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5일 금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10.2021: 포노 사피엔스; Phono-sapiens by 최재붕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10. 2021

<포노 사피엔스> by 최재붕

 흥미로운 주제의 책을 읽었다. 저자는 포노 사피엔스(Phono-Sapiens), '전화기(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며 책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나 뒤따르는 내용은 진부하다. 책이 나온 지 2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도 책 속에 나열된 사례들은 전혀 신선하지 않다. 이건 아마도 이 책이 상정하고 있는 독자가 매우 좁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한국에 살고 있는, 스마트폰이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50~60대?)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갖는 한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저자가 내세우는 주장들과 개념들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너무 빈약하다. 가령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하고 있는 오늘 날의 혁명적 변화 -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디지털 문명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 혁명 - 에 관한 비판적 물음은 배제되어 있다.: '정말로 자발적인가?' 또는 '정말로 소비자가 시장의 권력을 획득하였는가?' 등의 물음이 전혀 없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단, 매일같이 반복되던 대중 의식의 형성 과정이 사라졌습니다. (...) 그래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을 보고 복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각은 모두 개인화 되었습니다. (...) 정보 선택권을 가진 인류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선택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새로운 기준이 등장한 탓입니다. (p.26)

(가능한 반론)

  • 자기가 좋아하는 정보만을 보고 복제함으로써 매우 독단적이고 고립된 대중 의식이 형성되었다. 즉, 무비판적으로 형성되고 개인화된 생각은 독단적 가치체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좁은 우리'가 등장한다. ex) 일베, 극단적 페미니즘, 극우 파시즘, 급진화된 세력, 네오 나치 등.
  • '선택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인식은 결코 소비자에게 권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비자에게 '선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강요와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또한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역전 현상이 시장 독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구조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책 속에 열거된 사례들이 철저히 시장/기업 중심적이고, 또한 철저히 사용자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오로지 시장에서의 성과와 이익에 국한되어 있다. 아마도 저자는 2021년 구글(Google)에 노조가 생길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1) 또한 2017년에 우버(Uber)의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조직 문화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제기 되었다는 사실(2&3)을 돌아본다면 저자의 시장 혁명과 새로운 조직 문화에 대한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주장, "디지털 문화 부작용 이면의 놀라운 잠재력 (본문에는  '부작용의 편견 뒤에는...'이라고 되어 있다. '편견'이라는 단어 선택에 이미 저자의 편향된 시각이 드러난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말은 충분히 되새겨 들어야 할 가치가 있지만, 균형 잡힌 시각을 동반하지 않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저자가 디지털 문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고 있는 스마트폰/디지털 문명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게임 중독, 피상적 인간관계, 정부 규제 등)과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에 대한 불신/불만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수아비 때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치 vs 경제'라는 도식을 '규제 vs 혁신'으로 치환함으로써 저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시급성을 드러내고 타당성을 얻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논증이다. 개인은 시장의 소비자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안의 시민이다. 둘 중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적어도 시민으로서의 역할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시즘은 사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 (<이성과 혁명> 중.)"라는 마르쿠제의 지적을 상기해본다.) 
  오히려 저자가 공공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변화 -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디지털 문화와 그것이 활용하고 있는 데이터 기술이 기존의 질서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시장 혁명을 통한 구조적 변화가 기존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디지털 문명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는 어떤 사회/문화적 계층을 형성할 것 인지 등 - 에 대한 시각을 함께 다루었다면 좀 더 균형 잡힌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마무리 하며 저자는 기성 세대의 성과와 그 동안 축적되어 온 기술, 그리고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디지털 문명 속의 생존 전략을 제시한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좁은 시선이 이미 책 전체의 뼈대를 흔들어 버렸기에 책의 맺음말은 허무하다. 또한 내용 곳곳에 등장하는 진화론, 세대 담론, 인문학(호모 루덴스/인의예지) 등 다른 분야의 개념들을 포노 사피엔스라는 새로운 개념과 억지스럽고 어설프게 연결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대중 교양 서적을 통해 독자에게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사고(한때 '통섭'이 유행했었지...)를 보여주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지만, 때로는 전문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바람직할 때도 있다.: 
  • 디지털 문명을 선도하고 있는 기업들의 차별화된 조직 문화.
  • 디지털 문화를 소비하는 개별 사용자들에 대한 데이터 수집 방법과 활용 방식.
  • 혁명이라 부를 정도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통찰, 혹은 드러나는 윤리적 문제들.
  • 기존의 것을 대체하며 등장한 새로운 가치/체계/패러다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주장이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지점에 대한 물음, 즉 '오늘 날의 변화를 과연 '혁명'이라 명명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라고 여길만한 것은 그저 새롭게 등장한 기업들의 매출액/시가총액/투자금/시장 점유율의 나열 뿐이다.
 
 개인적으로 산업혁명은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 산업혁명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정치/경제 질서를 무너트렸고, 부르주아와 도시 노동자라는 정치/경제 계급이 등장하였고, 상품 생산 방식이 변했고, 새로운 공간(도시)이 출현했다. 이후의 2차, 3차, 그리고 이 책 속의 4차 산업혁명은 그로부터의 (괄목할 만한) 발전 정도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진행 중인 변화가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의 해결이 수반되어야 한다.
  • 새로운 공간의 창출/발견.
  •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한계(죽음)의 극복.
  • 희소성 문제 해결. 
 시장에서의 경제적 성과가 곧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그것의 결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뤄내야 한다. 즉 인간 의식/존재 방식의 변화 없이는 혁명이라 부르기 어렵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물결/혁명을 기대하기에는 이 책의 시선이 너무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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