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화요일

인사, 2019 그리고 2020

2019년. 안녕. 영원히.

주변 사람들도 잘 모르는 -알아도 오지 않는- 이 공간을 종종 둘러보는 이들이 있다.

특히 그대. 러시아에 사는 그대는 누구인가?

반갑습니다. 이 글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당신도 나를 잘 모르고, 나도 당신을 모릅니다. 그 사실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2020년. 안녕하기를.

2019년 12월 27일 금요일

Spotify의 정리정돈

Spotify Logo from Google Image

"난 정리정돈을 잘해."
"각각의 정리함에 예쁜 표식을 해두었지."
"너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부턴 내가 알려줄게!"


난 CD에 집착하던 사나이였다. 일본에서 잠깐 살았던 중학시절, 그들의 음악 시장에는 MD라는 것이 있었고, 그 깔끔하고 정교한 모습에 감탄을 했었다.

"CD의 음질을 구현해 낸 이 앙증맞은 자태를 보라!"

라며 감탄을 했지만, 역시 내가 일본에서 공수해 온 것은 CD였다. (MD가 너무 비싸기도 했고)  고교 시절, MP3 플레이어가 처음 나오고, 냅스터(Napster)를 통해서 듣고 싶은 음악을 (여러 의미로) 간편히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결국 내 가방 안에는 항상 CD 플레이어가 들어있었다. 나의 마지막 하늘색 CD 플레이어, 이 녀석의 렌즈 수명이  끝나갈 무렵 내 눈에 띈 것은 Apple iPod이었다. MP3 플레이어의 진화! 그러나 이후에도 수 많은 CD를 구매했고, - CD는 소중하니깐! - 직접 iTunes에 일일이  음악들을 옮겨 나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다. 난 바다 건너, 먼 곳에 오게 되었다. 그 동안 모아둔 앨범들과 작별을 고하였다. 먼 곳에 온 이후로 컴퓨터 안에 있는 음악 파일들을 통해 예전 노래들을 듣고, YouTube를 통해 요즘의 노래들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약 8년이 흘러 (8년만에 장만한 새 컴퓨터 덕분에) 느즈막히 접한 Spotify.

'아...이래서 요즘 컴퓨터는 저장장치 용량에 집착하지 않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들이 정리해 놓은 음악 목록들을 살펴본다. 깔끔한 목록표, 오늘의 음악들: 메이드 뽀 마이끌, 한국 음악 목록의 태극기 문양까지. 뽀송뽀송한 기분이다.

좋아요를 눌러서 나의 취향을 알려주면, 그들은 응답한다: '넌 이 노래를 좋아할거 같아!' 그렇다! 자료 과학의 힘이란 위대하다!

Sun Rai의 <San Francisco Street>를 들었더니, Dua Empat의 <Piccadilly>를 추천해 준다. 언제나 내 곁에 있는 Stan Gets의 음악을 틀어보니, Lisa Ono의 앨범이 기억난다. 서울 내 방 어딘가에 꽃혀 있을 그녀의 앨범을 떠올리며 음악을 튼다.

처음 들어보는 가수의 처음 들어보는 음악. 항상 듣는 앨범과 잊고 있었던 가수의 목소리.

역시! 평소 정리정돈을 잘 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2020년이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난 평소 정리정돈을 잘 하니깐! :)

2019년 12월 16일 월요일

왜 하필 인.문.학. 일까?

왜 하필 인.문.학. 강의일까? 왜 하필 인.문.학. 강사일까?

'인문학 강사라고 불리우는' 누군가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무런 주제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꽤나 그럴듯한 논리와 숙련된 화술, 무엇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중요하다. 그러니깐 '아무렇게나'는 아닌건가?),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문.학. 입니다."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여 주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 강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공간과 빛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꺼내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혹은 떨군다.) 그러나 다시 '인문학 강사라고 불리우는' 누군가가 "여러분. 스티브 잡스는 할 수만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과 소크라테스와의 한끼 식사를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외친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음미하며 인문학의 위대함에 감동한다.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강사의 몸짓을 호기심 가득한 두 눈으로 바라본다.
철학과  어느 노교수: "내가 여지껏  학생들한테 거짓말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어." 
from Google Image

