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2023년 가을학기, 디지털 인문학 (Digital Humanities)

    고민 끝에 지원한 대학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뚜렷한 목표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공과 비교하면 신생아나 다름 없는 분야이고,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 - Digital + Humanities - 에 대한 작은 호기심 (또는 약간의 반발심)이 작용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지니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단어의 생경한 조합이 시선을 끌었다. 단순하고 성의없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가장 설득력있는 논리였다. 일종의 타협이자 절충이었다. 가을 학기 시작 전, 글자에서 멀어진 몸에 긴장을 주기 위해서 집어든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였는데, 아마도 내심 철학(또는 공부하기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작용했던 듯하다. 

    한국의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종종 한국 디지털 인문학 협의회(KADH)에 소개되는 글을 읽어본다. (사실 이곳도 수업 중 알게된 Alliance of Digital Humanities Organizations; ADHO를 통해 방문하였다.) 이곳에서도 신생학문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서야 조금씩 논의가 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꽤 활기찬 학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어보인다. 미국 내에서도 대부분은 정식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고, 기존의 학위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학문의 특성상 많은 금전적/구조적 지원(DH 분야의 중요한 학문적 논의대상이다.)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규모 대학에서는 디지털 인문학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DH 분야의 주요 주제이다! Minimal Computing!)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고,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이 디지털 인문학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뉴욕시 거주자는 비교적 저렴한(?) 학비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도 순전히 운이다. 아마도 내가 뉴욕시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학교 건물 5층 DH 라운지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과 운의 조합일 뿐이다. 

참고로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제공하는 DH 프로그램은 Data Analysis & Visualization 프로그램과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각각 MA/MS 학위를 제공한다.

    2023년 가을학기,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 (The Graduate Center, CUNY, New York)

    수강한 강의는 아래와 같다:

  • Knowledge Infrastructures (3)
  • Working with Data: Fundamentals (3)
  • Introduction to Digital Humanities (3)
  • Computational Fundamentals: JavaScript (1)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학교를 떠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COVID-19을 거치면서 학교들 또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번 학기 강의들은 대면 수업, 비대면 온라인 수업, 절충(Hybid)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전 철학 전공 때와는 달리 이번 학기의 목표는 단순했다. 

  1.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알아보기
  2. 디지털 도구들(JavaScript, Python, Mapping, Text-analysis 등)을 경험하기
  3. 영어로 수업을 이해해보기
 역시나 세 번째 목표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두 번째 목표는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존경심을 낳았다. 첫 번째 목표는 디지털 인문학 공동체 내에서도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와 같은 문외한의 단순한 목표들이 이 분야의 주요 학문적 관심이라는 사실이다.

(1.1.) 
    언젠가는 정립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정립되지 않을지도 모를 주제이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주장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Digital Humanities is not some airy Lyceum. It is a series of concrete instantiations involving money, students, funding agencies, big schools, little schools, programs, curricula, old guards, new guards, gatekeepers, and prestige…. Do you have to know how to code [to be a digital humanist]? I’m a tenured professor of digital humanities and I say ‘yes.’ …Personally, I think Digital Humanities is about building things…. If you are not making anything, you are not …a digital humanist.” (emphasis mine)

(Ramsay, “Who’s In and Who’s Out”)

    이번 학기 첫 과제도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에 대한 짧은 글이었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이고, 그에 대한 의견 또한 무수히 많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고, 학문적 지향과 성과도 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가령, 철학이라는 학문의 양상은 다양할수 있어도,  그 어원(Philia + Sophie)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을 정의할 수 있다. 반면 "디지털+인문학"은 각 단어의 어원이나 정의의 합이 해당 학문의 정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론적 틀이 실천적 행위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수 많은 정의들 중 하나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인문학 공통의 배경과 중첩되는 이론적 틀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학문에 대한 정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DH 프로젝트 중,  <Colored Conventions Project>은 앞선 주장의 조건- "만들기 = Building Things, Code, Making" -을 충족한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대상, 그리고 나아가는 방향이다. - Historically underrepresented voices / Collaboration / Community and Localness / Archive / Pedagogy / Open Access. 물론 이는 "만들기"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만들기"는 디지털 인문학의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 출발점이 되지는 못한다. "만들기"를 "코딩"으로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디지털 인문학의 범위를 좁힐 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DH 프로젝트의 실행 과정 안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도구가 곧 이론이 되고, 프로젝트 계획서가 논문이 되고, 실패한 코딩 또한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 이론과 실천, 도구와 계획, 실행과 실패가 뒤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인문학은 이 모두를 수용하고 뒷받침 할 수 있는 학문 공동체에 기반한다. 

