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여가와 관조 #3: 선거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너와 나의 생각은 서로 다르고, 그렇기에 너와 내가 봐라보는 사실도 서로 다르다. 

나는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철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가졌던 '정치 철학'도 결국 '철학'에 방점이 찍혀있다. 따라서 현실 정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지극히 평범하다. 여전히 '비판적 지지'의 기능을 신뢰하며, 정치 과정의 역동성을 지지하면서도 충돌과 조화를 동반하는 끊임없는 대화를 기대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나의 태도가 꽤 보수적인 입장일 것이다.

아무튼...

'윤석열' 대통령. 그는 적법한 절차에 의해 당선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그의 반지성적 태도와 언행을 보고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2024년 3월 27일.

바다 건너 먼 곳에 살고 있지만 (예전 만큼의 강도는 아니지만...이곳도 복잡한 일들이 넘쳐나기에...) 여전히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는 한명의 시민으로서 투표를 마쳤다. 엄청나게 긴 비례정당 투표지와 매우 짧은 지역 국회의원 투표지를 마주하고 고민없이 도장을 찍었다. 윤석렬 대통령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남은 임기 동안에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기에 이번 선거는 나의 실망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홀로 몇몇 물음을 던져본다.

'투표는 개인들의 사적이익을 표출하는 수단일까?'
'지지하는 정당의 승패에 따른 자존심의 문제일까?'
'공공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표를 던지는 시민들도 있을까?'
'대의 민주주의, 그 이후의 새로운 방향은 가능할까?'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책무를 내려놓았고, 그들에게 대중은 통제하고 유인하는 대상이었다. 권력은 언론을 길들이고,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지 않았다. 무너져버린 것은 그들의 권위가 아니라, 시민들의 연대였다. 애초에 그들은 권위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시민 사회의 연대는 희미해지고, 적대와 갈등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은 더 이상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한 공동체의 지도자는 최소한의 지적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적능력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새로운 시각과 개방성을 동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윤석열 본인은 물론이고, 현 정부 관계자들은 지적으로 뒤떨어진다. 그렇기에 기대가 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본 한국의 정치 대부분은 어이가 없었고, 가끔 분노를 느꼈다.  

윤석열은 박근혜와는 다르다. 사실 그는 정치적 자산이 없다. (본인 아버지에 대한 열성적 지지를 정치적 자산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번 선거가 '윤석열 정부 심판'이라는 틀에서 치뤄진다면 현 여당의 의석은 100석도 넘기기 쉽지 않으리라 짐작해본다. 

감정이 요동치는 정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냉소만이 남는 정치는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표를 던졌다.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독서) 재수사 by 장강명



<재수사> by 장강명

 사실-상상 복합체, 현실과 물리세계, 사건과 의미, 객관과 주관,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신계몽주의, 그리고 점박이.

 민소림의 죽음은 우발적이었다. 찰나의 모멸감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긴다. 급작스런 살인. 그러나 과연 예측할 수 없었던 살인이었는가? '나는 병든 인간이다....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대학시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독서 모임의 공고문과 가슴팍을 칼에 찔린 채 살인자를 향해 내뱉는 민소림의 '네가 감히?'라는 눈빛은 묘하게 사건의 진실을 향한다. 

 우월감-열등감, 찬양-모멸, 애-증, 미-추, 너-나, 그렇게 민소림-살인자는 한쌍을 이룬다. 각 개념의 짝은 정반대의 뜻을 지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의미가 뒤섞이고 교차한다. 한쌍 개념들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떨어질 수 없는, 모순을 견디는, 보다 친밀한. 논리는 논리의 세계만을 구축할 뿐, 현실을 담아낼 수 없듯, 현실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새로운 사상이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점박이.

 작품 속 민소림의 아름다움을 접하며,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해언을 떠올린다. 물론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

 민소림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할 줄 안다. 그것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몸이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즐긴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 깊숙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새겨놓는다. 섹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이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권여선 작가의 작품 <레몬>에 등장하는 인물 '해언'은 자신의 신체,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가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해언의 아름다움은 초월적이다. 

 민소림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들을 위해 (작품의 배경은 1990년대 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해언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 속 여인으로 머문다.     

 그리고 점박이. 

 우리는 민소림의 의도를 알 수 없다. 그저 짐작하고 해석할 뿐이다. 그것은 애정과 신뢰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오만과 경멸의 표현이었을까? 어쩌면 전혀 다른 성질의 감정과 태도가 섞여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자도 그저 짐작하고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것은 살인자 본인에게도 급작스레 일어난 사건이다. 모멸감이 해소되었을까? 멈춰버린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찬양과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내'가 저지른 살인은 정당한 것일까? 이 세상은 '나'에게 정의로웠던가? 그렇게 20년 동안 이어온 살인자 개인의 사유가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만나는 순간, 즉 관념과 실체의 어지러운 충돌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   


형의 추천.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살펴보면, 그 중 현대 소설의 비중은 꽤 낮은 편이다. 그나마 읽은 최근 소설들도 대부분 1940~1970년대 작품들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형의 책장에서 꽤 많은 장강명 작가의 책들과 조우했다. 

형의 추천으로 바다 건너 멀리 가지고 온 책: <재수사>  

 형의 독서 취향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꽤 있기에,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거야."라는 형의 평을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읽기를 잠시 멈추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책의 뼈대를 이루는 소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점. 작품 속에 등장하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개념: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이메일로 보내주신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비슷한 관점으로 답변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으로 트롤리 딜레마는 공리주의와 도덕적 의무론의 차이를 드러내는 사고실험인데, 당시 내가 교수님께 드렸던 답변이 장강명 작가의 '도덕적 책임의 원근법'과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답변은 주체의 도덕적 인식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와 더 가까운 타인의 도덕적 요구/요청이 어떤 도덕적 틀을 사용할지 결정짓는다는 요지의 답이었다.

 미스터리와 지적유희가 어우러진 작품 덕분에, 겨울 방학 학과 사무실의 고요함을 지워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제시 한'의 체포 장면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2024년 1월 10일 수요일

그녀의 모임

<The Legend of Zelda: Tears of the Kingdom>


오늘(Jan.9 2024)  Y는 학교 소모임에 가입했다: <Zelda Club>

젤다와 관련된 몇몇의 문제를 맞히고 당당히 가입했다. 

그녀는 현재 <야생의 숨결>을 하고 있으며, 새롭게 <동물의 숲> 섬을 꾸미고 있고, <포켓몬 레전드 아르세우스>에서 포켓몬들을 잡고 있다.

그녀는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