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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0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5.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 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사물과 사건, 그 역사에 관한 기억의 단절은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 언어, 문화,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침투해 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언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8)

 개인의 단편적 장면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도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공동체의 기억, 모두의 유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또 멀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응시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결국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23, emphasis mine.)

 지금껏 이어져 온 기억,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낸다. 그 간극은 우연하기에 급작스럽다: 기성 세대-전후 세대, 학교-집, 남성-여성, 섹스-낙태, 노동자-부르주아, 종교-아노미, 혁명-상품, 정치-자본.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과 다르게, 유채 씨를 뿌리거나 사과를 흔들어 따거나 죽은 나뭇가지로 단을 묶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지는 않았다. 학교 일정표가 계절의 주기를 대신했다. (...)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연스럽게 원래의 언어를 되찾았다.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 되는 몸에 밴 언어, 양쪽 따귀와 블라우스의 자벨수 냄새, 겨울 동안 구운 사과, 양동이로 떨어지는 오줌 소리 그리고 부모의 코골이와 엮여 있는 그 언어를 되찾았다. (pp.36-37)

사진 속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여자애들은 부르주아 층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자애들과 다르며, 더 강하고 더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너무 자주 어울리고 함께 파티에 다니면서 자신이 타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노동의 세계나 부모님의 작은 상점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왔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은 관련성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단지 지식과 문화 속에만 있을 뿐. (p.104-105)

전쟁에 대한 언급은 50세 이상의 입에서 나오는 허영심 넘치는 개인적인 일화로 축소됐고, 30세 이하는 그것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로 여겼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추모사와 꽃다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6)

 그 누구도 도저히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녀도 그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허위 의식이 선사한 우월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의 맹렬함과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을 향한다. 나는 '나'를 표상한다. 동시에 '세계'로 이행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p.11-12)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p.55)

우리는 바칼로레아의 성공으로 사회적인 존재감을 부여받았다. (p.83)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앞설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단하고, 또 단순했다. 사회가 할당한 요구를 충족시킨 개인들은 손쉽게 통합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p.81), 텔레비전을 샀고(p.112), 어떤 이들은 농부에게 헐값으로 낡은 집을 사기도 했다(p.140). 동시에 그녀는-발칙하게도(?) -혁명을 꿈꿨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33)

 그러나 세계는 생각보다 치밀했고, 유연했다. 딱딱한 정치는 흘러가고, 말랑말랑한 상품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존재의 결핍을 악(惡)으로 규정했던 철학은 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대신 존재(상품)의 과잉이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과잉은 곧 소멸을 동반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09)

시장경제의 질서가 강화됐고 숨 가쁜 리듬이 강요됐다. 바코드를 갖춘 구매품들은 은밀한 신호음 속에 일초 만에 가격으로 넘어가며, 계산대에서 카트까지 더 신속하게 통과했다. (...)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p.246) 

 결국 자본이 시간을 손에 넣었고, 개인은 상품 속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상품이 가벼워지듯, 모든 사물과 사건, 이를 담아내던 언어와 기억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그토록 처절하게, 손에서 빠져나간 그 모든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과 기억의 틈. 그 단절의 간극까지도.

 쉬운 글은 아니다. 작가의 기억은 치밀했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기억을 뒤덮은 흙 먼지를 고운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은 지루하고, 텁텁하다.  

사르트르 <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부르디유 <문화 자본, 아비투스 개념>. 

 책장을 넘기며 이 모두를 떠올린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좌절하고, 사유한다.

2023년 4월 24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 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삶은 마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고, 그녀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할머니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추억들이 그녀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듯, 그녀들의 삶은 그 이상의 추억과 아픔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도동 집. 가을이면 마당 한 구석 모과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할머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달콤한 향기와 설탕을 유리병 속에 담아내던 그녀. 겨울 저녁을 기다리게 만들던,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던 그 유리병들. 할머니 머리맡에 있던 동전 주머니. 오백원 동전을 손에 들고 찾은 우리 동네 <목포 슈퍼>.
그리고 그녀는......몰락한 명문가의 딸. 재주 많았던 그녀의 조용한 삶. 잃어버린 기억. (할머니 강팽옥)

  우리 가족들의 겨울철 별미. 큼지막한 이북식 손만두. 그리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빙-둘러앉은 가족들의 내기 윷놀이. 그녀에게 배웠던 민화투.    

