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정도의 차이 #2

"The way I see it, unethical ethics are better than no ethics at all."
from glasbergen.com

윤리적 규범의 형식과 논리가 무력해지는 지점에 정도의 차이가 들어선다. 그 곳에서 우리는 행위자들 간의 구체적 내용을 목격한다. 현실에서 목격하는 모든 가치의 충돌은 그 당사자들에게 언제나 생생하고, 치열하며, 많은 경우 상처를 남긴다. 또한 그 충돌의 뒤편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 때로는 그것이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 다양한 이유와 사건들이 얽혀 있기도 하다. 윤리학/도덕철학(가치를 다루는 수많은 학문들)은 많은 경우 대상/사건/행위자와 거리를 유지하고, 때로는 그 내용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배제한 채 논증을 전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문은 규범의 형식/논리와 구체적 내용 사이에서 드러나는 그 불분명하고 모호한 지점을 목도하고, 사유하고, 기록해야 할 책임이 있다.:
  • 대상에 대한 논증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or 논증에 적용하는) 윤리적 규범의 형식/논리를 더욱 더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 어느 경우에나 특정 형식/논리가 담아낼 수 없는 구체적 내용, 즉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 그러나 정도의 차이라는 개념을 윤리/도덕 환원주의적 (or 허무주의적) 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 이 개념은 오히려 서로 다른 규범/형식 간의 대화와 충돌을 허용하는 개방성(openness)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어떤 형식/논리에도 기대지 않고, 특정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는 가치와 사실의 혼재 속에서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특정 대상에 대한 직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특정 형식/논리를 내재화 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간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이론적으로 완전한 토대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그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주장은 자기논파적일 뿐이다. 그렇기에 특정 형식/논리의 맹점을 보완하고, 정도의 차이에 대한 맹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결국 규범-인식론적 개방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