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여가와 관조 #3: 선거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너와 나의 생각은 서로 다르고, 그렇기에 너와 내가 봐라보는 사실도 서로 다르다. 

나는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철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가졌던 '정치 철학'도 결국 '철학'에 방점이 찍혀있다. 따라서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지극히 평범하다. 여전히 '비판적 지지'의 기능을 신뢰하며, 정치 과정의 역동성을 지지하면서도 충돌과 조화를 동반하는 끊임없는 대화를 기대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나의 태도가 꽤 보수적인 입장일 것이다.

아무튼...

'윤석열' 대통령. 그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당선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의 반지성적 태도와 언행을 보고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2024년 3월 27일.

바다 건너 먼 곳에 살고 있지만 (예전 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이곳도 복잡한 일들이 넘쳐나기에...) 여전히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투표를 마쳤다. 엄청나게 긴 비례정당 투표지와 매우 짧은 지역 국회의원 투표지를 마주하고 고민없이 도장을 찍었다. 윤석렬 대통령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남은 임기 동안에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기에 이번 선거는 나의 실망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홀로 몇몇 물음을 던져본다.

'투표는 개인들의 사적이익을 표출하는 수단일까?'
'지지하는 정당의 승패에 따른 자존심의 문제일까?'
'공공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표를 던지는 시민들도 있을까?'
'대의 민주주의, 그 이후의 새로운 방향은 가능할까?'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책무를 내려놓았고, 그들에게 대중은 통제하고 유인하는 대상이었다. 권력은 언론을 길들이고,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것은 그들의 권위가 아니라, 시민들의 연대였다. 애초에 그들은 권위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시민 사회의 연대는 희미해지고, 적대와 갈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은 더 이상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는 최소한의 지적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능력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새로운 시각과 개방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윤석열 본인은 물론이고, 현 정부 관계자들은 지적으로 뒤떨어진다. 그렇기에 기대가 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 한국의 정치 대부분은 어이가 없었고, 가끔 분노를 느꼈다.  

윤석열은 박근혜와는 다르다. 사실 그는 정치적 자산이 없다. (본인 아버지에 대한 열성적 지지를 정치적 자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번 선거가 '윤석열 정부 심판'이라는 틀에서 치뤄진다면 현 여당의 의석은 100석도 넘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해본다. 

감정이 요동치는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냉소만이 남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표를 던졌다.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독서) 재수사 by 장강명



<재수사> by 장강명

 사실-상상 복합체, 현실과 물리세계, 사건과 의미, 객관과 주관,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신계몽주의, 그리고 점박이.

 민소림의 죽음은 우발적이었다. 찰나의 모멸감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급작스런 살인. 그러나 과연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이었는가?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독서 모임의 공고문과 가슴팍을 칼에 찔린 채 살인자를 향해 내뱉는 민소림의 '네가 감히?'라는 눈빛은 묘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한다. 

 우월감-열등감, 찬양-모멸, 애-증, 미-추, 너-나, 그렇게 민소림-살인자는 한쌍을 이룬다. 각 개념의 짝은 정반대의 뜻을 지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의미가 뒤섞이고 교차한다. 한쌍 개념들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떨어질 수 없는, 모순을 견디는, 보다 친밀한. 논리는 논리의 세계만을 구축할 뿐, 현실을 담아낼 수 없듯, 현실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점박이.

 작품 속 민소림의 아름다움을 접하며,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해언을 떠올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

 민소림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할 줄 안다. 그것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몸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즐긴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 깊숙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겨놓는다. 섹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인물 '해언'은 자신의 신체,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가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언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이다. 

 민소림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들을 위해 (작품의 배경은 1990년대 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해언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여인으로 머문다.     

 그리고 점박이. 

 우리는 민소림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것은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오만과 경멸의 표현이었을까? 어쩌면 전혀 다른 성질의 감정과 태도가 섞여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자도 그저 짐작하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것은 살인자 본인에게도 급작스레 일어난 사건이다. 모멸감이 해소되었을까? 멈춰버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찬양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내'가 저지른 살인은 정당한 것일까? 이 세상은 '나'에게 정의로웠던가? 그렇게 20년 동안 이어온 살인자 개인의 사유가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만나는 순간, 즉 관념과 실체의 어지러운 충돌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형의 추천.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그 중 현대 소설의 비중은 꽤 낮은 편이다. 그나마 읽은 최근 소설들도 대부분 1940~1970년대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형의 책장에서 꽤 많은 장강명 작가의 책들과 조우했다. 