 그리고 그녀는......고향에 두고 온 가족. 이곳에서 만든 가족. 유별나게 힘들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 어렵사리 만난 고향 가족들에 대한 실망. 떨쳐내지 못하는 지난 날의 회한. (외할머니 이정순)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번에는 작가들의 눈을 빌려 그녀들의 감춰진 뒷모습을 엿볼 뿐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어제 꾼 꿈 中)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무해해보이는 표현 속에 감줘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흑설탕 캔디 中)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척들은 할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베드 中)

그날, 거실로 다과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단어-과부.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먼저 살폈는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즐거움이 잠시 동안이지만 명백하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대한 유산 中)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 행 中)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정원 中)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9.2022: 레스(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Andrew Sean Greer / 강동혁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9. 2022


<레스; 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 강동혁 역

 '세상 모든 책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글과 그 글의 모든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에 관한 사랑이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책의 표지 만큼이나 경쾌하고 상큼한 사랑 이야기를 - 동시에 주인공 아서 레스의 삶에 깃든 지적 통찰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 기대하며 <레스>를 읽는다. 50세가 되기 직전 사랑이 떠나간다. 프레디가 결혼 소식을 전한다. 레스는 도망치듯 세계 일주를 결심한다. 칭송받는 천재 시인 로버트의 애인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소설 <칼립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간 미루어두었던 온갖 초청에 응한다. 결혼식에 가지 않기 위해서. 

뉴욕 - 멕시코 -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모로코 - 인도 - 일본 -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인 레스는 불안하다. 자기 소설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전히 사랑에는 서툴고, 독일어는 형편없다. 사실 우리 모두가 레스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재의 삶에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랑에는 갈팡질팡한다. (뉴욕에 사는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화자의 시선이 레스의 여행을 따라간다. 그의 사랑, 그의 곁을 스쳐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이 그러하듯 사랑은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은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맞는 거라면, 아서? 만약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맞다면? 그녀가 느낀 게 이 땅을 모두 박살 내는 어떤 거였다면?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거. 넌 느껴봤어? (p.212)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삶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아 / 하지만 내가 죽는 그날엔 / 네가 울게 되리란 걸 알아. (p.269) 

 그 무엇을 받아들이든, 레스는 여전히 순진하리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집에서 기다리는 프레디와 함께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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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다: "뭐야 이거? 뭐 이딴 식으로 글을 썼어?" 

 결국 원서를 찾아 읽는다. 재기 발랄한 문장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치(?) 있는 글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능(?)이 넘쳐 흘러서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감상평은 주관적이지만, 누군가 '퓰리처(풀-잇-서라고 읽든 뭐든)상을 받을만한 책인가?'라 묻는 다면: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헤밍웨이는 받았던 상을 반납할 듯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를 짚어본다: 번역!! 성의 없는 번역!!

 산뜻해야 할 문장이 산만해진다. 작가의 개성이 넘치는 (뭐든지 너무 넘쳐요!) 문장이 철학과 석사 1년생의 겉멋 들어간 글로 탈바꿈한다. 일관성 없는 번역에 실망하고, 비문의 향연 속에서 좌절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 디자인
  • 유명 문학상이 부여하는 그럴듯한 권위
  •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이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본다.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탐구, 또는 사랑에 의한 삶의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단지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On Love; Essay in Love>의 톡톡 튀는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장을 덮는다. 옮긴이의 말도 읽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실패할 때도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 레스의 여행이 그러했듯이." 

2022년 5월 24일 화요일

(영화) NYPL Korean Book Club 05.2022: The Florida Project;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by Sean Baker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2022

<The Florida Project> by Sean Baker

 Moonee, Halley, Bobby, Ashley, Scooty, Dicky, and Jancey near Disney.

 좋은 영화다. 해석을 위한 이론적 틀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차분히 영화의 시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살아갈 힘이 있다.

2022년 4월 25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2: 레몬 by 권여선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2022

<레몬> by 권여선

 평탄하고 평온한, 굴곡 없는 순조로운 삶이 있을까?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상처 입고 해진 삶을 끌어 안은 이들은 그 삶의 특별한 의미를 알게 될까?     
 주어진 세상이고, 던져진 생이다. 견디는 것이 전부일까? 그 굴레와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의 시선이 각 인물들을 향한다. 

 해언과 다언 자매, 
 해언을 바라보던 태림, 
 이 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소외되어 평범한 나머지 무리에 속한 채 혐오감과 안도감(p.36)을 느낀 상희, 
 그저 윤태림의 손길을 기억하는 한만우,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 다언, 
 혜은이를 키우는 자매의 엄마,   
 아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린 신정준,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 불쾌하리 만큼 건조한 시선이 한 소녀의 죽음을 훑고 지나간다. 세상에 문명이 들어선지 오래지만 인간 본성의 밑바닥은 자연을 닮았다. 자신과 무관한, 자기 삶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난 그 순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에 무심하다. 따스한 온기를 몸에 새기고, 질투가 맹목이 되고, 욕망이 들끓고, 생이 몸부림치던 그 순간. 지금껏 이어진, 연속된 시간의 한 토막이 순간의 파편들로 조각나던 그 찰나는 지나갔다. 세상은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친다. 해언이 속옷도 입지 않고 치마를 입은 채 무릎을 약간 벌려 세워 앉아 있듯이 말이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64)

 해언의 죽음. 그 순간의 사라진 조각들을 모아보자. 상상해보자. 신정준은 감히 해언을 범하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속살을, 그저 때가 되어 발갛게 피어오른 그녀의 여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조차 무심하게 대하는 육체를 그가 무슨 수로 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해언의 아름다움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저주했을 것이다. 탐할 수 없다면 부숴버리자. 그녀의 무심한 생을 으깨버리자. 

