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일요일

(독서) 섬; LES ILES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섬> by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 김화영 역

 온몸으로 읽는 문장을 마주한다. 그것은 조심스레 다가왔고, 나는 고요히 침잠한다. 그저 그 문장들을 이곳에 옮기려 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공의 매혹 中, p.25)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 준다. (고양이 물루 中, p.36 & 40)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 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떤 열렬한 사랑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 두려 한다. 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中, p.77 & 8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reconnaissance)'이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질 때 여행이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中, pp.96-97)

저 형언할 길 없는 과거의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나를 에워싸고 있는 맹목적이고 엄청난 힘들로부터 헤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앎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무(無)의 섬뜩함이었다. (이스터섬 中, p.120-121)

그런데 몽상 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 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적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지니게 해 준다. (사라져 버린 날들 中, p.165)

끝으로 알베르 카뮈의 글을 대신하여 작가와 역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섬>에 부쳐서, 알베르 카뮈, pp.6-15) 

2022년 12월 27일 화요일

(독서) 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역

<영속패전론> by 시라이 사토시(白井 聡) / 정선태 외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 (Emphasis Mine, p.21)

 도쿄 시민 집회,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하여 외쳤다. <영속 패전론>의 저자 시라이 사토시 또한 동일한 표현으로 자신의 저작 첫 문장을 시작한다. 참담하고, 슬프다. 분노하고, 암담하다. 그렇게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그들을 모욕했는가?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전후 '평화와 번영'이라는 환상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자의 냉정한 시선을 뒤쫓다 보면, 이미 기능을 다하고 죽은, 전후 체제의 껍데기를 지탱하고 있는 기만적 개념들을 마주한다. 

  • 종전 기념일
  • 전후 민주주의
  • 고유의 영토(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
  • 전후 탈각 
  • 일억총참회 
  • 절대평화주의
  • 국체호지

 전전(戰前)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전후 일본 사회 정-재계의 권력, 그에 기생하는 학계와 언론계가 누리는 혜택, 이를 뒷받침하는 이중 구조의 모순(전쟁에서 패했지만,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았다.)은 바로 '영속패전'으로 귀결한다.  

다시 말해 '패전 후'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패전 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의미에서 직접적인 대미 종속 구조가 영속화한 한편, 패전 인식을 교묘하게 은폐(부인)하는 대부분 일본인의 역사 인식 구조가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패전은 이중 구조를 이루며 계속되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은 서로 보완하고 있다. 패전을 부인하므로 미국에 끝없이 종속되며, 대미 종속이 깊이 이어지는 한 패전의 부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영속패전'이다. (p.61)

미국에는 패전으로 이뤄진 종속 구조를 한없이 인정함으로써 이를 영속화하는 한편, 그에 대한 보상 행위로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패배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패배의 부인'을 지속하기 위해 더욱더 미국의 졸개가 돼야 한다. 노예와 같은 복종이 패배의 부인을 지탱하고, 패배의 부인이 노예 행위의 보상이 된다. (p.88) 

 저자의 논증 과정은 매우 정직하고 냉철하다. 그리고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은 날카롭다. 

현실적, 형이상학적 책임을 다루는 논의와 별도로 정치 차원의 명제, 즉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사실이 있다. 단순한 사실인 까닭에 경제적 성공에 따른 국민의 만족감 고양이나 진지한 회환과 반성에 바탕을 둔 부전(不戰)의 맹세 같은 주관적 차원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mphasis mine, p.57)

결국, 국가의 영토를 결정하는 최종 심판 단계는 폭력이다.즉 역사상 최근에 일어난 폭력(전쟁)의 결과가 영토 지배의 경계선을 규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p.68) 

왜냐면 어떤 나라든 국가가 본래의 의미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본성은 악이고 타국이나 타 국민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 정책은 애초부터 진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검열로 통제받는 형태로 시작된 전후 민주주의가 정의의 기초나 전후 일본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전후 민주주의 개혁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던 사람들에게 에토가 퍼부은 비판의 핵심이다. (...)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 추구와 국내 사정에 따라 규정됐다. (p.134)