형의 추천으로 바다 건너 멀리 가지고 온 책: <재수사>  

 형의 독서 취향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꽤 있기에,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거야."라는 형의 평을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읽기를 잠시 멈추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책의 뼈대를 이루는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 작품 속에 등장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개념: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이메일로 보내주신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비슷한 관점으로 답변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으로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도덕적 의무론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고실험인데, 당시 내가 교수님께 드렸던 답변이 장강명 작가의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과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답변은 주체의 도덕적 인식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와 더 가까운 타인의 도덕적 요구/요청이 어떤 도덕적 틀을 사용할지 결정짓는다는 요지의 답이었다.

 미스터리와 지적유희가 어우러진 작품 덕분에, 겨울 방학 학과 사무실의 고요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제시 한'의 체포 장면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2024년 1월 10일 수요일

그녀의 모임

<The Legend of Zelda: Tears of the Kingdom>


오늘(Jan.9 2024)  Y는 학교 소모임에 가입했다: <Zelda Club>

젤다와 관련된 몇몇의 문제를 맞히고 당당히 가입했다. 

그녀는 현재 <야생의 숨결>을 하고 있으며, 새롭게 <동물의 숲> 섬을 꾸미고 있고, <포켓몬 레전드 아르세우스>에서 포켓몬들을 잡고 있다.

그녀는 바쁘다. 

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2023년 가을학기, 디지털 인문학 (Digital Humanities)

    고민 끝에 지원한 대학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뚜렷한 목표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공과 비교하면 신생아나 다름 없는 분야이고,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 - Digital + Humanities - 에 대한 작은 호기심 (또는 약간의 반발심)이 작용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지니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 단어의 생경한 조합이 시선을 끌었다. 단순하고 성의없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가장 설득력있는 논리였다. 일종의 타협이자 절충이었다. 가을 학기 시작 전, 글자에서 멀어진 몸에 긴장을 주기 위해서 집어든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였는데, 아마도 내심 철학(또는 공부하기 그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작용했던 듯하다. 

    한국의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종종 한국 디지털 인문학 협의회(KADH)에 소개되는 글을 읽어본다. (사실 이곳도 수업 중 알게된 Alliance of Digital Humanities Organizations; ADHO를 통해 방문하였다.) 이곳에서도 신생학문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서야 조금씩 논의가 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꽤 활기찬 학문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어보인다. 미국 내에서도 대부분은 정식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고, 기존의 학위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학문의 특성상 많은 금전적/구조적 지원(DH 분야의 중요한 학문적 논의대상이다.)이 필요하기 때문에, 소규모 대학에서는 디지털 인문학 프로그램을 신설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DH 분야의 주요 주제이다! Minimal Computing!)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고,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이 디지털 인문학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뉴욕시 거주자는 비교적 저렴한(?) 학비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사실도 순전히 운이다. 아마도 내가 뉴욕시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학교 건물 5층 DH 라운지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과 운의 조합일 뿐이다. 

참고로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에서 제공하는 DH 프로그램은 Data Analysis & Visualization 프로그램과 공동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각각 MA/MS 학위를 제공한다.

    2023년 가을학기, 뉴욕 시립 대학교 대학원 (The Graduate Center, CUNY, New York)

    수강한 강의는 아래와 같다:

  • Knowledge Infrastructures (3)
  • Working with Data: Fundamentals (3)
  • Introduction to Digital Humanities (3)
  • Computational Fundamentals: JavaScript (1)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학교를 떠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COVID-19을 거치면서 학교들 또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번 학기 강의들은 대면 수업, 비대면 온라인 수업, 절충(Hybid)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이전 철학 전공 때와는 달리 이번 학기의 목표는 단순했다. 

  1.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알아보기
  2. 디지털 도구들(JavaScript, Python, Mapping, Text-analysis 등)을 경험하기
  3. 영어로 수업을 이해해보기
 역시나 세 번째 목표가 가장 어려웠고, 다음으로 두 번째 목표는 프로그래머들에 대한 존경심을 낳았다. 첫 번째 목표는 디지털 인문학 공동체 내에서도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와 같은 문외한의 단순한 목표들이 이 분야의 주요 학문적 관심이라는 사실이다.

