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여가와 관조 #1: 조국 전 장관, 윤석열 검찰총장, 그리고 슬픔.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닌 <이것과 저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양비론 또는 회색지대라고 비판할 사람들을 비웃으며 글을 시작한다. 

정경심 교수와 그의 딸 조모씨 (결국은 조국 전 장관) 에게는 죄를 물었고, 윤석열 검찰총장은 돌아왔다. 한쪽에서는 성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 소식을 반겼다. 이 밖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이 아웅다웅, 얽히고설켜 말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바다 건너 먼 곳에 살며 아무래도 이전보다는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소식을 접하니 생각이 많아진다. 사법부마저 스스로 신뢰를 잃어버린 암담한 상황,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검찰 개혁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했다. - 물론 나와 같은 일반 시민들은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충돌, 타협, 투쟁을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 적어도 나의 눈에는 차근 차근 미리 준비한 계획에 맞춰 진행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무엇도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듯, 이런 저런 참가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충돌은 점차 격화 되었고, 지금은 그 시작점도, 가치판단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지금껏 합의하여 마련해 온 규범과 규칙을 적용하고, 이를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현재의 모든 상황은 권력투쟁의 결과물이고, 권력투쟁은 계속된다.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문재인 정부는 수세에 몰렸고, 검찰과 사법부의 기득권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나는 이 사실이 슬프다. '슬프다'는 나의 감정은 가치판단이 배제되어있다. 

내가 옳고-그름의 기준으로 이 사항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조국의 담담한 사과의 말 - 자신의 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자신의 도덕적 기준과 가치,  지나치게 관대했던 자신의 태도 (혹은 무관심),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실망하였음을 알고 있다는 - 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정치세력 간의 순수한 권력투쟁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서로 물고 뜯어가며 외쳐대는 말들은 언제나 <옳고-그름>의 틀을 붙잡고 늘어진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넌 뭐 깨끗하냐?" 그렇다. 원래 날 것의 욕망에서 비롯된 싸움일수록 유치한 법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참가자들 중 품위를 잃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또한 조국이었다. (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권력투쟁'의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부터, 논리는 단순해지기 시작했고, 편가르기는 더욱 쉬워졌다. 정치행위의 실상은 권력투쟁이고 적/동지의 구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지향점이 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역동성은 지속적인 충돌과 합의의 교차점으로부터 발생하며 이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합의된 규칙과 틀 속에서 가능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정치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동반할 때 비로소 유의미해진다. 충돌하는 세력 (또는 가치) 사이의 권력투쟁이 민주주의 질서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개방성이 요구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그리고 이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러시아 칸트학회가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왕 시작된 권력투쟁이라면 기득권이 전복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검찰총장이라는 직위에 오르는 인물이 '조직에 충성하는' 일은 사라지기를 기대했다.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슬플 수 밖에.

문재인 정부의 패착, 개인으로서의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 윤석열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넘쳐나는 확신들까지. 지금 느끼고 있는 나의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런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아~아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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