 한 생명이 몸부림치다 부서지고 폭발하던 그 격렬한 순간이 그냥 그렇게 결정됐을 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다. 어찌할 도리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끌어안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생이다. 그런데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신정준은 그 자신의 아이 예빈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몸을 들썩인다. 잠든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모른다. 그 자신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는 무심한 해언의 얼굴을, 순간 자신을 들끓게 한 그녀의 거뭇한 음부를, 세상에 던져지고 방치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태림은 울고 있는 남편이 무섭다. 그래서 시를 쓴다. 아이를 잃고, 기도하고, 또 시를 쓴다. 자기를 속이고,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를 쓴다.

 다언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혜은이를 엄마에게 데려왔지만, 그녀 자신의 삶은 사라졌다. 원한 적 없이 선택한 삶이다.

 한만우는 다리를 잃었다. 골육종이라는 병이 그의 삶에 이유 없이 찾아왔다. 황홀했던 태림의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붙들던 때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생명은 사그라든다.
 
 시간이 흘러 다언을 마주한 상희는 시를 포기했다 말한다. 사랑한 적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흘려 보냈다. 죽음은 언제나 과거형이 되듯, 시를 쓰던 그 시절도 과거형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이들이 펼쳐놓은 온갖 흔적과 소음, 버둥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섬세하고 서늘한 문장이 작가의 시선을 작품 속 여기서 저기로, 그녀에게서 그로, 그녀와 그녀 사이로 옮긴다. 세상에 펼쳐진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고요한 눈길이 신중하다.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3.2022: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by 유성호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3.2022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by 유성호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이 다루는 전문적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선 그 분야에서 사용되는 특정 용어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소개하고 설명할지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굉장히 좁은 지식/분야를 다루고, 그들의 글은 매우 촘촘한 논리적 틀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전문적인 개념이나 용어를 제한해서 사용하는 
대중적 글쓰기는 그 논리적 틀이 조금은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전문가/학자들은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더 큰 난관은 이 느슨해진 글 안에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전문가의 관점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가로서 새로운 통찰과 관점을 소개하고, 이를 독자가 자연스럽게 납득해야 한다. 
그만큼 '좋은' 대중 교양 서적은 드물다. 

(개인적으로 전문 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책 중에서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가 매우 교묘하게(?) 잘 짜여진 구성을 갖추고 있다 생각한다. 더불어 데이비드 애드먼즈 & 존 에이디노, <비트겐슈타인은 왜?; Wittgenstein's Porker>은 정말 매력적인 대중 철학 서적이다.)

이제 책으로 돌아가자.

결론: 유성호 교수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는 좋은 책이다. 

 책의 초반 저자는 법의학이 바라본 죽음에 대해, 그리고 법의학자가 다루는 방법론과 개념들에 대해 설명한다. 
  • 사망의 원인 - 의학적 판단
  • 사망의 종류 - 법률적 판단
 법의학에 관한 이해나 정보가 전무한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각 개념들에 대한 명료한 설명과 분류, 하위 개념들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다양한 예들이 덧붙여져 있다. 
 이후 책의 대부분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성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죽음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이는 다음과 같다: 
  • 생명과 죽음에 대한 정의/의미
  • 타자화된 죽음
  • 안락사/존엄사 논쟁
  • 자살
  • 연명의료
  • 과학의 발전과 미래 사회의 생명 
  위의 주제들과 함께 유성호 교수는 의사/법의학자로서 바라본 죽음의 모습들을 소개하고, 그로 인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명한다. 가령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연명의료와 존엄사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물음을 던졌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개인의 '죽을 권리'를 상기한다.
  더불어 저자는 현대 의료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오늘날 죽음의 변화/왜곡된 측면을 죽음을 맞이하는 주체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과거와 현재의 죽음 사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바로 예감이다. 예전에는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어 늙어가다가 어느 순간 생의 기미가 푹 꺼지는 지점이 찾아왔고, 주변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예감이라는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p.196)
 옛날에는 인생의 시점이 불분명하지 않고 명확했으며, 자신이 어느 시점에 죽을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시까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제쯤 자기가 죽을지를 예감하고 나의 내레이션으로 나의 인생 스토리를 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불분명한 그레이존 때문에 자신이 정확히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우울해하다가 적극적인 수용, 예컨대 초월과 승화라는 조금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겨를이 없이 죽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p.203-204)
 죽음에 대한 '초월'과 '승화'는 앞서 말한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맞는 5단계 중 마지막 수용을 거친 후 또다시 도달해야 하는 최종적인 단계다. (...)그런데 우리 현대 의학은 그러한 승화를 이루지 못하게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 현대 의학에 의해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p.219-220)
 이처럼 저자는 개인의 건강한 죽음과의 관계 맺음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의 중요성, 그 죽음이 갖는 존엄성, 이를 실천하기 위한 그 나름의 계획을 유쾌하면서도 진중하게 풀어낸다.
 
