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6일 화요일

오류의 가치(The Value of Error)

퍼스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 실제로 그는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자기 철학에 대한 왜곡과 오해라고 생각하였다. -, 실용주의는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며 발전했다. 이처럼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면서도 그들이 '실용주의자'로 묶일 수 있는, 그들이 함께 자라날 수 있었던 토양은 무엇이었을까? 퍼스가 철학적 탐구의 배경지식으로서 편견을 재해석하고, 절대적 진리의 발견이 아닌 상호 대립적인 의견들의 지속적인 재조정을 철학적 탐구의 목표로 삼았을 때, 철학은 '나'의 고립으로 부터 '우리'의 개방으로 이행하였으며, 이는 곧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실용주의는 다음과 같은 개념/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편견/의견(prejudices/opinion),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quiry),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 이론과 실천의 관계(theory and practice). 그리고 실용주의가 이러한 주제들로 부터 다양한 조류를 형성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토양은 이 철학이 지닌 개방성(openness)에서 찾을 수 있다.

실용주의의 '개방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허울 좋은 포장지가 아니다.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하는 것은 실용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실천적 의무이자, 동시에 인식론적 의무이다. 이는 철학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용인하고 (퍼스는 이게 너무 괴로워서 pragmaticism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나 보다.), 공통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기꺼이 대화의 상대가 되고자 하는 자세이다. 더불어 이러한 실용주의의 개방성은 하나의 주장이 타당한 이유에 의해 도전 받고, 비판 받고, 더 나아가 거부될 수 있다는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의 근거가 된다.

개방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오류가능주의는 회의주의(skepticism)와 분명히 구분된다. 현대과학에 익숙한 오늘날의 회의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악신이라는 유령학적 개념보다는 통속의 뇌(Brain-in-a-Vat)라는 사고실험을 선호한다. 이들은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적 믿음들에 - 가령, '내가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창 밖의 나무를 보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신체가 있다.' - 의문부호를 붙인다. 극단적 형태의 회의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 될 수 있다.

(S-1) There is nothing we can call knowledge, because we can never be justified in believing.

이러한 형태의 회의주의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논박적이다. 만일 (S-1)이 참이라면, 이는 회의주의 논증 그 자체의 정당화 가능성마저 부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회의론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논증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그 논증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제한시킬 필요가 있다. 실제로 외부세계 회의론자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오류가능주의를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실용주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인 반회의주의(anti-skepticism)의 출발점이 된다.

오류가능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우리의 지식은 절대적 확실성을 담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식은 언제나 새로운 반증과 비판, 더 나아가 폐기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 지식의 정당화 과정은 언제든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류가능주의와 회의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이론적 구조 안에 개방성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에 놓여있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우리도 믿음(belief) 차원에서는 오류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오류 가능성을 담보한 정당화된 지식(knowledge)은 불가능하다.' 즉, 그들은 지식의 정당화 과정에 있어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한다.

(S-2)
(1) In order to know that P, P must be justified to degree N.
(2) P is not justified to degree N.
Therefore,
(3) We do not know that P. 

회의주의의 약화된 논증 (S-2)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to degree N)'라는 표현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인가? 회의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P를 알기 위한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P를 알 수 없다.'

만일 이들이 오류가능주의의 지식개념, 즉 잠정적으로 정당화된 믿음(provisionally justified belief)에 만족한다면, 오류가능주의를 못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오류가능주의와 선을 그을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적어도 N 정도의 확실성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지식은 불안하다. 그리고 회의론자들은 이 불안을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N 정도의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P를 지식이라 할 수 없다.'

이는 회의주의가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의 데카르트적 불안(Cartesian anxiety) 개념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Either there is some support for our being, a fixed foundation for our knowledge, or we cannot escape the forces of darkness that envelop us with madness, with intellectual and moral chaos. (Bernstein, Richard, Beyond Objectivism and Relativism p.18.)  

그리고 이러한 회의주의의 데카르트적 불안은 그들이 지닌 주관주의(subjectivism)와 연결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실용주의는 개별 주체 '나'의 인식적 특권을 탐구자들의 공동체(a community of inquirers)인 '우리'에게 귀속시킴으로써 '틀릴 수도 있음'을 수용한다. 개별주체는 더 이상 지식/진리에 대한 마지막 심판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정한 편견을 배경지식으로 삼아 탐구과정에 참여한다. 탐구과정을 통해 확립된 우리의 지식은 잠정적이다. 현재의 지식은 언제든지 다음 탐구과정의 배경지식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확실성 보다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Despite Peirce's insistence on fallibilism, he is far from being an epistemological pessimist or sceptic: indeed, he is quite the opposite. He tends to hold that every genuine question (that is, every question whose possible answers have empirical content) can be answered in principle, or at least should not be assumed to be unanswerable. For this reason, one his most important dicta, which he called his first principle of reason, is “Do not block the way of inquiry!” (Robert Burch, "Charles Sanders Peirc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0 Edition)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개방적 탐구과정 안에서 활력을 얻는다.그렇기에 오류는 결코 부정적 개념으로서만 수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충돌과 갈등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탐구와 대화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댓글 1개:

  1. 이 글은 석사학위 소논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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