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듣고 싶다.

 Yo La Tengo & Teenage Fanclub

서울 집 내 작은 방 침대 위에 놓여있는 수 많은 앨범들 중에서도 이 두 밴드의 앨범을 찾아서 차례로 듣고 싶다. 

<Season of the shark>를 열 번 정도 돌려 듣고, 

<Sometimes I don't need to believe in anything>을 또 열 번 정도 돌려 듣고,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 한 병을 꺼내 들고 두어 모금을 홀짝 거리다가 '이런...역시...'라는 표정으로 남은 맥주를 싱크대에 쏟아 버리면서,  

멍 때리면서, 듣고 싶다. 

2021년 1월 15일 금요일

2020년 12월 31일 목요일

이천이십년은 말이야.

이천이십년은 말이지.

지루하고 길게 늘어진 하루하루가 뭉쳐져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일주일을 만들고, 한달을 보내고, 일년을 끝내더라고. 

식탁 위에 놓인, 먹고 배탈난 인절미를 마구 짓누르는 기분이 이럴거야.

아무튼 그렇더라고. 

언젠가 되돌아 보면, 미치도록 그립지만 꼴보기 싫은 그런 일년이 될거같아.

안녕 2020.

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New York City 12: Culture_영화 <미나리>

 


<미나리; MINARI, 2020>

"포스터를 보라. 성조기가 걸려있다. 이건 미국 영화잖아!"

영화 <미나리>에 대한 논쟁이 있다.: <여기>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Awards)는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렇다면 영화 <아포칼립토>는 마야 영화인가?"

당신이 미국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차별과 폭력을 당해봐야 한다. 차별 받지 않고 우연히 또는 너무 쉽게(?) 얻어낸 시민권은 결코 당신에게 소속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와서 시민권자가 된다면? 뭐가 달라질까? 

아이와 함께 125가(125th Street, co-named Martin Luther King Jr. Boulevard in NYC)를 지나가고 있을 때 다가온 할아버지의 말이 기억난다.

"They are so cute. They don't look different to me. We are all the same."

 그는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견뎌왔을까? 

여가와 관조 #1: 조국 전 장관, 윤석열 검찰총장, 그리고 슬픔.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정경심 교수와 그의 딸 조모씨 (결국은 조국 전 장관) 에게는 죄를 물었고, 윤석열 검찰총장은 돌아왔다. 한쪽에서는 성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식을 반겼다. 이 밖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아웅다웅, 얽히고설켜 말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살며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소식을 접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사법부마저 스스로 신뢰를 잃어버린 암담한 상황,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검찰 개혁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했다. - 물론 나와 같은 일반 시민들은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충돌, 타협, 투쟁을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 적어도 나의 눈에는 차근 차근 미리 준비한 계획에 맞춰 진행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듯, 이런 저런 참가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충돌은 점차 격화 되었고, 지금은 그 시작점도, 가치판단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지금껏 합의하여 마련해 온 규범과 규칙을 적용하고, 이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현재의 모든 상황은 권력투쟁의 결과물이고, 권력투쟁은 계속된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문재인 정부는 수세에 몰렸고, 검찰과 사법부의 기득권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나는 이 사실이 슬프다. '슬프다'는 나의 감정은 가치판단이 배제되어있다. 

내가 옳고-그름의 기준으로 이 사항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담담한 사과의 말 - 자신의 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가치,  지나치게 관대했던 자신의 태도 (혹은 무관심),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실망하였음을 알고 있다는 - 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정치세력 간의 순수한 권력투쟁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서로 물고 뜯어가며 외쳐대는 말들은 언제나 <옳고-그름>의 틀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넌 뭐 깨끗하냐?" 그렇다. 원래 날 것의 욕망에서 비롯된 싸움일수록 유치한 법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참가자들 중 품위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또한 조국이었다. (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권력투쟁'의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부터, 논리는 단순해지기 시작했고, 편가르기는 더욱 쉬워졌다. 정치행위의 실상은 권력투쟁이고 적/동지의 구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지향점이 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지속적인 충돌과 합의의 교차점으로부터 발생하며 이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틀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치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동반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충돌하는 세력 (또는 가치) 사이의 권력투쟁이 민주주의 질서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개방성이 요구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그리고 이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러시아 칸트학회가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왕 시작된 권력투쟁이라면 기득권이 전복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검찰총장이라는 직위에 오르는 인물이 '조직에 충성하는' 일은 사라지기를 기대했다.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슬플 수 밖에.