(1.1.) 
    언젠가는 정립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보면 영원히 정립되지 않을지도 모를 주제이다.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주장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Digital Humanities is not some airy Lyceum. It is a series of concrete instantiations involving money, students, funding agencies, big schools, little schools, programs, curricula, old guards, new guards, gatekeepers, and prestige…. Do you have to know how to code [to be a digital humanist]? I’m a tenured professor of digital humanities and I say ‘yes.’ …Personally, I think Digital Humanities is about building things…. If you are not making anything, you are not …a digital humanist.” (emphasis mine)

(Ramsay, “Who’s In and Who’s Out”)

    이번 학기 첫 과제도 디지털 인문학의 정의에 대한 짧은 글이었다.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주제이고, 그에 대한 의견 또한 무수히 많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고, 학문적 지향과 성과도 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가령, 철학이라는 학문의 양상은 다양할수 있어도,  그 어원(Philia + Sophie)에 대한 설명으로 철학을 정의할 수 있다. 반면 "디지털+인문학"은 각 단어의 어원이나 정의의 합이 해당 학문의 정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론적 틀이 실천적 행위로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수 많은 정의들 중 하나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인문학 공통의 배경과 중첩되는 이론적 틀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학문에 대한 정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DH 프로젝트 중,  <Colored Conventions Project>은 앞선 주장의 조건- "만들기 = Building Things, Code, Making" -을 충족한다. 그러나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대상, 그리고 나아가는 방향이다. - Historically underrepresented voices / Collaboration / Community and Localness / Archive / Pedagogy / Open Access. 물론 이는 "만들기"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만들기"는 디지털 인문학의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 출발점이 되지는 못한다. "만들기"를 "코딩"으로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디지털 인문학의 범위를 좁힐 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DH 프로젝트의 실행 과정 안에서 사용하는 디지털 도구가 곧 이론이 되고, 프로젝트 계획서가 논문이 되고, 실패한 코딩 또한 참고문헌이 될 수 있다. 이론과 실천, 도구와 계획, 실행과 실패가 뒤섞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인문학은 이 모두를 수용하고 뒷받침 할 수 있는 학문 공동체에 기반한다. 

(2.1.)
    가장 부담이 없어야 할 1학점 짜리 수업, <JavaScript>가 가장 어려웠다. 지금껏 파워 포인트도 잘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Interactive Map Webpage를 만드는 수업이라니. 더불어 <Intro.to DH> 수업의 Praxis Assignments - Mapping, Visualization, Text-analysis, Wekipidia, DH Projects Analysis는 큰 부담이었다. (이 중 두 가지를 선택하여 과제를 수행해보고 짧은 글 남기기.)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는 익숙한 도구들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처음 접하는 신세계였다.
    디지털 인문학은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인문학적 시선을 바깥 세상에 적용해보는 실천을 장려한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적 시선을 도구들에게도 적용해 본다. 즉, 디지털 도구들의 유용성과 한계, 가능성과 장벽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동반한다. 완벽한 코딩과 완벽한 도구, 더불어 특정 연구대상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디지털 인문학은 이러한 절대적 완벽함을 추구하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오류, 어긋남, 왜곡을 눈여겨 본다. 그리고 이렇게 들어난 곳곳의 틈에 개방성과 협력을 채워넣는다. 1.1의 끝맺음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과정은 도전을 응원하고 실패에도 격려하는 개방적 학문 공동체를 요구한다.  
    디지털 인문학과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는 강의 제목, <Knowledge Infrastructures>가 이 분야의 주요 주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 만큼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디지털 인문학의 학문 공동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선결 과제이기 때문이다.

(3.1.)
    위의 문제의식을 나의 언어 장벽과 연결해본다. 기본적으로 디지털 인문학은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다. 개인과 개인,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연결 지점을 찾고, 대화와 상호작용을 장려한다. "인문학 연구에 왜 굳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이다. 물론 학문적 성과와 연구의 효율성도 중요한 요소겠지만, 그 보다는 인문학적 시선의 확장이 디지털 인문학의 중심이 된다. 그렇기에 영어 일변도의 학문적 지형, 경제-사회적 격차에 따른 디지털 도구들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 자본에 의한 학문 공동체의 축소 등이 디지털 인문학 분야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된다. 이는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 여성주의(feminism), 실용주의(pragmtism), 생명정치(biopolitics), 반인종주의(anti-racism)과 같은 다양한 이론적 배경을 수반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인문학 인식론 논문들에 등장하는 각종 이론과 철학 개념들이 때로는 불필요하고 난삽하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는 철학을 공부한 경험 때문에 생긴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약간만 돌린다면 그만큼 디지털 인문학 안에 다채로운 시선과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언어 장벽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이는 다른 이들의 디지털 도구에 대한 접근성 문제와도 같다. 더 현실적으로는 인터넷 서비스의 유무와도 연결된다. 시야를 더 확장해서 보자면 글자 사용 방식의 차이, 즉  LTR(Left-To-Right) 또는 RTL(Right-To-Left)의 차이가 - 수업 중, Top-Down도 있을 수 있음이 지적되기도 했다! - 디지털 인문학이 지닌 하나의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장벽을 당장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장벽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상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 다시 학문 공동체의 중요성으로 이어진다.
     