 삶은 언제나 그 앞에 놓인 어두운 간극을 메우며 앞으로 한 발작을 내딛는다. 생명이 꽃 피운 삶은 언제나 그 익명의 순간을 향한다. 죽음은 이해의 대상도, 소유의 대상도 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구에게나 이번 생이 처음이듯, 죽음도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황동규 시인의 시 <참을 수 없을 만큼>을 남기며 짧은 감상평을 남긴다.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2.202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by 김초엽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2.202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by 김초엽
  

 미래에서 바라본 현재의 모습. 발전된 기술로도 감출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 유약한 인간이 마주한 타자의 얼굴. 이 모두를 바라보는 작가 김초엽의 시선이 따뜻하다.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pp.80-81, 스펙트럼 中.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p.188, 감정의 물성 中.)

 "내 생각에 재경 이모는 인어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 (p.269,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中.)

 각 단편 속 작가의 물음들이 특별히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만큼 참신하지는 않다. 그러나 미래를 그려내던 작가의 시선이 현재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릴 때, SF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기존의 물음을 새롭게 채색한다. 그녀의 시선은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타자의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연약하다. 그렇기에 김초엽 작가의 글은 한 움큼의 온기를 품고 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주체이며 동시에 타자로 존재한다는 사실. 이를 애써 외면해왔던 우리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 그녀의 의도였다면, 그녀는 작가로서 분명 성공적인 첫걸음을 옮겼다.     

 독자로서 김초엽 작가에게 작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면, 

  • 작가의 질문은 작품 깊숙이 더 감춰도 된다. 대화나 글 안에서 스스로 충분히 드러날 수 있다.
  • 장르 소설이라는 외형을 걷어내면, 작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 글의 질감, 호흡이 아직은 부족하다.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에, 앞으로 세상에 내놓을 작품들을 기대한다.

2022년 1월 16일 일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1.202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신형철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1. 202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by 신형철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짧은 글들을 모은 책이다. 슬픔이라는 주제, 슬픔을 공부(해야)하는 슬픔에 대한 글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빛깔을 발하고 있다. 책은 총 5부로 이루어져 있다: 슬픔(1부), 소설(2부), 사회(3부), 시(4부), 문화(5부). 그리고 각각의 주제를 하나로 묶어내는 힘은 글에 드러나는 작가의 진솔함에 있다. 
 
 나는 사실 신형철이라는 비평가/작가를 잘 모른다. 이는 아마도 부끄러운 고백일 것이다. 대학 시절 읽었던 많은 시집들, 도서관 한 쪽의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서 읽던 문학 잡지들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나는 그의 글을 잘 모르고, 따라서 그를 잘 모른다. 물리적 공간의 변화가 읽고 쓰는 문자의 교체로 이어져 버렸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핑계를 대보지만,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 때문임을 알고 있다. 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그의 글을 읽으며, 그 안의 진솔함을 발견한다. 

 작가 신형철의 글들은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맞서 일어서야 할 때는 누구보다 단호한 목소리를 낸다. 개인적으로는 문학, 특히 시에 관한 글들이 가장 좋았지만,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 속에 녹아있는 연민과 애정, 부끄러움과 연대의 마음을 읽으며 작가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다음 글들을 통해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 결과물은 언제나 아름답다. 다른 시에서는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놀라운 직유들을 그는 어린아이가 과자를 흘리듯이 한 편의 시 안에 아무렇게나 흩뿌려놓는다. 그가 제아무리 헌신적으로 타자의 목소리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의 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질색하고 시에서 그 가치를 수상쩍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얻은 것들에 조금도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 (pp.301-302, 시의 천사-진은영 <훔쳐가는 노래> .)

 나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이 말에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해왔고 내 말이 글에 가까워지기를 소망해왔다. (pp.429-430, 문학에 적대적인 세계 .)

