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8일 금요일

단막극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1_아무 상관없는 사이.

카페의 구석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입구가 마주 보이는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기엔 토요일 오후 두 시는 애매한 시간이었고, 사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였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라는 물음을 대신하여, 옆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남성과 가벼운 눈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직 학생 같기도 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듯 보이는 그 남성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받아 자리에 돌아와 앉은 그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소설책을 주로 읽었지만, 그날 그녀가 가방에 넣어서 가져온 책은 어느 시인의 여행 관련 책이었다. 

이런 것도 다시 유행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글의 첫 문장부터 어색하게 느껴졌다. 강렬하게 다가왔던 그의 시어들이 산문의 온전한 문장 안으로 들어가자 부담스럽고 과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여행을 할 때면 눈으로 보기 보다는 소리를 담아온다는 둥,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바람의 결을 바라본다는 둥, 자신이 겪은 세상은 남들과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는 듯 과시하는, 정돈되지 않은 감상문이었다. 이 작가에게는 산문을 시처럼 쓴 것도 일종의 실험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글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 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싫어하는 게 뭐예요?"
"왜 그런걸 묻죠? 보통은 좋아하는 것을 묻잖아요.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작가라든지, 하다못해 좋아하는 색이라든지 말이에요." 읽던 책을 엎어 놓으며 그가 되물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좋아하는 것 보다는 싫어하는 걸 아는 편이 수월해요. 참고로 저는 지금 이 책이 싫어요." 여자가 자신이 읽던 책의 표지를 보여주며 답했다.
"그런데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남자가 다시 되물었다.
"듣고 보니 맞네요. 정정해야겠어요'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으로."

대체 대화를 나눈다는 게 뭘까?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면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사이에도 대화가 가능할까? 그녀 자신의 질문이 또 다른 물음들로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 넣으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재촉하듯 남자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싫어하는 게 뭐가 있을까요? . 뭐랄까. 욕망에 대한 사람들의 어설픈 위선이 싫어요. 그런데 자신들의 욕망을 유치하게 드러내는 위악은 더 싫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만큼 최악은 없으니까요.”
"결국 위선이든 위악이든 서툴고 미숙한 것들이 싫은가 보네요?"
". 그렇긴 한데, 사실 다들 누구나 유치하고 어설프게 행동하고 말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적어도 그 순간들을 떠올렸을 때 부끄럽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위선이든 위악이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들 미성숙한 인간들이거든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몸서리쳐지는 순간들이 있어요.”
"본인의 판단 기준이 분명하네요. 머릿속에 뭐든지 그렇게 잘 정리되어 있나요?"
"기준이 없으면 불안해요 그래서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들을 할 때마다 정리해서 기억해두려고 애쓰는 편이에요. . 아마도 제가 아직 성숙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미성숙한 단계를 이제 막 빠져 나왔다고 해서 단번에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그가 답할 때마다 중간에 섞여 들어가 있는이라는 소리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성실한 얼굴빛과 닮은 소리였다. 대화 속 물음들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의 말투도 듣기 좋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의 이런 태도와 말투 덕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카페 옆자리에 앉아서 귀찮게 말을 걸고 있는, 방금 처음 본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무거워서 당혹스럽다거나, 너무 가벼워서 장난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았다어쩌면 지금 그녀의 이런 호감은 오후 두 시라는 애매한 시간과 그 시간을 어정쩡하게 채우던 어느 시인의 여행 산문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대화는 싫지 않아요.”
?” 기대하지 않았던 남자의 말이 그녀에게는 마치 질문같이 느껴졌다.
지금 이 대화는 좋다고요.” 남자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저도요.”                           

가볍게 말하며 뒤집어 놓은 책의 겉 표지를 훑어 본다. 시인의 이름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껏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얼굴 생김새와 목소리도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 끝이 이 책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가 여전히 밝았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기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야 할거 같아요.’라는 말 대신에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테이블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들어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빠져나갔다. 마시던 커피 잔을 카운터 위에 올려 놓고 아르바이트생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본다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줄곧 성실히 답하던 방금 전의 그 얼굴로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서, 대화의 끝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