(2.1.)
    가장 부담이 없어야 할 1학점 짜리 수업, <JavaScript>가 가장 어려웠다. 지금껏 파워 포인트도 잘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Interactive Map Webpage를 만드는 수업이라니. 더불어 <Intro.to DH> 수업의 Praxis Assignments - Mapping, Visualization, Text-analysis, Wekipidia, DH Projects Analysis는 큰 부담이었다. (이 중 두 가지를 선택하여 과제를 수행해보고 짧은 글 남기기.)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는 익숙한 도구들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처음 접하는 신세계였다.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인문학적 시선을 바깥 세상에 적용해보는 실천을 장려한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적 시선을 도구들에게도 적용해 본다. 즉, 디지털 도구들의 유용성과 한계, 가능성과 장벽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동반한다. 완벽한 코딩과 완벽한 도구, 더불어 특정 연구대상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이러한 절대적 완벽함을 추구하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오류, 어긋남, 왜곡을 눈여겨 본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난 곳곳의 틈에 개방성과 협력을 채워넣는다. 1.1의 끝맺음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과정은 도전을 응원하고 실패에도 격려하는 개방적 학문 공동체를 요구한다.  
    디지털 인문학과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강의 제목, <Knowledge Infrastructures>가 이 분야의 주요 주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 만큼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학문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선결 과제이기 때문이다.

(3.1.)
    위의 문제의식을 나의 언어 장벽과 연결해본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인문학은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다. 개인과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연결 지점을 찾고, 대화와 상호작용을 장려한다. "인문학 연구에 왜 굳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물론 학문적 성과와 연구의 효율성도 중요한 요소겠지만, 그 보다는 인문학적 시선의 확장이 디지털 인문학의 중심이 된다. 그렇기에 영어 일변도의 학문적 지형, 경제-사회적 격차에 따른 디지털 도구들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 자본에 의한 학문 공동체의 축소 등이 디지털 인문학 분야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된다. 이는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 여성주의(feminism), 실용주의(pragmtism), 생명정치(biopolitics), 반인종주의(anti-racism)과 같은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수반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인문학 인식론 논문들에 등장하는 각종 이론과 철학 개념들이 때로는 불필요하고 난삽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는 철학을 공부한 경험 때문에 생긴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약간만 돌린다면 그만큼 디지털 인문학 안에 다채로운 시선과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언어 장벽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이는 다른 이들의 디지털 도구에 대한 접근성 문제와도 같다. 더 현실적으로는 인터넷 서비스의 유무와도 연결된다. 시야를 더 확장해서 보자면 글자 사용 방식의 차이, 즉  LTR(Left-To-Right) 또는 RTL(Right-To-Left)의 차이가 - 수업 중, Top-Down도 있을 수 있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 디지털 인문학이 지닌 하나의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장벽을 당장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장벽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상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시 학문 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이제 겨우 한 학기를 마친 상태다. 여전히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기도 하다. (물론 철학에 대한 의구심도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해져 가긴 한다. 이게 아마도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아닐런지? 불안해지기!)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인문학의 특징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 학문 공동체 (Scholarly Community)
  • 협력 (Collaboration)
  • 개방성 (Openness)
    미국 내에서도 디지털 인문학은 소위 말해 "뜨는 학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금전적 지원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다. 물론 이 또한 소수의 엘리트 학교와 기관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지털 인문학의 지향이 개방성, 다양성, 연결성이라는 점이다. 누군(푸코)가 지식은 권력이라 말하지만, 인문학은 지식만을 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