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3일 화요일

대화의 가치(The Value of Conversation)

이론(theory)과 실천(practice)의 관계는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다. 양자 간의 관계에서 어느 곳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그 철학의 모습이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큰 틀에서 보자면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논의는 이론적인 작업이다. 기존 개념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 새로운 개념의 창조, 개념들의 실천적 사용과 적용에 관한 논의.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모든 이론적 작업은 언제나 실천적 모습으로 드러난다. 글과 말을 통해, 비판과 논쟁을 통해, 소통과 교류를 통해서 하나의 이론이 탄생하고, 다듬어지고, 발전하고, 반증되고, 사라진다. 그렇기에 모든 철학의 태동은 언제나 삶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정도의 차가 있으나) 모든 철학적 논의는 대화를 통해 시작되었다.

앞서 <편견의 가치>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아렌트의 지적을 상기해보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설립은 곧 서구철학이 사유(이론)와 행위(실천)의 영역 - 아렌트는 그녀의 철학에서 이를 크게 철학과 정치 영역의 분리됨으로 보고 있다. - 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Today we know that Plato and Aristotle were the culmination rather than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which had begun its flight when Greece had reached or nearly reached its climax. What remains true, however, is that Plato as well as Aristotle became the beginning of the occidental philosophic tradition, and that this beginning, as distinguished from the beginning of Greek philosophic thought, occurred when Greek political life was indeed approaching its end…Even more serious was the abyss which immediately opened between thought and action, and which never since has been closed. All thinking activity that is not simply the calculation of means to obtain an intended or willed end, but is concerned with meaning in the most general sense, came to play the role of an “afterthought,” that is, after action had decided and determined reality. Action, on the other hand, was relegated to the meaningless realm of the accidental and haphazard. (Hannah Arendt, The Promise of Politics. pp.5-6)

소크라테스의 고백 -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 은 어느 누구도 절대적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이 고백은 그 자신이 철학자로서, 그리고 정치 공동체(polis)의 일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다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자의 역할은 폴리스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이 아닌,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시민들의 진실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일,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철학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죽었다. 안타깝다.) 그러나 폴리스로 부터 유리된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지식(episteme)의 정당성을 실천(praxis)의 영역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식은 이성을 통한 관조만으로도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주체(나)의 사유만을 통해 지식의 절대적 토대를 찾고, 객체(대상)를 주체의 보편적 개념틀 안에서 표상하였다. 주체는 인식대상을 자신의 이성 안으로 포섭하려는 시도 속에서 지식의 보편적 정당성을 얻으려하고, 그 지식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다시 말해, 주체는 객체와의 대립적 관계(confrontation) 속 에서 지식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결국 인식론적 특권은 '객체와 대립하고 있는 주체'에게 귀속되었다. 아렌트는 주장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철학의 시작이 아닌, 끝으로 향하는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철학의 시작이었다." 대화를 잊은 '객체와 대립하는 주체'의 시작. 이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도전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논의를 이끌어 간 철학자는 바로 로티(Richard Rorty)다.

로티가 그의 철학 전반에 걸쳐 비판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분석(analytic)-종합(synthetic), 마음(ideas)-대상(objects), 주체(the knowing)-객체(the known), 그리고 이론(theory)-실천(practice). 로티는 이러한 이분법적 도식을 전복하려 한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confrontation)을 참여자들 간의 대화(conversation)로, 지식의 객관성(objectivity)를 공동체의 연대성(solidarity)으로 교체함으로써:

I shall be arguing that their [Sellars and Quine's] holism is a product of their commitment to the thesis that justification is not a matter of a special relation between ideas (or words) and objects, but of conversation, of social practice…Once conversation replaces confrontation, the notion of the mind as Mirror of Nature can be discarded. (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170.)

로티가 그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을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영미분석철학계의 총아가 배신자가 되다니!"

로티는 기존의 체계적 철학, 즉 대문자 P로 시작하는 철학(Philosophy with a capital P)을 거부한다. 철학은 더 이상 거대 형이상학적 담론의 생산지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진리 추구자로서의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비평가("a kibitzer or a therapist or an intellectual historian" in Consequences of Pragmatism)가 되기를 요구한다.

This does not mean that they (pragmatists) have a new, non-Platonic set of answers to Platonic questions to offer, but rather that they do not think we should ask those questions anymore…They would simply like to change the subject…Pragmatists are saying that the best hope for philosophy is not to practice Philosophy. (Ibid. xiv-xv. emphasis mine.)

그는 기존 철학의 '인식론적 작업과 이론적 개념'이 '사회적 합의와 실천'으로 대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철학의 기획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할 수 있는 개방된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티는 기존의 실용주의적 관점, 즉 이론과 실천 영역을 이으려는 노력을 굉징히 급진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기존 철학들의 이론적 작업, 더 나아가 이론영역 그 자체에 의문 부호를 던진다. 로티는 우리의 그 어떤 문제들도 사회적 실천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론적 객관성(epistemic objectivity)이 아닌, 사회적 연대성(social solidarity)이 된다.

로티의 실용주의가 지닌 이러한 급진성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기존의 이론영역과 인식론적 개념들에 대한 그의 성급한 폐기 주장은, 오히려 기존 철학들에 대한 실용주의의 가장 큰 비판, 즉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묻는다. '모든 사건과 사태가 사회적 사안으로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로티 그 자신이 주장한 대로 새로운 철학적 작업이 다양한 목소리를 위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라면, 기존 철학의 목소리가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은 그의 글 "One Step Forward, Two Steps Backwar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It is time that Rorty himself should appropriate the lesson of Peirce, “Do not block the road to inquiry,” and realize that rarified metaphilosophical or metatheoretical discussion can never be a substitute for struggling to articulate, defend, and justify one’s vision of a just and good society. (Richard Bernstein, The New Constellation. p.253.)

분명 로티의 철학은 급진적이다. 그래서 그의 요구는 성가시다. 그러나 실천과 행위의 영역, 즉 공동체 속 참여자들의 대화를 다시금 철학의 장 안으로 이끌려 한 그의 주장은 또한 분명 유의미하다. 대화가 지닌 개방성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품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소리들을 통해 다양한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시작점을 얻는다. 따라서 대화는 이론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대화는 이론의 과정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론적 작업이 곧 실천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모든 탐구는 편견으로 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 얻어진 지식은 언제나 잠정적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지식은 틀릴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는 실용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렇기에 로티의 철학은 실용주의의 정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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