 책에 대한 약간의 투정을 부려본다면, 짧은 호흡의 글들이 산만한 인상을 준다는 정도다. 글 모음 책이 갖는 형식의 한계이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 오히려 신형철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와 마주 앉아 그의 글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11-12.2021: Pachinko by Min Jin Lee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11-12. 2021

<Pachinko> by Min Jin Lee

 첫 문장이 눈에 띈다. 어쩌면 조금 과하기도 하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p.3) 

 방점은 뒤의 "...but no matter."에 찍혀있다. 삶을 이어온 가족의 이야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전부다. 실상 이는 우리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 살아남는 것이 생()의 주요한 목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살아남기 그 자체가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몸부림이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자신의 삶에 색을 더하고, 의미를 찾는다. '생존'이라는 삶의 맹목적 의지마저도 의미를 갖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가 지속되어 왔다. 이민진 작가의 책 <파친코>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역사 한 부분을 조명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람들의 인식을 보편적이고 쉽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는 분명 작가의 자료 수집과 고증을 위한 노력이 수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기독교를 믿는 이삭의 가족들이 평양 출신이라는 설정, 전후 민단과 조청련 사이의 갈등, 일정 나이가 되면 외국인 등록을 하고 지문을 남겨야 한다는 사실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역사적 배경의 무게가 등장 인물들을 짓누른다. 양진, 순자, 경희는 책의 마지막까지 "A woman's lot is to suffer."(p.414)이라는 굴레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시대에 짓눌린 채 입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백요셉, 백이삭, 심지어 꽤 매력적인 인물로 등장했던 고한수조차 그 시대의 그저 그런 누군가로 머물러 있다. 이는 아마도 소설의 전체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길게 설정된 시간과, 많은 수의 등장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그중 백노아는 가장 아쉬웠던 인물이다. 
 The big secret that he kept from his mother, aunt, and even his beloved uncle was that Noa did not believe in God anymore. (...) Above all the other secrets that Noa could not speak of, the boy wanted to be Japanese; it was his dream to leave Ikaino and never to return. (p.176)
 Noa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when he was with her; in fact, he didn't care about being Korean or Japanese with anyone. He wanted to be, to be just himself, whatever that meant; he wanted to forget himself sometimes. But that wasn't possible. It would never be possible with her. (p.308)
 That evening, when Noa did not call her, she realized that she had not given him her home number in Yokohama. In the morning, Hansu phoned her. Noa had shot himself a few minutes after she'd left his office. (p.385)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이 인물의 심리 변화와 행동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단서가 부족하다. 좀 더 집요하고 치열하게 노아의 심리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면 좋았을 듯 하다. 
  • 고한수가 자신의 친부임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 어머니 순자에게 화내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그 수치심이 그를 떠나게 만들었나?
  • 결국 백노아는 일본인이 되고자 자살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속일 수 없는 그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었기 때문에 문장의 리듬감이나, 표현의 섬세함에 대해서는 자세히 평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 또한 단조롭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내용과 흐름은 대체로 평이하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 받기로 하는 장면, 남편 백이삭의 무덤을 찾았던 순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상기시키며 자연스럽게 책을 마무리한다.

 냉정한 평은....영어로 쓰여진 한국 근현대사 배경의 (외국인 독자들에게)흥미로운 소설.

2021년 10월 15일 금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10.2021: 포노 사피엔스; Phono-sapiens by 최재붕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10. 2021

<포노 사피엔스> by 최재붕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읽었다. 저자는 포노 사피엔스(Phono-Sapiens), '전화기(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며 책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나 뒤따르는 내용은 진부하다. 책이 나온 지 2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도 책 속에 나열된 사례들은 전혀 신선하지 않다. 이건 아마도 이 책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가 매우 좁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한국에 살고 있는,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50~60대?)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갖는 한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저자가 내세우는 주장들과 개념들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너무 빈약하다. 가령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하고 있는 오늘 날의 혁명적 변화 -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디지털 문명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 혁명 - 에 관한 비판적 물음은 배제되어 있다.: '정말로 자발적인가?' 또는 '정말로 소비자가 시장의 권력을 획득하였는가?' 등의 물음이 전혀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단, 매일같이 반복되던 대중 의식의 형성 과정이 사라졌습니다. (...) 그래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을 보고 복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각은 모두 개인화 되었습니다. (...) 정보 선택권을 가진 인류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선택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새로운 기준이 등장한 탓입니다. (p.26)

(가능한 반론)

