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9일 금요일

(여행) Paris, France 2022, 총평

 가족을 만나기 위한 가족 여행. 새 가족을 만나는 가족 여행.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니, 빠듯한 일정을 고집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보았으면 하는 파리의 역사적 장소와 유명 건축물 정도를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목표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경험한 (지금껏 최고인) 크로아상의 맛을 넘어서는 파리의 크로아상을 맛보는 것! 

 파리 여행 치고는 총 8일 간의 긴 일정이었지만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특히 동생 가족의 배려로 철학도와 사회학도가 거주하는 공간에 며칠 간 머무를 수 있었고, 그 동안 나누지 못한, 그들의 프랑스 유학 생활, 그곳의 친구들,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 현재 진행 중인 공부 이야기 등,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파리가 생각보다 크지 않고, 대부분의 유명 관광지가 몇몇 구역에 몰려 있어서 2박 3일 정도는 시내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Hotel Le Six>라는 작은 호텔인데, 시설도 깨끗하고, 위치도 편리해서 파리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우리는 Chase Sapphire credit card의 포인트를 사용했다.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지만, 적정 가격의 파리 호텔 중 가족 4명이 편안하게 한 방에서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이들이 독감에 걸려 학교도 결석했고, 바로 전날까지도 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동시에 우리가 도착하는 날부터 파리에 줄곧 비 소식이 있어서 일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었지만, 다행히 출발 당일 아이들의 몸 상태도 충분히 회복되었고, 오를리 공항에 도착 후 지내는 동안 파리는 우리에게 파란 하늘을 선물해 주었다. 
 가기 전에 결정된 일정은 도착 다음 날 (4/17, 일요일) 베르사유 궁전(Palace de Versailles) 방문과 여행 중간(4/21, 목요일)에 있을 Family Cruise Lunch 뿐이었기에, 이에 맞춰서 일정을 조정했다. 

4월 15일 금요일 Newark 공항 밤 11시 비행기 출발.

Home to Newark Airport

 처음 이용하는 공항이고, 밤 늦게 출발하는 비행이라 미리 길을 알아보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익숙한(?) PATH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동안 맨하튼에 나갈 때면 PATH로 이어지는 역을 지나쳤을 뿐, PATH를 탄 것도 처음이었다.) 택시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비싸기도 했고, Port Authority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기에, PATH를 통해 공항 가까운 곳에 내린 후 짧은 거리를 택시로 이동했다. 파리 까지는 Frenchbee라는 저가 항공(이라기에는 여전히 비싼)을 이용했다. 제공되는 기내 서비스는 없었지만, 7시간의 비행 시간이 아이들 취침 시간과 겹쳐서 생각보다는 편안한 비행이었다.

4월 16일 토요일 오후 12시 프랑스 파리 Orly 공항에 도착. 

여행 본격 시작! 

16, Sat.
:Place Monge 상점들 골목 - Contrescarpe 작은 광장 - 팡테옹(Pantheon) - Saint-Étienne-du-Mont 성당(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촬영지) - 골목 상점들에서 햄과 바게트를 저녁 거리로 구입.

17, Sun. 
: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 에펠 타워(Tour Eiffel) - Lunch at Le comptoir de la traboule (Modern French Restaurant) - Dinner at Malis(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요리)

18, Mon.
: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 Martin)Place de la République - Lunch at Chez Janou (Bistro) -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집 -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 Merci Store - PIERRE HERMÉ PARIS(Macaron & Cakes)

19, Tue. 
: Hotel Le Six -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 놀이터 - 생제르맹 거리(Bd Saint-Germain) -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 & 카페 드 플로르 (Café de Flore) - Lunch at Saint Pearl - 휴식 at the Hotel - 산책 around Cité - 셰익스피어 서점(Shakespeare and Company)Dinner at Chez Gladines - 노트르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 퐁뇌프(Pont Neuf)
  
20, Wed.
: 몽마르트 언덕(Montmartre); Rue de l'Abreuvoir 거리 -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é-Cœur)Place du Tertre 광장 - Lunch at Crêperie Rozell Café - 사랑의 벽(Le Mur des Je t'aime) -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 뛸르히 가든(Jardin des Tuileries) - 팔레 후와얄 가든(Jardin du Palais-Royal) - 휴식 at the Hotel - Dinner at Chào em (Vietnamese Restaurant) - 개선문(Arc de Triomphe)

21, Thu.
: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 Family Cruise Lunch.

