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4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 2023


<나의 할머니에게> by 윤성희 외 5명

 할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나는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그녀들의 삶은 마치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고, 그녀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할머니로 만족한 듯 보였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지금까지 나에게 남아있는 많은 추억들이 그녀들의 사랑에 빚지고 있듯, 그녀들의 삶은 그 이상의 추억과 아픔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도동 집. 가을이면 마당 한 구석 모과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던 할머니. 노랗게 잘 익은 모과, 달콤한 향기와 설탕을 유리병 속에 담아내던 그녀. 겨울 저녁을 기다리게 만들던, 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던 그 유리병들. 할머니 머리맡에 있던 동전 주머니. 오백원 동전을 손에 들고 찾은 우리 동네 <목포 슈퍼>.
그리고 그녀는......몰락한 명문가의 딸. 재주 많았던 그녀의 조용한 삶. 잃어버린 기억. (할머니 강팽옥)

  우리 가족들의 겨울철 별미. 큼지막한 이북식 손만두. 그리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 빙-둘러앉은 가족들의 내기 윷놀이. 그녀에게 배웠던 민화투.    

 그리고 그녀는......고향에 두고 온 가족. 이곳에서 만든 가족. 유별나게 힘들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 어렵사리 만난 고향 가족들에 대한 실망. 떨쳐내지 못하는 지난 날의 회한. (외할머니 이정순) 

 나는 여전히 그녀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이번에는 작가들의 눈을 빌려 그녀들의 감춰진 뒷모습을 엿볼 뿐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은 이거였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 그 후로 비가 오면 나는 창밖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한참 서 있어보곤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가 지나가는 걸 상상하면서. (어제 꾼 꿈 中)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무해해보이는 표현 속에 감줘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흑설탕 캔디 中)

할머니에게 알츠하이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 친척들은 할머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곤 했다. (선베드 中)

그날, 거실로 다과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그 단어-과부.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직후였을 것이다. 그녀는 할머니의 얼굴을 먼저 살폈는데, 놀랍게도 할머니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의 얼굴에는 야릇한 즐거움이 잠시 동안이지만 명백하게 머물다가 사라졌다. (위대한 유산 中)

"엄마 둘에 딸 둘이시네요." (11월 행 中)

달리 말하면 늙어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던 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정원 中)

2023년 4월 13일 목요일

(독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Le Grand Cahier + La Preuve + Le Troisième Mensonge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아고타 크리스토프(Ágota Kristóf) /  용경식 역

 과잉과 결핍,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에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Claus)와 루카스(Lucas)가 존재한다. 처절한 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거짓 속에서도 이 둘은 함께한다.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총 세 편의 소설 속, 그들이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겪은 운명은 어디에 놓여있었나? 모순과 거짓이 진실을 담아내는 그들의 생(生)을 유심히 바라본다.  

 쌍둥이 형제는 친절하다. 그렇기 때문에 잔인하다. '선-악'/'미-추'는 그들 행위의 동기가 아니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단지 그 뿐이다. 타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행한다. 그 어떤 망설임도 미동도 없이 행한다. 응답하는 자!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결코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게다가 후회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긴 침묵 끝에 신부가 말했다.
 "나는 창문을 통해서 다 보았다. 그 빵 한 조각, 하지만 벌을 내리는 일은 하느님의 몫이다. 너희가 그분을 대신할 권리는 없는 거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축복을 빌어도 좋겠니?"
 "좋을 대로 하세요." (p.147)

  루카스가 물었다.
  "처형 때도 입회하셨어요?"
  "아니야. 그는 내게 입회해달라고 했지만, 난 거절했지. 자네는 내가 겁이 많다고 생각하지?"
  "글쎄요, 하지만 당신을 이해합니다."
  "자네 같으면 입회했겠나?"
  "그가 내게 부탁했다면, 그럼요, 했을 겁니다." (p.352)

 세상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다. 진실은 거짓 위에 발을 딛고, 거짓은 진실을 내뱉는다. 그렇게 현실의 결핍을 환상 속 과잉으로 뒤덮는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두 형제의 존재는 그들이 나눠가진 이름처럼 '우리'로 분화되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현실처럼,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존재의 결여, 견딜 수 없는 고독. 그렇기에 그들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 형제가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에도." (p.443)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p.452)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p.545)

  삶의 이면이 곧 삶 자체일 때가 있다.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삶의 겉과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의 숙명이었고, 그녀가 창조한 작품 속 쌍둥이 형제는 그 과업을 온몸으로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