    이제 겨우 한 학기를 마친 상태다. 여전히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있기도 하다. (물론 철학에 대한 의구심도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해져 가긴 한다. 이게 아마도 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아닐런지? 불안해지기!)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인문학의 특징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 학문 공동체 (Scholarly Community)
  • 협력 (Collaboration)
  • 개방성 (Openness)
    미국 내에서도 디지털 인문학은 소위 말해 "뜨는 학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금전적 지원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다. 물론 이 또한 소수의 엘리트 학교와 기관들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지털 인문학의 지향이 개방성, 다양성, 연결성이라는 점이다. 누군(푸코)가 지식은 권력이라 말하지만, 인문학은 지식만을 쫓지 않는다.  

2023년 10월 22일 일요일

하루 가족, Smoky

 우리 집 테라스에 갑자기 날아든 녀석. 우리(Y)는 그/그녀에게 Smoky라는 이름을 주었다. 잘 날지 못하는 녀석은 겁에 질려있었고, 테라스 정리함 아래,  구석진 자리에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녀석은 이번 생을 떠나 보내고 있었다.

안녕. 하루 가족 Smoky. 

2023년 8월 22일 화요일

여름, 청평.

 바닥에 누워 경사진 천장을 바라본다. 평평한 시간이 흐른다. 어쩐지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느릿하고 축축한, 여름 낮 더위 만큼이나 늘어진 내 몸의 무게를 실감한다. 그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싱그러운 물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돌과 돌 사이의 틈을 지나서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유속을 짐작해본다. 

 그렇게 한가한 공간을 독차지한 채로 남은 시간을 새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간, 언제까지라도 넉넉할 줄 알았던 그 시간들의 뒷모습을 훔쳐본다. 반가운 얼굴, 고마운 발걸음, 유쾌한 목소리와 다정한 손길이 아쉬운 마음을 위로한다. 


 올해 나의 여름은 이러했습니다. 덕분에 잘 지냅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여름, 청평, 2023.

2023년 7월 28일 금요일

젤다, 야생의 숨결에 관한 그의 말.

The Legend of Zelda: BotW

 J: "내일 바로 Tears of the Kingdom 시작할거야!"

 젤다 야생의 숨결을 끝마친 녀석의 여유.

2023년 7월 14일 금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5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243-268)

