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8일 금요일

젤다, 야생의 숨결에 관한 그의 말.

The Legend of Zelda: BotW

 J: "내일 바로 Tears of the Kingdom 시작할거야!"

 젤다 야생의 숨결을 끝마친 녀석의 여유.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5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243-268)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
But is it also conceivable that there be a language in which a person could write down or give voice to his inner experiences a his feelings, moods, and so on a for his own use? —– Well, can’t we do so in our ordinary language? —–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he |89| words of this language are to refer to what only the speaker can know - to his immediate private sensations. So another person cannot understand the language. (#243, emphasis mine.)
 사적 언어는 발화자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감각'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발화자 이외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 개별자의 사적 언어는 가능한가? 
  •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이 '언어(language)'와 결합할 수 있는가? 
  • 사적 언어의 발화자로서의 '나(I)'는 자신의 감각에 지칭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공유된 규칙, 관습, 문화, 문맥 안에서 언어를 익히고 사용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기술(describe)되지 않은(마련되지 않은) 언어-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For “sensation” is a word of our common language, which is not a language intelligible only to me. So the use of this word stands in need of a justification which everybody understands. (...) But such a sound is an expression only in a particular language-game, which now has to be described. (#261, emphasis mine.)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이는 '아픔'이라는 감각에 대한 행동 변화, 가령 '악'하는 소리, 울음, 회피 등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를 대체할 뿐이다.(#245) 동시에 '아픔'이라는 내감이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날 때, 발화자는 특정한 문맥과 상황 - 올바른 환경(#250) - 을 동반한다. 이를 무시한 채로, 사적 감각과 특정 단어/낱말을 연결하는 것은 공허하다.   
When one says “He gave a name to his sensation”, one forgets that much must be prepared in the language for mere naming to make sense. And if we speak of someone’s giving a name to a pain, the grammar of the word “pain” is what has been prepared here; it indicates the post where the new word is stationed. (#257, emphasis mine.)
 우리가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듯(#202), 특정 단어/낱말을 사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발화자의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픔'이라는 낱말의 문법이 이미 그 자리 - 쓰임 - 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즉, 언어-게임이 이미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규칙을 따른다. 만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적 언어를 구사하길 원한다면, 그 정당화의 기준은 기존의 언어와 독립된, 별도의 곳에 근거해야 한다. 
But justification consists in appealing to an independent authority(#265, emphasis mine.)
 여기서 사적 언어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주관적 정당화는 가능한가? 
 이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주관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나'의 기준이 '나'의 낱말-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가 이에 만족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는 철학적 유아론(solipsism; 唯我論)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철학적 논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함께 던질 수 있다: 
  • 언어 공동체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해주는 독립적 기준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 최초 언어-게임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발화/인식 주체로서의 '나(I)'는 더 이상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정당화 기준의 담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언어 공동체로서의 '우리(we)' 안에 그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쟁점이 된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우리' 외부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 일은 무한 퇴행의 위험이 있고, 
  2. 일상 언어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주장 또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언어-게임, 즉 규칙의 적용과 언어의 사용이 교차하는 장(sphere; 場)의 작동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합의된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 특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 언어 행위에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복수성(plurality), 개방성(openness), 오류 가능성(fallibility)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의 성격과 그 구조에 대한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비판적 참여를 장려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러한 제안이 기준/규범에 대해 지나치게 완화된 정당화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철학적 수고를 성급하게 해소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탐구>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관심사는 일상 언어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일(showing)이지, 이에 대한 철학적 작업의 완성(saying)이 아니다. 

2023년 7월 5일 수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34-242)

 명제, 의미, 낱말, 문장, 읽기. / 들어맞음, 할 수 있음, 이해함.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있는가? 가령 세계와 언어를 연결하는 특정한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한 문장, 그 명제를 이해하는 과정은 특별한 규칙(또는 '마음의 과정')을 수반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단호하다: "이해가 '마음의 과정'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154)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있다. 그렇기에 언어 사용의 배후를 엿보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nonsense). '마음의 과정'을 개입'시키려'는 철학적 기획은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언어 사용(읽기)을 뇌/신경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는 물리주의도 언어의 이해 과정을 온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 (#158) 

 언어 사용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누군가 무엇을 읽는 다거나, 이해하는 것도 다양한 상황, 문맥 안에 있으며,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And in the same way, we also use the word “read” for a family of cases. And in different circumstances we apply different criteria for a person’s reading. (#164)
 언어-게임과 같이 언어 사용도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즉,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일상적 삶의 양식을 영위하는 이들의 언어 사용은 또 다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어-세계, 발화-이해, 규칙-적용 사이에 형이상학적 매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언어 공동체 안에서 공통된 삶의 양식을 공유한다. 우리의 삶 또한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To follow a rule, to make a report, to give an order, to play a game of chess, are customs (usages, institutions).
 To understand a sentence means to understand a language. To understand a language means to have mastered a technique. (#199)
  '규칙 따르기' 또한 '언어의 이해'와 같이 그 적용/사용의 정당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규칙은 관습, 용법, 제도, 습관, 훈련, 그리고 일상적 따르기의 한 형태다. 
 That’s why ‘following a rule’ is a practice. And to think one is following a rule is not to follow a rule. And that’s why it’s not possible to follow a rule ‘privately’; otherwise, thinking one was following a rule would be the same thing as following it. (#202, emphasis mine.)
Following a rule is analogous to obeying an order. One is trained to do so, and one reacts to an order in a particular way. (...) Shared human behaviour is the system of reference by means of which we interpret an unknown language.(#206, emphasis mine.)
  언어는 본질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 이면의 '이해'라는 특별한 인식론적 활동은 불필요/불가능하다. 
  규칙의 적용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다. 다른 선택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에 부연을 덧붙이는 일은 불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일상의 행위/행위자(or 언어/언어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기술(describe)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