  •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을 보고 복제함으로써 매우 독단적이고 고립된 대중 의식이 형성되었다. 즉, 무비판적으로 형성되고 개인화된 생각은 독단적 가치체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좁은 우리'가 등장한다. ex) 일베, 극단적 페미니즘, 극우 파시즘, 급진화된 세력, 네오 나치 등.
  • '선택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인식은 결코 소비자에게 권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비자에게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강요와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또한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역전 현상이 시장 독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구조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책 속에 열거된 사례들이 철저히 시장/기업 중심적이고, 또한 철저히 사용자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오로지 시장에서의 성과와 이익에 국한되어 있다. 아마도 저자는 2021년 구글(Google)에 노조가 생길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1) 또한 2017년에 우버(Uber)의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제기 되었다는 사실(2&3)을 돌아본다면 저자의 시장 혁명과 새로운 조직 문화에 대한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주장, "디지털 문화 부작용 이면의 놀라운 잠재력 (본문에는  '부작용의 편견 뒤에는...'이라고 되어 있다. '편견'이라는 단어 선택에 이미 저자의 편향된 시각이 드러난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말은 충분히 되새겨 들어야 할 가치가 있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동반하지 않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저자가 디지털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고 있는 스마트폰/디지털 문명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게임 중독, 피상적 인간관계, 정부 규제 등)과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에 대한 불신/불만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수아비 때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치 vs 경제'라는 도식을 '규제 vs 혁신'으로 치환함으로써 저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시급성을 드러내고 타당성을 얻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논증이다. 개인은 시장의 소비자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의 시민이다. 둘 중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적어도 시민으로서의 역할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은 사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 (<이성과 혁명> 중.)"라는 마르쿠제의 지적을 상기해본다.) 
  오히려 저자가 공공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변화 -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와 그것이 활용하고 있는 데이터 기술이 기존의 질서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시장 혁명을 통한 구조적 변화가 기존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디지털 문명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는 어떤 사회/문화적 계층을 형성할 것 인지 등 - 에 대한 시각을 함께 다루었다면 좀 더 균형 잡힌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마무리 하며 저자는 기성 세대의 성과와 그 동안 축적되어 온 기술, 그리고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디지털 문명 속의 생존 전략을 제시한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좁은 시선이 이미 책 전체의 뼈대를 흔들어 버렸기에 책의 맺음말은 허무하다. 또한 내용 곳곳에 등장하는 진화론, 세대 담론, 인문학(호모 루덴스/인의예지) 등 다른 분야의 개념들을 포노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개념과 억지스럽고 어설프게 연결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대중 교양 서적을 통해 독자에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사고(한때 '통섭'이 유행했었지...)를 보여주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지만, 때로는 전문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바람직할 때도 있다.: 
  • 디지털 문명을 선도하고 있는 기업들의 차별화된 조직 문화.
  • 디지털 문화를 소비하는 개별 사용자들에 대한 데이터 수집 방법과 활용 방식.
  • 혁명이라 부를 정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통찰, 혹은 드러나는 윤리적 문제들.
  • 기존의 것을 대체하며 등장한 새로운 가치/체계/패러다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주장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물음, 즉 '오늘 날의 변화를 과연 '혁명'이라 명명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라고 여길만한 것은 그저 새롭게 등장한 기업들의 매출액/시가총액/투자금/시장 점유율의 나열 뿐이다.
 
 개인적으로 산업혁명은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 산업혁명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정치/경제 질서를 무너트렸고, 부르주아와 도시 노동자라는 정치/경제 계급이 등장하였고, 상품 생산 방식이 변했고, 새로운 공간(도시)이 출현했다. 이후의 2차, 3차, 그리고 이 책 속의 4차 산업혁명은 그로부터의 (괄목할 만한) 발전 정도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진행 중인 변화가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의 해결이 수반되어야 한다.
  • 새로운 공간의 창출/발견.
  •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한계(죽음)의 극복.
  • 희소성 문제 해결. 
 시장에서의 경제적 성과가 곧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그것의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즉 인간 의식/존재 방식의 변화 없이는 혁명이라 부르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물결/혁명을 기대하기에는 이 책의 시선이 너무 좁다.

2021년 9월 9일 목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9. 2021: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by 하퍼 리(Harper Lee) 저/김욱동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9. 2021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by 하퍼 리(Harper Lee) 저/김욱동 역

 짧게 요약하자면 경계와 규범에 관한 글이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젬과 스카웃 남매(+친구 딜)가 바라보는 세상(메이콤)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충돌하는 가치와 이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글이다.

  • 아서 (부) 래들리 아저씨  
  • 듀보스 할머니  
  • 커닝햄 아저씨  
  • 밥 & 메이엘라 유얼 
  • 돌퍼스 레이먼드 아저씨 (봉지 콜라)
그리고
  • 팀 로빈슨 & 아이들(젬, 스카웃 그리고 딜.)

 아빠(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관용과 이해의 태도를 보여준다.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거나 다른 이들의 의견을 비하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조용하고 성숙하다. 그가 독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양심이 언제나 아이들을 향한 애정과 타인에 대한 공감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아빠가 그 사람을 변호하시지 않으면, 오빠랑 저랑 이제 더 아빠 말씀을 안 들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ch.9 p.123)

"......하지만 이걸 꼭 기억하거라. 그 싸움이 아무리 치열하도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 친구들이고 이곳은 여전히 우리 고향이라는 걸 말이야." (ch.9 p.124)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ch.11 p.170)

"커닝햄 아저씨는 바탕이 좋으신 분이야. 다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저씨에게도 약점이 있는 것뿐이지." 