22, Fri.
: 몽수히 공원(Parc Montsouris) Lunch at Bistrotters (Modern French Restaurant)La Grande Epicerie de Paris; Le Bon Marché. / Y & J 동네 놀이터

23, Sat.
: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 Lunch at Bonjour Vietnam - 오를리 공항(Orly Airport)

4월 23일 토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밤 10시 Newark 공항에 도착. 

Home, Sweet Home.

(간단 여행 평)

  • 미술관/박물관/전망대 입장 시에는 돈이 조금 들더라도 (인터넷 예약이 2유로 정도 비싸다.) 입장권을 미리 준비하자. 시간도 아낄 수 있고, 힘들게 긴 줄을 서있을 필요도 없다. 대부분 아이들(18세 이하)은 입장료가 없다.
  • 현금은 100 유로 정도면 충분하다. 거의 모든 곳에서 신용카드를 받는다. 단, American Express를 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해외 사용 수수료가 없는 Visa or Mastercard 신용카드를 준비하자!
  • 맛있는 빵을 많이 먹자. 저렴하다. 뉴욕과 비교하면 1/3 가격으로 매우 훌륭한 빵을 먹을 수 있다. 아래 사진과 같은 표시를 찾아보자. 빵 종류 별로 매년 순위를 매긴다고 하는데, 한 종류의 빵이 1등을 할 정도면 다른 빵들도 대부분 맛있다. 
La Parisienne Madame, Paris

  • 소매치기를 조심하자! 직접 경험했다. 청년 두 명이 2인 1조로 나를 공략하려 했지만, 방어에 성공했기에, 문화 체험(?)이라고 해두자.
  • 파리 사람들은 관광객에 관심이 없다. (뉴욕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친절하지 않다. 많은 경우 불친절하다.(뉴욕 사람들과의 차이!) 그들의 익숙한 삶에 낯설고 새로운 사람(or 그 무엇)이 다가서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또한 뉴욕 사람들과의 큰 차이!) 그러나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옛 모습을 간직한 파리를 즐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지하철 소매치기 방어 후에 매우 친절한 파리지앵 아저씨의 환대를 받았다. 결국 어디나 사람마다 다 다르다.) 
  • 프랑스 음식이 지겨워지면, 베트남 쌀국수를 먹자! 맛있다.
  • 동전으로 5 유로 정도를 가지고 다니자, 혹시나 급박한(?) 상황일 경우 주변 카페의 화장실 이용 시 필요하다고 한다. (난 운 좋게도 친절한 주인을 만나 무료로 사용했다.)
  • 미국/호주 식 카페에서는 차가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스타벅스는 유명 관광지나 호텔 주변에 있다. 
  • 팁 문화는 없다.
  • 파리의 역사와 각 명소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주경철 교수의 책 <도시 여행자를 위한 파리 역사>를 추천한다.

2022년 4월 25일 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4.2022: 레몬 by 권여선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4.2022

<레몬> by 권여선

 평탄하고 평온한, 굴곡 없는 순조로운 삶이 있을까?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상처 입고 해진 삶을 끌어 안은 이들은 그 삶의 특별한 의미를 알게 될까?     
 주어진 세상이고, 던져진 생이다. 견디는 것이 전부일까? 그 굴레와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의 시선이 각 인물들을 향한다. 

