Of course we talk to each other everyday, but usually to impress others, not to accept others."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다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 개념에 대해 논의한 부분을 떠올려 본다. 

대화는 지식(Phronesis)이다!  

2017년 1월 25일 수요일

What is Pragmatism?


 What is Pragmatism? Why am I still interested in this unpopular philosophy? Here is a clear answer to my question from Richard J. Bernstein.



When I teach courses dealing with pragmatism (old and new), I tell my students that it is best to think of the discourse about pragmatism as an open-ended conversation with many loose ends and tangents. I don't mean an "idealized" conversation or dialogue, so frequently described and praised by philosophers. Rather, it is a conversation more like the type that occurs at New York dinner parties where there are misunderstandings, speaking at cross-purposes,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with personalized voices stressing different points of view (and sometimes talking at the same time). It can seem chaotic, yet somehow the entire conversation is more vital and illuminating than any of the individual voices demanding to be heard. This is what the conversation of pragmatism has been like. (The Pragmatic Turn, p.30-31) 


This book is not full of Bernstein's genuine concepts, but it tells us why we should take the discussion of pragmatism seriously. Simply speaking it is alive! It is an open conversation for all of those who are getting ready to jump into many of the important themes in contemporary philosophy. In this book, Bernstein clearly shows how pragmatism will free us from philosophical bias we have had: a sharp dichotomy between subject and object, mind-body dualism, analytic-synthetic, the knowing-the known, and theory-practice. So now it is time to free us from our bias in the term of pragmatism first, then let's start a journey to the conversation of pragmat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