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
도쿄 시민 집회,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하여 외쳤다. <영속 패전론>의 저자 시라이 사토시 또한 동일한 표현으로 자신의 저작 첫 문장을 시작한다. 참담하고, 슬프다. 분노하고, 암담하다. 그렇게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그들을 모욕했는가?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전후 '평화와 번영'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자의 냉정한 시선을 뒤쫓다 보면, 이미 기능을 다하고 죽은, 전후 체제의 껍데기를 지탱하고 있는 기만적 개념들을 마주한다.
- 종전 기념일
- 전후 민주주의
- 고유의 영토(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
- 전후 탈각
- 일억총참회
- 절대평화주의
- 국체호지
전전(戰前)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전후 일본 사회 정-재계의 권력, 그에 기생하는 학계와 언론계가 누리는 혜택, 이를 뒷받침하는 이중 구조의 모순(전쟁에서 패했지만,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았다.)은 바로 '영속패전'으로 귀결한다.
다시 말해 '패전 후'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 종속 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부인)하는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 인식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패전은 이중 구조를 이루며 계속되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한 패전의 부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영속패전'이다. (p.61)
미국에는 패전으로 이뤄진 종속 구조를 한없이 인정함으로써 이를 영속화하는 한편, 그에 대한 보상 행위로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패배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패배의 부인'을 지속하기 위해 더욱더 미국의 졸개가 돼야 한다. 노예와 같은 복종이 패배의 부인을 지탱하고, 패배의 부인이 노예 행위의 보상이 된다. (p.88)
저자의 논증 과정은 매우 정직하고 냉철하다. 그리고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은 날카롭다.
현실적, 형이상학적 책임을 다루는 논의와 별도로 정치 차원의 명제, 즉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사실이 있다. 단순한 사실인 까닭에 경제적 성공에 따른 국민의 만족감 고양이나 진지한 회환과 반성에 바탕을 둔 부전(不戰)의 맹세 같은 주관적 차원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mphasis mine, p.57)
결국, 국가의 영토를 결정하는 최종 심판 단계는 폭력이다.즉 역사상 최근에 일어난 폭력(전쟁)의 결과가 영토 지배의 경계선을 규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p.68)
왜냐면 어떤 나라든 국가가 본래의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본성은 악이고 타국이나 타 국민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 정책은 애초부터 진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검열로 통제받는 형태로 시작된 전후 민주주의가 정의의 기초나 전후 일본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후 민주주의 개혁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던 사람들에게 에토가 퍼부은 비판의 핵심이다. (...)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 추구와 국내 사정에 따라 규정됐다. (p.134)
지금껏 가까스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이라는 망상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전후는 이미 종착점을 지나쳤다. 결국 바깥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저급한 내셔널리즘임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집착, 미국을 향한 일방적 구애와 비굴한 저자세 외교. 이를 통해 유지하려는 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지위(이 또한 허구에 기반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시인하기 두려울 뿐이다. 전후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이들의 몰염치와 방관자들의 비겁함이 빚은 허구가 그들을 짓누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
.
.
일본 극우의 정신 구조(=자민당)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한국 극우의 친미-친일 성향의 속사정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면,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좋은 책!!!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