 해언과 다언 자매, 
 해언을 바라보던 태림, 
 이 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소외되어 평범한 나머지 무리에 속한 채 혐오감과 안도감(p.36)을 느낀 상희, 
 그저 윤태림의 손길을 기억하는 한만우,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 다언, 
 혜은이를 키우는 자매의 엄마,   
 아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린 신정준,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 불쾌하리 만큼 건조한 시선이 한 소녀의 죽음을 훑고 지나간다. 세상에 문명이 들어선지 오래지만 인간 본성의 밑바닥은 자연을 닮았다. 자신과 무관한, 자기 삶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난 그 순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에 무심하다. 따스한 온기를 몸에 새기고, 질투가 맹목이 되고, 욕망이 들끓고, 생이 몸부림치던 그 순간. 지금껏 이어진, 연속된 시간의 한 토막이 순간의 파편들로 조각나던 그 찰나는 지나갔다. 세상은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친다. 해언이 속옷도 입지 않고 치마를 입은 채 무릎을 약간 벌려 세워 앉아 있듯이 말이다. 
 언니는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했다. 육체가 가진 육중한 숙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외모가 주는 기쁨과 고통을 몰랐다. 언니는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했다. 사람들에게 내보였을 때 유리한 점이 많다는 건 알았기에 때로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외모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몰랐다.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언니는 무심하고 무욕했다. (p.64)

 해언의 죽음. 그 순간의 사라진 조각들을 모아보자. 상상해보자. 신정준은 감히 해언을 범하지 못했다.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속살을, 그저 때가 되어 발갛게 피어오른 그녀의 여성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조차 무심하게 대하는 육체를 그가 무슨 수로 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해언의 아름다움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붓고 저주했을 것이다. 탐할 수 없다면 부숴버리자. 그녀의 무심한 생을 으깨버리자. 

 한 생명이 몸부림치다 부서지고 폭발하던 그 격렬한 순간이 그냥 그렇게 결정됐을 때,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다. 어찌할 도리 없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의 조각들을 찾아다니고 끌어안고 있는 미련한 사람들만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상처를 내고 있을 뿐이다. 그게 생이다. 그런데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신정준은 그 자신의 아이 예빈의 어여쁜 얼굴을 마주하고 조용한 울음으로 몸을 들썩인다. 잠든 그 아이는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없다. 자아를 분리하지 못한 아이는 세상을 모른다. 그 자신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는 무심한 해언의 얼굴을, 순간 자신을 들끓게 한 그녀의 거뭇한 음부를, 세상에 던져지고 방치된 그녀의 아름다움을 떠올렸을 것이다. 

 윤태림은 울고 있는 남편이 무섭다. 그래서 시를 쓴다. 아이를 잃고, 기도하고, 또 시를 쓴다. 자기를 속이고,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만든다. 그녀는 그렇게 시를 쓴다.

 다언은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혜은이를 엄마에게 데려왔지만, 그녀 자신의 삶은 사라졌다. 원한 적 없이 선택한 삶이다.

 한만우는 다리를 잃었다. 골육종이라는 병이 그의 삶에 이유 없이 찾아왔다. 황홀했던 태림의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붙들던 때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생명은 사그라든다.
 
 시간이 흘러 다언을 마주한 상희는 시를 포기했다 말한다. 사랑한 적 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뒤로 흘려 보냈다. 죽음은 언제나 과거형이 되듯, 시를 쓰던 그 시절도 과거형이 되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는 무의미한 상처일까? 무가치한 생일까? 이들이 펼쳐놓은 온갖 흔적과 소음, 버둥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섬세하고 서늘한 문장이 작가의 시선을 작품 속 여기서 저기로, 그녀에게서 그로, 그녀와 그녀 사이로 옮긴다. 세상에 펼쳐진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고요한 눈길이 신중하다. 

2022년 4월 15일 금요일

(Paris, France) 동생 만나러 가기

동생을 만나러 간다. 

그녀의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남편이다.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여가와 관조 #2: 윤석열 대통령.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기대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씨가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서강대 동문회는 공개 지지를 했고(당시 이종욱 총장이 소수의 학생들 앞에서 자화자찬과 함께 박근혜에 대한 찬사를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지만...), 소수의 졸업생 동문들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지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반대를 했던 사람들에게도 각기 저 마다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반대했다. 나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의 근거는 그녀의 태도였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부끄러움 없는 태도. 그 유치함. 그 편협함. 그 오만함. 

 대선 토론에서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 그래서 제가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녜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나는 그녀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이 되었고, 난 기대가 되지 않았다. 

 윤석열 당선자로 눈을 돌린다: "기대가 되지 않는다." 

