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5일 수요일

당신

-당신-

당신과 주고받았던 속삭임이
하나의 선이라면
출렁이는 선들로 가득한 세상 속
아주 사소한 인사말처럼
한 칸의 비좁은 방 속에서 주고받았던 그것이
그저 평행의 선이 될 수도 있었다면
보통의 일상에 내버려진
극히 평범한 일이라면
가령 어제까지의 일을
먼지 쌓인 책상 위 달력 속에서 마주하는 일과 같이
눈에서 나와 눈으로 찾아들던
당신과 나누었던 수 많은 빛과 선의 비행이
필연과 기적의 파티가 아니었다면
설령 정말로 그렇다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마주하고 싶은 그것은
순례자의 여행길 첫째 날, 교(驕)한 마음을 조금도 엿볼 수 없는
새로이 삶을 품게 된 여느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임을
그것만을 당신께 드리고자 합니다.

What is Pragmatism?


 What is Pragmatism? Why am I still interested in this unpopular philosophy? Here is a clear answer to my question from Richard J. Bernstein.



When I teach courses dealing with pragmatism (old and new), I tell my students that it is best to think of the discourse about pragmatism as an open-ended conversation with many loose ends and tangents. I don't mean an "idealized" conversation or dialogue, so frequently described and praised by philosophers. Rather, it is a conversation more like the type that occurs at New York dinner parties where there are misunderstandings, speaking at cross-purposes, conflicts, and contradictions, with personalized voices stressing different points of view (and sometimes talking at the same time). It can seem chaotic, yet somehow the entire conversation is more vital and illuminating than any of the individual voices demanding to be heard. This is what the conversation of pragmatism has been like. (The Pragmatic Turn, p.30-31) 


This book is not full of Bernstein's genuine concepts, but it tells us why we should take the discussion of pragmatism seriously. Simply speaking it is alive! It is an open conversation for all of those who are getting ready to jump into many of the important themes in contemporary philosophy. In this book, Bernstein clearly shows how pragmatism will free us from philosophical bias we have had: a sharp dichotomy between subject and object, mind-body dualism, analytic-synthetic, the knowing-the known, and theory-practice. So now it is time to free us from our bias in the term of pragmatism first, then let's start a journey to the conversation of pragmatism!

2017년 1월 14일 토요일

시차 적응이 힘들다.

 1.
잠이 안 온다. 지금 이 곳의 시간과 떠나 온 곳의 시간에는 차이가 있다. 5년 만에 만나고 온 사람들이 아침 시간을 서두를 때, 이 곳에서 난 아이들과 자기 전에 양치질을 했다. 시차가 있어서 좋다. 그들과 다른 시간을 5년 동안 살았고, 그들의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왔다. 그리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사랑하는 이에게 작은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오탁번 시인의 <별>이라는 시의 한 글귀를 함께 적었다.

'아내여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나하고 1c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아내여 그대의 아픈 이마를 짚어보면 38조km나 이어져 있는 우리 사랑의 별빛도 아득히 보인다.'

세상 누구 보다도 가까운 이와의 사이에 그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 할 아득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메우는 일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사랑에 실패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그녀와의 이 아득한 거리를 그대로 두고도 그/그녀의 손을 잡는 일이 사랑이라면 나는 계속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3.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는 어려운 고백을 해주었다. 이 긴 시간 동안 내게 말하지 못했던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지.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안아주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갑작스런 고백이 내가 그녀를 안아줄 수 없는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난 이제 이 친구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친구와는 평생 함께 살아도 좋겠다.' 재미없고, 애교도 없고, 내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은 그녀에게 내가 왜 그 때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4.
어제 밤에는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지금 이 곳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다. 아무튼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내 옆의 아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지치다를 반복하며 지내온 나의 시간이 그녀에게는 어떻게 흘러 온 시간이었을지 감히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슬프지만 나는 내 아내를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손을 잡을 수 있을 뿐이다.

5.
또 한 명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녀가 최근에 자신이 맡아서 진행했던 일에 대해서 말했다.

"잊혀지지 않아요. 처음 하는 일들은 다 그런가 봐요."

나는 대답했다.

"그런가 보다."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손이 기억난다. 우리도 다른 시간을 보냈구나. 그 시절 그녀와 나의 시차는 어느 정도였을지. 시차 때문에 놓칠지도 모를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도서관 계단 가까운 자리에서 매일 전공 서적과 소설 책을 읽었던 나를 상상이나 했을까? 7년 동안 사용했던 휴대전화기의 화면이 꺼졌을 때 급히 학교를 나와 새 전화기를 샀던 나의 모습을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를 메우려고만 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한다. 그 해 추운 겨울 도서관 앞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고 싶었다. 그 때는 이제 내 옆에 있으니 더 이상 그녀와 나 사이에는 시차가 없을 줄 알았다.

"미안해요."

6.
각자의 시간이 이런저런 모양의 서로 다른 물결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때로는 물결의 방향이 엇갈리며 그들 사이에 금을 만들고 갈라 놓으리라. 그런데 언제나 빛은 그 틈새로 들어오고 나간다.

"그대여 그 틈을 메우려고 하지 말아요. 난 이렇게 깨어진 우리 둘 사이의 이 틈새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