"폭도들도 결국 사람이거든. 커닝햄 아저씨는 어젯밤 폭도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한 명의  인간이야."

"그걸 보면 뭔가 알 수 있어, 들짐승 같은 패거리들도 인간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걸. 흠, 어쩌면 우리에겐 어린이 경찰대가 필요한지도 모르지. 어젯밤 너희들은 비록 잠깐이었지만 월터 커닝햄 아저씨를 아빠의 입장에 서게 만들었던 거야. 그걸로 충분하다." (ch.16 p.251)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이겨내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한 과제다. 특히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유얼 집안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삶과 생활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는 특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그 누구에게도 공감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폭력을 행사할 또 다른 타자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백인들은 그녀가 돼지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흑인들은 그녀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고요. 그렇다고 흑인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돌퍼스 레이먼드 아저씨처럼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녀는 강기슭에 땅을 갖고 있지도 않았으며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얼 집안 사람들에 대해 <그건 그들의 생활 방식이지> 하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메이콤 군은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구호품 바구니를 건네 주고 극빈자 생활 기금을 주고 또한 경멸까지 보냈습니다. (ch.19 p.307)

  결국 팀 로빈슨의 친절은 메이엘라 유얼이 백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에 균열을 만들었고, 그의 통제되지 못한 연민의 감정(이 또한 흑인으로서의 규범을 어기게 된다.) 은 메이엘라에게는 애정과 관심의 결핍을 왜곡된 형태로 보상해줄 대상 또는 수단으로, 기존 관습과 규범에 익숙한 백인(어른)들에게는 넘어선 안 될 경계를 넘어온 자, 즉 치욕과 모욕으로 다가선다. 그렇기에 (모욕 받았다고 믿는) 그들에게 있어서 팀 로빈슨의 재판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죄(Crime)를 다루는 것이 아닌, 금기(백인과 흑인의 경계)를 어긴 신성 모독(Sin)에 관한 일이 된다.  

"네, 검사님. 아가씨가 상당히 불쌍해 보였습니다. 다른 식구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고요, 불쌍하게 보였다고요?" 길머 검사님은 마치 천장으로라도 튀어 오를 기세였습니다. (ch.19 p.316)

  이 순간 법정에서는 멈출 수 없이 터져버린 딜의 울음소리만이 소외된 이웃(메이엘라 유얼)에게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가선 팀 로빈슨의 통제되지 못한 감정(연민과 친절)을 진정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딜, 결국 그는 흑인이잖아."
"난 그런 거 손톱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ch.19 p.319)

 그러나 밥 유얼은 어리석게도 흑인 청년을 무고함으로써 메이콤(=백인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 했다.: "나도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규범을 지키고 있어!"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것은 모욕과 멸시였다.: 경계를 지켜내지 못한 쓰레기. 잉여 인간. 쓸모 없는 녀석. 팀에게 내려진 배심원들의 유죄 선고는 사실 그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였다. 배제와 추방. 그것은 울타리였다. <넌 이 곳을 넘어선 안 돼!>라고 답변하는, 유죄를 선고하면서 팀 로빈슨을 쳐다볼 수 없었던 이들이 새롭게 놓은 울타리.

"......그래, 좋아, 이 깜둥이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하지만 넌 다시 쓰레기장으로 돌아가, 바로 이런 식이었거든." (ch.27 p.400)

 기존 규범에서 이탈한, 그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의 공허함은 또 다른 경멸과 적대를 불러 일으켰다. 마을 축제가 모두 끝난 어둠 속에서 밥 유얼은 몸부림 쳤고, 자신이 놓쳐버린 (어쩌면 허락되지 않은) 아이들의 울음에 상처를 내려했다. 그러나 또 다른 앵무새 한 마리, 아서 부 래들리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었고, 팀 로빈슨이 그들에게 안겨준 작은 파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성장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시선(규범)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가로등이 읍내까지 길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태껏 이 방향에서 우리 동네를 바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ch.31 pp.446-447)

  어린 소녀 스카웃을 이 작품의 화자로 삼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서사를 이끌어 나간 작가의 선택은 탁월하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려진 아빠(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이 자칫 작품을 유치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작품 속 성숙한 그의 태도와 말은 아이들의 시선에 비춰질 때 비로서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 낸다. 

아빠는 오랫동안 마룻바닥을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고개를 드셨습니다. "스카웃 유얼 씨는 자기 칼 위로 넘어졌어. 이해할 수 있겠니?" 아빠가 말씀하셨습니다. 
(......)
"이해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
"글쎄, 말하자면 앵무새를 쏴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죠?" (ch.30 p.443)

 그렇게 아서 부 래들리를 이 세상(메이콤)의 앵무새로서 지켜내려는 아빠의 한마디에 스카웃은 래들리 아저씨의 손을 잡고 오빠 젬을 소개한다. 

