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sophical Investigations> by Ludwig Wittgenstein |
(##1-64)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고백록; Confessions>을 인용하여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고 싶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These words, it seems to me, give us a particular picture of the essence of human language. It is this: the words in language name objects a sentences are combinations of such names. —– In this picture of language we find the roots of the following idea: Every word has a meaning. This meaning is correlated with the word. It is the object for which the word stands. (#1b, emphasis mine.)
언어가 지닌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 낱말과 의미의 단칭적 관계, 낱말이 부여한 대상의 이름, 그리고 대상과 낱말의 대응적 관계가 보여주는 특정한 그림. 이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저서 <논고>를 겨냥한 것인가? (small-picture reading) 또는 책 전반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 수 많은 철학적 편견/독단의 구조를 조망하고 있는 것인가?(big-picture reading)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일면만을 오독하고 허수아비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d에서 제시된, 매우 단순화한 언어-게임(language-game) 속 목소리: "Well, I assume that he acts as I have described. Explanations come to an end somewhere.(#1d, emphasis mine.)"는 비트겐슈타인을 행동주의자(behaviorist)로 만드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 그 특정한 문맥 속 [낱말-대상]의 지칭적 관계를 언어의 보편적 구조로 확정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I do not wat to call this "ostensive explanation" or "definition", because the child cannot as yet ask what the name is. I'll call it "ostensive teaching of words". (...) No doubt it was the ostensive teaching that helped to bring this about; but only together with a particular kind of instruction. With different instruction the same ostensive teaching of these words would have effected a quite different understanding.(#6)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언어 학습은 한 단어에 대한 "지칭적 가르침"이다. 그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문맥/배경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I shall also call the whole, consisting of language and the activities into which it is woven, a “language-game”. (#7)
언어-게임은 고립된 언어가 아니다. 각각의 게임이 그러하듯, 언어도 특정한 양식, 패턴, 규칙, 배경을 지닌다. 즉 언어의 사용 방식은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을 낳는다.
And this diversity is not something fixed, given once for all; but new types of language, new language-games, as we may say, come into existence, and others become obsolete and get forgotten. (We can get a rough picture of this from the changes in mathematics.) The word “language-game” is used here to emphasize the fact that the speaking of language is part of an activity, or of a form of life. (#23, emphasis mine.)
이와 마찬가지로 "지시적 정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28) 쓰임을 배제한 [낱말-대상]의 지칭적 정의는 무한 퇴행을 야기한다. 이는 마치 모르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전을 찾는 일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쓰임을 배제한 채, 그것의 보편적/이상적 논리 구조를 형이상학적으로 추출할 수 없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활동/삶의 형식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역할, 즉 "느슨한 선험적 기능; loose apriority"을 담당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칸트(I.Kant) 식의 특정한 "정신적 작용; mental-process or mind"과 같은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를 개인들의 범위를 넘어선 공동체의 규약/합의(the communal agreement beyond the reach of individuals)로 해석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본다.
#39의 한 문장: 이름은 실제로 단순한 것을 지시해야 한다.; A name ought really to signify a simple.(#39)
이 문장은 언어-게임의 논리적 구조가 <논고>에서 제시된 그림 이론과 배치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다. 단어가 문장을 구성하듯, 단순한 것(simples)은 우리 언어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복합적인 것(composite)을 구성한다. 그러나 '단순' 또는 '복합'이라는 개념조차도 문맥 의존적이다.
We use the word “composite” (and therefore the word “simple”) in an enormous number of different and differently related ways. (#47)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명할 수 밖에 없는 '요소(primary element)'는 마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는 듯 보인다. 이는 순수한 언어, 이에 대응하는 단일한 논리 구조를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환상/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We can put it like this: This sample is an instrument of the language, by means of which we make colour statements. In this game, it is not something that is represented, but is a means of representation. (...) What looks as if it had to exist is part of the language. It is a paradigm in our game; something with which comparisons are made. (#51)
언어의 단일한 구성 요소가 언어 전체의 토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지칭적 정의/설명 또는 가르침"은 언어-게임의 한 부분으로써 작동한다. 그것은 고정된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다. 언어-게임의 범례(paradigm)는 고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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