 '지지 여부를 떠나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는 정치적으로 매우 올바른 말 따위는 남들이 해줄테니, 난 그냥 솔직한 심경을 밝힌다. 

 그동안 그의 언행과 토론에 임하는 태도를 지켜본 봐, 추측하건대 윤석열은 사법고시 합격 후에 제대로 책 한 권을 안 읽어봤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자랑스러운(?) 모교 서울대가 추천하는 필독서 100권 중 10권도 안 읽었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것은 아마도 검사로서의 조직 생활, 검찰 수사, 법률 적용과 관련된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금껏 터득한 그 지식들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리영희 선생이 마주 앉았다던 D 검사가 떠오른다. 

 윤석열은 반지성적이다. 그는 그 어떤 사물, 사건, 사태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자기 확신에 매몰된 채,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자들의 태도는 대부분 비슷하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부끄러움 없는 태도. 그 유치함. 그 편협함. 그 오만함.  

  '나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란다.' 따위의 어설픈 보험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대한민국은 망했어.'와 같은 자포자기도 옳지 못하리라. 단지 개인 윤석열의 대통령직 직무 수행 능력을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현재 Powerball 총 상금이 $288M 이다. 차라리 이를 기대해 본다.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오늘도 난 나의 삶을 살아낸다.

2022년 4월 9일 토요일

(독서) 설계자들 by 김언수


<설계자들> by 김언수

 NYPL에서 주관하는 세계 문학 축제 (NYPL's World Literature Festival International)를 통해 [김언수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듯 하여 책을 집어 들었다. 로렌스(D.H. Lawrence)의 소설을 읽다 말고, 김언수 작가의 책 <설계자들>을 읽는다. 그리고 혼자 묻는다: "현대 소설의 작법은 이런 것인가?" 

 급하게 읽었다. 영화 시나리오 한편을 읽은 기분이다.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보니 차라리 영화 한편을 본 기분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급하게 읽었다."는 틀린 표현이다. "빠르게 혹은 급하게(?) 읽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듯 하다. 이야기의 진행은 막힘이 없고, 그가 창조한 세계는 익숙하며 낯설다. 작가의 노력 덕분인지 '익숙함'이 먼저 다가온다.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가 드러나는 작품은 아니지만, 작가가 창조한 공간과 그 안의 인물들은 꽤 매력적이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에 막힘이 없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소설의 한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대체될 때면 이전 장소 속의 인물들이 암막커튼 뒤로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물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지 않다. 작가가 창조한 매력적인 인물들은 더 매력적일 수 있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다가 지나온 장면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자 책장을 뒤로 넘기거나, 그 장면을 곱씹어보기 위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게 할 만큼의 매력은 없었다는 말이다. 가령 추가 놓고 간 독일제 헨켈 부엌칼이 래생의 손에 들렸을 때, 이 소품은 인물에 매력을 부여하지만, 이는 그저 그 순간의 매력에 그친다. 시종일관 냉소적인 래생의 말투도 마찬가지다. 그가 미토와 사팔뜨기 사서를 '쪼다'와 '등신'이라 말하는 장면(p.614)은 조금 지겹기까지 했다. 이는 아마도 책 전반에 걸쳐 래생에 대한 묘사가 단조롭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책을 읽는 암살자' 정도로 기억될 뿐이다. 오히려 그의 친구이자, 지질학을 전공한 트래커 정안을 둘러싼 서사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래생이라는 인물에게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공과 함께한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암살자의 습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과잉과 결여의 모습 등을 더 상세히 다루었다면, 혹은 미사와의 교류 속에서 미묘하게 변한 래생의 감정선을 좀 더 정교하고 미세하게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래생을 단조롭게 묘사한 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채색 배경을 지닌 특색 없고 지루한 암살자. 현실의 뒷골목이 세상의 어둠 속에 묻혀있기 위해서는 결코 매력적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세계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무지해야 한다.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라야 한다.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데 무엇하러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를 고민하겠는가. 그러니 모두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울타리 속에서만 꼼지락거리며 일을 한다. 그 작은 울타리들이 모여서 터무니없이 크고 복잡한 커넥션과 수많은 이해관계들이 얽힌 설계가 탄생한다.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