 책장을 덮고 스스로의 모습을 아이들의 눈에 비춰본다. 나도 언젠가 아이들에게 "형용사를 몽땅 빼버리고 나면 사실만 남게 된다 (ch.7 p.97)"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멋진 아빠가 되어야 할 텐데......걱정이 많다.

 끝으로 몇 가지 생각을 던져본다.

  1. 정치는 비극(tragedy)이 아닌 희극(comedy)이 될 수 있을까?
  2. 진정한 대화는 가능한가?
  3. 공동체의 연대와 공감을 넘어선 규범, 즉 이성적 규범은 존재하는가?

2021년 7월 25일 일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7-8. 2021: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The Middle Passage by 제임스 홀리스 저 / 김현철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7-8. 2021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  The Middle Passage>
 by 제임스 홀리스 (James Hollis) 저 / 김현철 역

이 책은 융 심리학 /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저자가 '중간항로'라 명명한 2차 성인기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책에서 다루는 융 심리학 개념들은 생소하지만, 이에 대한 저자의 친절한 설명과 예시를 통해 책의 내용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원래의 자기감을 어떻게 습득했을까? 중간항로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삶의 변화들은 무엇일까? 자기감을 어떻게 재정립할 수 있을까?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개성화individuation 개념과 우리의 타인을 향한 헌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개성화를 이루고 중간항로를 지나 어두운 숲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이동하려면 어떤 태도와 행동변화가 필요할까? (p.14)

"자아(ego) - 자기(자기원형; archetype of self) - 개성화(individuation)" 개념은 프로이트의 "이드 - 자아 - 초자아"라는 도식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듯 하며, 주체로서의 개인에게 더욱 초점을 맞춘 듯 하다.

  • 개인의 성장 - 부모/사회와의 관계 - 결혼 - 일 - 문학 - 고독/죽음

저자는 솔직한 태도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의 주제들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뉴욕 양키스 중견수의 꿈은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두 권의 책과 한편의 드라마를 떠올렸다.

1.<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by 사르트르

광대 놀이에 지쳐버린 사르트르의 유년기는 얼마나 처절하고 모욕적이었나? 그렇기에 그는 실존주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불쾌한 개념을 세상에 내놓았는지도 모른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보다 친절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다가서는 미덕을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순화된 버젼의 실존주의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르트르는 무의식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2. <왕좌의 게임>

<왕좌의 게임>보다 더 자식/부모 사이의 콤플렉스를 잘 (매우 잔인하고 선정적으로) 극화한 영상물은 본 적이 없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주술적 사고 & 영웅적 사고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이를 극복한 (-하려 노력한) 이들은 간신히 살아남거나, 멋지게(?) 죽는 장면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허무하거나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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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심리학과 그 개념들은 내게 매우 생소하기에 적절한 비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본다.:

저자가 바라보는 개인의 여정이 지나치게 목적론적이고, 이를 설명하는 개념 틀이 너무 크고 포괄적이어서,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에게는 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마치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주체를 중세 시대에 되돌려 놓는 것 같다. 저자는 중간항로라는 개념이 "연대기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심리적 경험"(p.40) 이라 설명하지만, 그 심리적 여정이 지나치게 환원적이라는 것이다. 주체 - 세계의 지나친 분화가 오히려 주체를 구속한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이 스스로 충분히 발달해야 한다. 이는 개성화가 지닌 역설이다 (...) 따라서 개성화에 대한 관심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타인의 개성화를 지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p. 227-228)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개별과 보편의 내적 통일, 즉 자유라고 말할 것이다. 주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저자는 우리 시대의 신화로서의 개성화를 (p. 223)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가 사용하는 개념 틀의 환원론적 성격이다. 지나친 설명력은 구조적 폐쇄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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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주제였고, 처음 접해보는 장르였다. (독서 모임의 장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황동규 시인이 만들어낸 "홀로움"이라는 단어. 

중간 항로를 지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어울리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홀로움이 아닐까 싶다.

2021년 6월 27일 일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6. 2021: 회색인간 by 김동식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6. 2021

<회색 인간> 김동식 저.

일반적인 소설/문학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대하는 나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난 채로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조금은 익숙한 느낌을 지닌 채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몇몇 글들의 참신한 배경 설정과 반전을 동반한 결말도 어느 정도는 반복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단순한 문체, 리듬이 결여된 문장, 부족한 상황 묘사 등이 이러한 나의 인상을 더욱 부추긴 듯 하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사실 간단하다.: '현대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그 속의 소외된 개인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는 또 다른 개인들의 강박적인 선택.' 모든 글들이 대부분 비슷한 질감이기 때문에 이 주제가 오히려 독자에게 강박으로 다가온다. 

장르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이기에 불만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