 사적 언어(Private Language):
But is it also conceivable that there be a language in which a person could write down or give voice to his inner experiences a his feelings, moods, and so on a for his own use? —– Well, can’t we do so in our ordinary language? —– But that is not what I mean. The |89| words of this language are to refer to what only the speaker can know - to his immediate private sensations. So another person cannot understand the language. (#243, emphasis mine.)
 사적 언어는 발화자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감각'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발화자 이외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 개별자의 사적 언어는 가능한가? 
  • '사적(private)'이라는 개념이 '언어(language)'와 결합할 수 있는가? 
  • 사적 언어의 발화자로서의 '나(I)'는 자신의 감각에 지칭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공유된 규칙, 관습, 문화, 문맥 안에서 언어를 익히고 사용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 사용자가 된다는 것은 그 언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기술(describe)되지 않은(마련되지 않은) 언어-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특정한 언어-게임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For “sensation” is a word of our common language, which is not a language intelligible only to me. So the use of this word stands in need of a justification which everybody understands. (...) But such a sound is an expression only in a particular language-game, which now has to be described. (#261, emphasis mine.)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이는 '아픔'이라는 감각에 대한 행동 변화, 가령 '악'하는 소리, 울음, 회피 등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이를 대체할 뿐이다.(#245) 동시에 '아픔'이라는 내감이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날 때, 발화자는 특정한 문맥과 상황 - 올바른 환경(#250) - 을 동반한다. 이를 무시한 채로, 사적 감각과 특정 단어/낱말을 연결하는 것은 공허하다.   
When one says “He gave a name to his sensation”, one forgets that much must be prepared in the language for mere naming to make sense. And if we speak of someone’s giving a name to a pain, the grammar of the word “pain” is what has been prepared here; it indicates the post where the new word is stationed. (#257, emphasis mine.)
 우리가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듯(#202), 특정 단어/낱말을 사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발화자의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픔'이라는 낱말의 문법이 이미 그 자리 - 쓰임 - 를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즉, 언어-게임이 이미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어-게임은 규칙을 따른다. 만일 이러한 맥락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적 언어를 구사하길 원한다면, 그 정당화의 기준은 기존의 언어와 독립된, 별도의 곳에 근거해야 한다. 
But justification consists in appealing to an independent authority(#265, emphasis mine.)
 여기서 사적 언어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주관적 정당화는 가능한가? 
 이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주관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다. '나'의 기준이 '나'의 낱말-정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가 이에 만족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는 철학적 유아론(solipsism; 唯我論)과 다르지 않다. 도저히 철학적 논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함께 던질 수 있다: 
  • 언어 공동체의 언어 사용을 정당화해주는 독립적 기준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 최초 언어-게임의 시작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발화/인식 주체로서의 '나(I)'는 더 이상 특권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정당화 기준의 담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언어 공동체로서의 '우리(we)' 안에 그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쟁점이 된다. 사적 언어 옹호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 '우리' 외부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 일은 무한 퇴행의 위험이 있고, 
  2. 일상 언어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한다는 주장 또한 순환 논증에 빠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언어-게임, 즉 규칙의 적용과 언어의 사용이 교차하는 장(sphere; 場)의 작동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합의된 규칙에 따라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한 정당화 작업이 특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일상 언어 행위에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복수성(plurality), 개방성(openness), 오류 가능성(fallibility)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의 성격과 그 구조에 대한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비판적 참여를 장려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이러한 제안이 기준/규범에 대해 지나치게 완화된 정당화 기준을 요구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철학적 수고를 성급하게 해소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탐구> 전반에 걸쳐 드러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관심사는 일상 언어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일(showing)이지, 이에 대한 철학적 작업의 완성(saying)이 아니다. 

2023년 7월 5일 수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134-242)

 명제, 의미, 낱말, 문장, 읽기. / 들어맞음, 할 수 있음, 이해함.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있는가? 가령 세계와 언어를 연결하는 특정한 논리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한 문장, 그 명제를 이해하는 과정은 특별한 규칙(또는 '마음의 과정')을 수반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단호하다: "이해가 '마음의 과정'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154)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삶 안에,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있다. 그렇기에 언어 사용의 배후를 엿보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다(nonsense). '마음의 과정'을 개입'시키려'는 철학적 기획은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언어 사용(읽기)을 뇌/신경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는 물리주의도 언어의 이해 과정을 온전히 해명해주지 못한다. (#158) 

 언어 사용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누군가 무엇을 읽는 다거나, 이해하는 것도 다양한 상황, 문맥 안에 있으며,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And in the same way, we also use the word “read” for a family of cases. And in different circumstances we apply different criteria for a person’s reading. (#164)
 언어-게임과 같이 언어 사용도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즉,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일상적 삶의 양식을 영위하는 이들의 언어 사용은 또 다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언어-세계, 발화-이해, 규칙-적용 사이에 형이상학적 매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언어 공동체 안에서 공통된 삶의 양식을 공유한다. 우리의 삶 또한 가족 유사성을 지닌다.
 To follow a rule, to make a report, to give an order, to play a game of chess, are customs (usages, institutions).
 To understand a sentence means to understand a language. To understand a language means to have mastered a technique. (#199)
  '규칙 따르기' 또한 '언어의 이해'와 같이 그 적용/사용의 정당화를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규칙은 관습, 용법, 제도, 습관, 훈련, 그리고 일상적 따르기의 한 형태다. 
 That’s why ‘following a rule’ is a practice. And to think one is following a rule is not to follow a rule. And that’s why it’s not possible to follow a rule ‘privately’; otherwise, thinking one was following a rule would be the same thing as following it. (#202, emphasis mine.)
Following a rule is analogous to obeying an order. One is trained to do so, and one reacts to an order in a particular way. (...) Shared human behaviour is the system of reference by means of which we interpret an unknown language.(#206, emphasis mine.)
  언어는 본질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 이면의 '이해'라는 특별한 인식론적 활동은 불필요/불가능하다. 
  규칙의 적용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다. 다른 선택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위에 부연을 덧붙이는 일은 불필요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철학적 활동은 이러한 일상의 행위/행위자(or 언어/언어 사용자)들을 바라보고 기술(describe)하는 일이다.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읽기)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3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Wiggenstein / 한글 번역서 by 이승종 역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by David G. Ster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65-133)

 "게임"은 무엇인가? (What is a game?)