문재인 정부의 패착, 개인으로서의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 윤석열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넘쳐나는 확신들까지. 지금 느끼고 있는 나의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런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아~아까비!"

2020년 11월 26일 목요일

Zuka Zama zom zom zom.

 


Y & J: "Zuka Zama zom zom zom."

Y: "허니베저 처럼 살고 싶어."

M: "......"

J: "응. 얘는 막 살아."

2020년 11월 23일 월요일

국민학교 토요일 3교시가 끝난 시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난 그 소란(?)을 간신히 피했다. 사실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 하는 것은 토요일 3교시가 끝난 직후의 시간이다.

"10분의 쉬는 시간. 40분을 꽉 채우지는 않을 담임 선생님과의 4교시가 시작되겠지."

그리운 그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2020년 11월 15일 일요일

표현과 진리, 혹은 존재

수학적/과학적으로 표현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명제는 보편적 지식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근대의 학문적 성과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오늘날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 매우 유효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문은 그 자신들도 과학(science)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오늘날 많은 학문영역과 학자들이 <Me-Too-ism>에 빠져 있다며 농담섞인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을 일정 부분 이해하면서도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 수학적 명제는 발견(discovery)의 대상인가? 또는 발명(invention)의 대상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인가?

Invented or Discovered?
Invented or Discovered? from Google

현재는, 매우 잠정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수학적 명제 (또는 간단히 체계, 더 간단히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공식) 는 어디까지나 발명의 영역이다. 세상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술, 종교, 신화, 문학, 과학 등. 그러나 명제라는 것은 단순히 공책 위에 쓰여져 있는 하나의 문장 또는 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장 또는 수식이 지닌 '의미'와 '진리값'을 동반한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가 지닌 의미와 진리값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표현되지 않은 명제'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학적 명제', 그 표현방식의 대상인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 - 가령 1+1=2 - 라는 공식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들의 존재방식 그 자체 - 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이 질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진리값을 동반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발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발명이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발명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학적 질서는 주체로서의 인간 이전 부터 있었고, 인간이라는 종 이후의 세계에도 실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되기 전의 그 어떤 존재를 진리라 부를 수 있는가? 표현되지 않은, 비명제적 진리는 인식 가능한 것인가? 

근대에 들어선 주체는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각각의 표현 방식과 그 객체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도저히 의심이 불가능한 토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마침내 발견했다 믿었던 그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주체는 객체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아마도 이러한 철학적 작업을 가장 세심하고 꼼꼼히 다루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의 인식론은 철저히 명제화된 지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명제적 지식에 다다를 뿐이었고, 바로 이 지점이 칸트 인식론의 가장 큰 성취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의 한계!

다시 한번 수학적 명제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명제가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그 어떤 표현 방식도 결국 존재 그 자체에 이르지 못 할 것이다. 표현은 존재에 다가서려 하지만 존재는 언제나 뒷걸음 친다. 존재는 드러나며 동시에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회의적인 나의 태도는 아마도 존재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 0 뒤에 있는 숫자는 뭐야?" 라는 아이의 질문에 "-1이야."라고 답한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진 어느 날의 짧은 글.>

2020년 10월 27일 화요일

New York City 11: A Guide


<뉴욕에 관한 여행책자들은 많다. 그리고 뉴욕여행에 관한 블로그 자료들도 많다. 그래서 내가 이 곳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뉴욕의 여러 모습들과 그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기억들이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쯤 뉴욕은 활기를 되찾을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