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5. 2023
<세월; Les Annees> by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 신유진 역 |
사물과 사건, 그 역사에 관한 기억의 단절은 시간과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계급, 언어, 문화, 그리고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침투해 온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언한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p.8)
개인의 단편적 장면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도 역사적 시-공간 안에서 공동체의 기억, 모두의 유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다시 또 멀어진다. 그렇기에 그녀는 응시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것이 결국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 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p.223, emphasis mine.)
지금껏 이어져 온 기억, 그러나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어낸다. 그 간극은 우연하기에 급작스럽다: 기성 세대-전후 세대, 학교-집, 남성-여성, 섹스-낙태, 노동자-부르주아, 종교-아노미, 혁명-상품, 정치-자본.
그러나 우리는 부모들과 다르게, 유채 씨를 뿌리거나 사과를 흔들어 따거나 죽은 나뭇가지로 단을 묶기 위해 학교에 결석하지는 않았다. 학교 일정표가 계절의 주기를 대신했다. (...) 집에 돌아오자 마자 자연스럽게 원래의 언어를 되찾았다.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면 되는 몸에 밴 언어, 양쪽 따귀와 블라우스의 자벨수 냄새, 겨울 동안 구운 사과, 양동이로 떨어지는 오줌 소리 그리고 부모의 코골이와 엮여 있는 그 언어를 되찾았다. (pp.36-37)
사진 속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두 명의 여자애들은 부르주아 층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여자애들과 다르며, 더 강하고 더 외롭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너무 자주 어울리고 함께 파티에 다니면서 자신이 타락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노동의 세계나 부모님의 작은 상점과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다른 세계로 넘어왔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지나온 인생은 관련성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단지 지식과 문화 속에만 있을 뿐. (p.104-105)
전쟁에 대한 언급은 50세 이상의 입에서 나오는 허영심 넘치는 개인적인 일화로 축소됐고, 30세 이하는 그것을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로 여겼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추모사와 꽃다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p.116)
그 누구도 도저히 이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녀도 그저 한 명의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수치스러울 만큼 솔직한 자기 고백이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허위 의식이 선사한 우월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나'라는 존재의 맹렬함과 허무함을 인정한다.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을 향한다. 나는 '나'를 표상한다. 동시에 '세계'로 이행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이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기억은 성적 욕망처럼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망자와 산자를, 실존하는 존재와 상상의 존재를, 꿈과 역사를 결합한다. (pp.11-12)
교육을 찬양하는 말 속에는 어디에나 인색한 분배가 감춰져 있었다. (p.55)
우리는 바칼로레아의 성공으로 사회적인 존재감을 부여받았다. (p.83)
그 흐름의 방향과 속도를 앞설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단단하고, 또 단순했다. 사회가 할당한 요구를 충족시킨 개인들은 손쉽게 통합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p.81), 텔레비전을 샀고(p.112), 어떤 이들은 농부에게 헐값으로 낡은 집을 사기도 했다(p.140). 동시에 그녀는-발칙하게도(?) -혁명을 꿈꿨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33)
그러나 세계는 생각보다 치밀했고, 유연했다. 딱딱한 정치는 흘러가고, 말랑말랑한 상품이 빈 자리를 채웠다. 존재의 결핍을 악(惡)으로 규정했던 철학은 시대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대신 존재(상품)의 과잉이 세상을 뒤엎는다. 그리고 과잉은 곧 소멸을 동반한다.
넘치는 물건들은 생각의 결핍과 믿음의 소모를 감췄다. (p.109)
시장경제의 질서가 강화됐고 숨 가쁜 리듬이 강요됐다. 바코드를 갖춘 구매품들은 은밀한 신호음 속에 일초 만에 가격으로 넘어가며, 계산대에서 카트까지 더 신속하게 통과했다. (...) 물건들의 시간은 우리를 빨아들였고, 우리는 끊임없이 두 달을 앞서 살아야 했다. (p.246)
결국 자본이 시간을 손에 넣었고, 개인은 상품 속에서 충만감을 느낀다. 상품이 가벼워지듯, 모든 사물과 사건, 이를 담아내던 언어와 기억은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은 그토록 처절하게, 손에서 빠져나간 그 모든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과 기억의 틈. 그 단절의 간극까지도.
쉬운 글은 아니다. 작가의 기억은 치밀했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글은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기억을 뒤덮은 흙 먼지를 고운 붓으로 털어내는 작업은 지루하고, 텁텁하다.
사르트르 <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부르디유 <문화 자본, 아비투스 개념>.
책장을 넘기며 이 모두를 떠올린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좌절하고,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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