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년은 말이지.
지루하고 길게 늘어진 하루하루가 뭉쳐져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일주일을 만들고, 한달을 보내고, 일년을 끝내더라고.
식탁 위에 놓인, 먹고 배탈난 인절미를 마구 짓누르는 기분이 이럴거야.
아무튼 그렇더라고.
언젠가 되돌아 보면, 미치도록 그립지만 꼴보기 싫은 그런 일년이 될거같아.
안녕 2020.
이천이십년은 말이지.
지루하고 길게 늘어진 하루하루가 뭉쳐져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일주일을 만들고, 한달을 보내고, 일년을 끝내더라고.
식탁 위에 놓인, 먹고 배탈난 인절미를 마구 짓누르는 기분이 이럴거야.
아무튼 그렇더라고.
언젠가 되돌아 보면, 미치도록 그립지만 꼴보기 싫은 그런 일년이 될거같아.
안녕 2020.
<미나리; MINARI, 2020> |
"포스터를 보라. 성조기가 걸려있다. 이건 미국 영화잖아!"
영화 <미나리>에 대한 논쟁이 있다.: <여기>
골든 글로브(Golden Globe Awards)는 <미나리>를 외국어 영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렇다면 영화 <아포칼립토>는 마야 영화인가?"
당신이 미국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차별과 폭력을 당해봐야 한다. 차별 받지 않고 우연히 또는 너무 쉽게(?) 얻어낸 시민권은 결코 당신에게 소속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와서 시민권자가 된다면? 뭐가 달라질까? |
"They are so cute. They don't look different to me. We are all the same."
그는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견뎌왔을까?
Y & J: "Zuka Zama zom zom zom."
Y: "허니베저 처럼 살고 싶어."
M: "......"
J: "응. 얘는 막 살아."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난 그 소란(?)을 간신히 피했다. 사실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 하는 것은 토요일 3교시가 끝난 직후의 시간이다.
"10분의 쉬는 시간. 40분을 꽉 채우지는 않을 담임 선생님과의 4교시가 시작되겠지."
그리운 그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수학적/과학적으로 표현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명제는 보편적 지식이 되지 못한다. 이는 근대의 학문적 성과와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오늘날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 매우 유효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문은 그 자신들도 과학(science)이 되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며 오늘날 많은 학문영역과 학자들이 <Me-Too-ism>에 빠져 있다며 농담섞인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이 모든 현상들을 일정 부분 이해하면서도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 수학적 명제는 발견(discovery)의 대상인가? 또는 발명(invention)의 대상인가? 그것은 형이상학적 진리인가?
Invented or Discovered? from Google |
현재는, 매우 잠정적으로, 후자라고 생각한다. 수학적 명제 (또는 간단히 체계, 더 간단히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공식) 는 어디까지나 발명의 영역이다. 세상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술, 종교, 신화, 문학, 과학 등. 그러나 명제라는 것은 단순히 공책 위에 쓰여져 있는 하나의 문장 또는 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장 또는 수식이 지닌 '의미'와 '진리값'을 동반한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가 지닌 의미와 진리값은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즉 '표현되지 않은 명제'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수학적 명제', 그 표현방식의 대상인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 - 가령 1+1=2 - 라는 공식이 표현하고 있는 대상들의 존재방식 그 자체 - 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이 질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진리값을 동반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발명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발명이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발명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적 질서, 논리, 진리는 주체 밖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수학적 질서는 주체로서의 인간 이전 부터 있었고, 인간이라는 종 이후의 세계에도 실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되기 전의 그 어떤 존재를 진리라 부를 수 있는가? 표현되지 않은, 비명제적 진리는 인식 가능한 것인가?
근대에 들어선 주체는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 각각의 표현 방식과 그 객체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도저히 의심이 불가능한 토대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고, 마침내 발견했다 믿었던 그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주체는 객체를 바라보았다. 칸트는 아마도 이러한 철학적 작업을 가장 세심하고 꼼꼼히 다루었던 인물일 것이다. 그의 인식론은 철저히 명제화된 지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명제적 지식에 다다를 뿐이었고, 바로 이 지점이 칸트 인식론의 가장 큰 성취이기도 하다. 인간 인식의 한계!
다시 한번 수학적 명제와 진리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명제가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그 어떤 표현 방식도 결국 존재 그 자체에 이르지 못 할 것이다. 표현은 존재에 다가서려 하지만 존재는 언제나 뒷걸음 친다. 존재는 드러나며 동시에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회의적인 나의 태도는 아마도 존재의 이러한 특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빠, 0 뒤에 있는 숫자는 뭐야?" 라는 아이의 질문에 "-1이야."라고 답한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진 어느 날의 짧은 글.>
"The way I see it, unethical ethics are better than no ethics at all." from glasbergen.com |
"LIBERATE MINNESOTA." "LIBERATE MICHIGAN." "LIBERATE VIRGINIA, and save your great 2nd Amendment. It is under siege."미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지점 - 의료보험 & 공공의료 -이 코로나(COVID 19)의 공습에 맥을 못 추고 있다. 이 와중에 트럼프는 주지사들과의 대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 싶어 울부짓는 한명의 어린아이가 되어 유치하고도 광기어린 트위터 글을 남겼고, 이 무책임한 발언에 올라탄, 꽤 많은 수의 생각없는 사람들(극심한 이기주의와 인종주의를 무기로 삼는......그러니깐 그냥 바보들)이 미국사회의 감춰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진실을 드러낸다.
<이제껏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타자로부터 유리된 채 고립되어 있는 근대적 주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공동체 속의 주체를 희극을 통해 재발견해보자!>이 수업을 통해 바라본 고전 희극 속의 주체는 언제나 타자와의 갈등 속에 서있지만, 또 언제나 공동체 안의 정치적 주체로서 이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희극의 주체가 과연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과연 근대적 질서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았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것도 정답은 아닐 것이다. 희극 속의 주체는 때론 너무 순진하고, 그 갈등의 해결은 가끔 너무 우연적이다. 그렇기에 서구 근대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물려받은 오늘날의 정치는 아마도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닐까 싶다. 이 위태로운 줄을 타고 건너편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 적어도 트럼프가 진행하는 저급한 리얼리티 쇼의 저질 음담패설과 유치한 대결을 공공의 영역에서 몰아내야 할것이다. 이런 쇼는 아주 가끔, 혼자 낄낄거리며 보는 것이지, 남들과 함께 보기에는 너무 유치하다.
<School Closed> from DOE at NYC |
<College Students at Miami Beach> from NY Times |
<도대체 휴지는 왜?> from Washington Post |
<지금 총을 산다는거야?> from Time |
Tajikistan from Google Image |
<안녕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