 "~은 무엇인가? (What is ~?)"라는 물음은 어떤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그 대상에 대해 '설명(explanation)'을 요구한다. 본질을 상정하는 물음은 언제나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 있는 '언어-게임'은 단지 경험적 기술(description)이 가능할 뿐이다. 다양한 게임들을 눈 앞에 늘어놓는다. 
And the upshot of these considerations is: we see a complicated network of similarities overlapping and criss-crossing: similarities in the large and in the small. (#66)

I can think of no better expression to characterize these similarities than “family resemblances”; for the various resemblances between members of a family - build, features, colour of eyes, gait, temperament, and so on and so forth - overlap and criss-cross in the same way. - And I shall say: ‘games’ form a family. (#67)

 '언어-게임'은 특정한 이론적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즉 고정된 개념으로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정립된다. 물론 언어는 그 자체로 개념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도로 추상화된 언어를 통해 '언어-게임'을 말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추상성, 개념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 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게임의 규칙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게임'은 규칙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공통된 규칙이 게임을 정의하는가? 그러나 각 게임의 양상이 모두 다르듯, 그에 따른 규칙 또한 고정되지 않는다. 규칙은 게임 안에서도 수시로 변형되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게임'은 규정되어 있지 않다. (#68)"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규칙' 또한 규정되어 있지 않다! 

How would we explain to someone what a game is? I think that we’d describe games to him, and we might add to the description: “This and similar things are called ‘games’.” And do we know any more ourselves? Is it just that we can’t tell others exactly what a game is? - But this is not ignorance. We don’t know the boundaries because none have been drawn. To repeat, we can draw a boundary a for a special purpose. Does it take this to make the concept usable? Not at all! Except perhaps for that special purpose. (#69, emphasis mine)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언어 '사용'이다. 이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녔던 편견,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철학적 기획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리학은 어떤 의미에서 고상(sublime)한 것인가?(#89, emphasis mine.)"

 일상 언어의 규칙이 언제, 어디서나 정확하게 적용되기를 원한다면, 이 규칙의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 즉 이상적 논리가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논리는 이상적인가? 그 형식은 고정 불변하는 순수 형식인가? 그들이 말하는 논리의 고상함(the sublimity of logic)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턴(David G. Stern)은 이에 대해 반-회의적(non-Pyrrhonian)입장과 회의적(Pyrrhonian)입장을 나누어 본다.

(non-P.) 
논리는 일상 언어에 적용하는 철학적 방법이며 이는 형식 논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상함(sublime)'이라는 표현은 그 위치를 지나치게 격상시키고, 철학자로 하여금 환상에 가까운 정확성을 요구한다.(p.122)

(P.)
논리는 단순히 단어/낱말 사용을 위한 규칙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상한' 논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 과 말하기를 터무니없는 것(nonsense)으로 이끈다. 결국 논리를 단어 사용에 적용하는 단순한 규칙 이상의 그 무엇, 즉 형이상학적 쓰임으로 바꾸며, 이를 통해 철학적 문제들, 즉 언어의 본성을 해결할 수 있다 여기게(오표상; misrepresentation) 된다. (p.123)

 철학의 테두리 안에서 '논리'는 명제의 형식적 통일성을 뒷받침한다.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다. 그러나 논리 그 자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그 적용(employ; use)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언어-게임'이 그러하듯 '논리' 또한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가? 

 설명은 논리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기술(description)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활동/삶의 형식을 동반한다. 

All explanation must disappear, and description alone must take its place. And this description gets its light - that is to say, its purpose a from the philosophical problems. These are, of course, not empirical problems; but they are solved through an insight into the workings of our language, and that in such a way that these workings are recognized a despite an urge to misunderstand them. The problems are solved, not by coming up with new discoveries, but by assembling what we have long been familiar with. (#109, emphasis mine.)

 '논리'를 하나의 '규칙'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언제나 우리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훈련과 숙련을 요구한다. 그것은 언제나 문맥과 배경을 수반한다. 이는 '논리'를 포기하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철학적 탐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은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철학을 재구성할 것인지, 아니면 철학에 종언을 고할 것인지.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철학은 '언어-게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해석과 이해에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