어느 날, 할 일을 미뤄둔 채 컴퓨터 화면 속 세상을 배회하던 중 "학생들에게는 수능을, 성인에게는 인문학을 강의하는 ooo 입니다."라는 자기소개로 시작하는 어떤 강사의 인문학 강의 동영상을 우연히 본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강연을 듣고 있는 사람들, 강연자의 한마디 한마디 모든 것이 소중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 IT와 인문학의 그 긴밀한 관계를 짧은 시간 안에 엮어내야 하는 그의 막중한 책무가 그를 몰아 붙인다. 그러나 그는 이 정도의 압박은 익숙하다는 듯 강연 중간중간에 청중들을 위해 준비해 온 농담을 자연스레 배치한다. 그는 완급조절에도 능한 것이다! 열변을 토하며 기업들의 입사 시험 문제와 면접 질문들을 나열한 후에 나지막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다.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크라테스로 시작해서 보드리야르까지 다다른 그의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자니, 강연 중간중간에 그가 아무런 의심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쏟아낸  몇몇의 문장들이 그의 전체 강연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강연의 끝을 알리는 그의 요점 정리를 듣는다. 보드리야르의 <이미지-소비 사회> 개념과 <스토리-인문학>을 엮는 강연자의 말솜씨에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청중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를 듣는다.

'청년들이 인문학을 공부해서 스토리를 생산하고, IT 기업에 취직해서 지금의 이미지 소비사회를 촉진시키자는 건가?'

도대체 그는 왜 갑자기 보드리야르의 소비 사회를 인용한 것일까? 단순히 [이미지-스토리-인문학]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띄어 놓은 유명 학자의 사진과 저작이 그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해준다고 믿었던 것일까? 인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의심스럽다. 그래서 조금 더 찾아본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인문학을 강조하는가?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찾다보니 그의 철학 강의가 눈에 띈다. 서양과 동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방대한 양의 강의들이 이미지 세상 속에 나열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면을 아래로 약간 내려본다. 경제, 역사, 미술, 식문화, 재태크, 주식.....('그래 왜 없겠어.')...... 정치까지!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그 개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가 곧 오늘 날의 한국사회인 것을. 모두가 모든 것을 알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회. 그 단단한(?) 토대 위에서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조급한 사회. 그렇다. 더 이상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전문가의 권위는 위키피디아에 넘어간지 오래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강연에 대해 지금도 여전히 의심하는 점 한가지가 있다. '적어도 강연자 스스로가 자신이 사용한 내용과 개념들에 대해 위키피디아라도 열심히 찾아봤을까?' 라는 것.)  전문가도 더 이상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전문가 처럼 보여야' 한다. 확신에 차야한다. 일말의 주저없이 자신의 의견을 쉴 틈 없이 쏟아내야 한다. 사실 그것이 굳이 자신의 의견일 필요도 없다. 쏟아지는 정보들 아래 깔려 죽을 판인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스타 강사인 그가 [IT-인문학]을 연결하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개똥-철학] 두 단어의 의미와 관계에 대해 고민해 봤더라면 더 설득력 있고 유의미한 인문학 강연이 되지 않았을까? (고백하자면 '개똥철학'이라는 단어는 전공자들에게 -적어도 나에게는- 묘한 자부심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 마나 한 물음: "인문학의 위기인가?"

먹고 살길만 열어줘도 돈 안 되는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자 하는 이들이 내 주위에는 꽤 많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돈 안 되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차라리 솔직해지자. 요즘은 인.문.학.이 돈이 된다고. 사람들의 조급함이 낳은 상.품.으.로.서.의. 인.문.학. 그런데 어쩌랴. 조급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인것을. 조급함이 돈을 가져다 준다. 물론 제대로 갖춰진 전문가 이미지가 있어야 겠지만 말이다. 이 강연자는 그 이미지 만들기에 성공한 듯 보였고, 내가 아는 전문가들 - 좁게는 철학 전공자들 - 은 그 이미지를 만들기에는 너무 확신이 없다.

철학과 어느 노교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여지껏 학생들한테 거짓말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