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by 니코스 카잔자키스 / 유재원 역 |
" (...) 계산을 분명히 합시다. 만약 내게 강요하면, 난 떠납니다. 이건 분명히 아쇼. 내가 인간이라는 걸.""인간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오?""보쇼, 자유인이란 거요." (p.42)
"아직도 살아 있수다. 여긴 무지무지 추워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했수다." (p.611)
"난 평생 하고, 또 하고, 또 했지만, 결국 한일은 별거 없수다. 나 같은 인간은 천 년을 살아야 마땅한데......잘 있으슈!" (p.623)
"나는 내 인생하고 맺은 계약 기간이 없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순간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뗍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외길이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브레이크를 사용하죠. 하지만 나는, 대장, 바로 이 점에서 내 고유한 가치가 빛나는데요, 이미 브레이크를 던져버렸죠. (...)" (p.303)
수도원 산턱에 설치한 케이블을 마을 사람들과 수도사들 앞에서 선보이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잘못된 기울기 계산, 기울어진 나무 기둥, 그 위에 올라탄 나무들은 조르바의 깃발 신호에 맞춰 하늘을 날아 땅에 곤두박질 친다. 굉음과 불꽃을 내뿜고, 나무 파편이 사방에 튄다. 사람들은 줄행랑 쳤고, '나'는 조르바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무것도 아녜요!" 조르바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가 다시 깃발을 들었다. 그는 절망적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끝장내려고 서두르는 것 같아 보였다. (pp.574-575)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라이, 이제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깃발을 휘젓는 조르바의 모습이 내 눈앞에 그려진다. 살아서 펄떡이는 어린아이의 생명력을 발견한다. 그는 마땅히 천 년을 살아야 할 인간이다.
'관념 - 육체'로 대비되는 '나 - 조르바'는 한 인간의 성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안주하는 자신과 방황하는 자신 사이에서 주저한 적이 있다. 이 두 가지 선택지는 옳고 그름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조르바는 끝없이 방황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는 욕지거리를 뱉을지는 몰라도, 그 누구의 삶도 단정짓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며 자유다.
"난 말이오. 조르바를 위한 기준이 따로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준이 따로 있어요. (...)" (p.230)
고백건대 나는 결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자를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건 나의 기준일 뿐이다.
이곳에 짧은 감상평을 남기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별로 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다시 한번 더 읽으면 된다.
끝으로 이 책의 역자 유재원 교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외국 문학을 접할 때면, 특히 좋은 작품을 만날 때면, 언제나 '원작의 언어가 내 모국어 였다면......'이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리고 동시에 역자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번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속에 흐르는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읽을 때 마다, 아쉬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마음 한가득 품는다. (그래도 오탈자가 있긴 했습니다. 편집자 분!) 특히 역자가 선택한 '대장'이라는 번역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나'와 '조르바'의 관계, 작품 속에 그려진 크레타 섬의 풍경, 그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조르바가 화자 '나'에게 갖는 애정과 질책, 기대와 놀림, 때로는 존중과 조소까지도 동시에 드러나는 유일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역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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