 지금껏 가까스로 지켜온 '평화와 번영'이라는 망상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전후는 이미 종착점을 지나쳤다. 결국 바깥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은 저급한 내셔널리즘임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집착, 미국을 향한 일방적 구애와 비굴한 저자세 외교. 이를 통해 유지하려는 아시아에서의 우월적(?) 지위(이 또한 허구에 기반한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시인하기 두려울 뿐이다. 전후 체제의 혜택을 누려온 이들의 몰염치와 방관자들의 비겁함이 빚은 허구가 그들을 짓누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욕 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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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극우의 정신 구조(=자민당)를 이해하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한국 극우의 친미-친일 성향의 속사정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면, 훌륭한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독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by 박민규 (표절)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by
박민규 (표절)

 표절. 작가로서 뼈아픈 고백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부끄러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 박민규 작가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뒤늦게 표절을 인정한 후로는 작품 활동을 안 하는 듯하다. 그래도 신경숙씨와는 다르게 그는 나름(?) 깔끔하게 인정했다. (사실, 신경숙씨의 표절에 비하면 '참고' 또는 '변용'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표절을 하고도 박사 학위를 떡-하니 받는 나라에서, 그 학위로 교수가 되기도, 경력을 쌓다 보니 영부인이 되기도 하는 나라에서, 한 명의 작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아닐까?' 라는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적어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라면 그 부끄러움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오래전, 작가의 표절 인정 훨씬 이전에, 친구 '완'이 선물로 준 책이다. 무렵에는 꽤나 심오한(?) 주제의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기에, 대충대충, 낄낄,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페이지를 가볍게 넘겼다. 시간이 흘러 흘러, 서울 부모님 댁 책장 위에서 잠들어 있는 이 책을 들고 바다 건너 먼 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아무래도 친구의 선물이기에, 다시 한번 제대로, 고개를 끄덕끄덕, 여전히 낄낄, 경쾌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던 까닭은 나에게도 시간이 넘치도록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경쾌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장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그래도 표절은 표절이다! 

 아무래도 추천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감상평도 남기지 않는다. 안타깝다. 큰 아쉬움이 남는다. 

 덧붙여, 계속해서 이 표절작의 개정판을 내고 있는 한겨레 출판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표절을 인정한 작가 본인의 요청은 아닐 것이다. 삼미가 떠난 세상, 프로들의 전략은 이토록 낯 뜨거운 것인가?
 
뉴욕에 사시는 분들 중 이 책을 읽고 싶으신 분에게는 빌려 드리겠습니다. 구입하지 말아주세요. 

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New York City 24: Art_Jean-Michel Basquiat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우연히 정착(?)하게 된 뉴욕, 다양한 얼굴을 지닌 도시. 

뉴욕의 작가 중 가장 좋아하는 두 명,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바스키아가 공유하는 이 도시의 정서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질감의 작품과 서로 다른 온도의 시선. 

오늘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만났다.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Jean-Michel Basquiat: King Pleasure

2022년 10월 22일 토요일

Y & J's Toy Store at Astoria Park, NYC

Y & J's Toy Store at Astoria Park, NYC

Y & J's First Business

They've sold 3 items. 

One origami Ninja star and Two keychains sold; they've earned $3!!!
 

2022년 10월 17일 월요일

그의 경고

Warning from J.

 No adults allowed.

 방문에 붙어 있었다.

2022년 9월 27일 화요일

(독서) NYPL Korean Book Club 09.2022: 레스(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Andrew Sean Greer / 강동혁 역

 뉴욕 공공 도서관 한국어 북 클럽 09. 2022


<레스; Less> by 앤드루 숀 그리어 / 강동혁 역

 '세상 모든 책은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아주 오래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글과 그 글의 모든 작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무엇에 관한 사랑이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무엇을 사랑해야 한다. 너무 성급한 결론일까? 

 책의 표지 만큼이나 경쾌하고 상큼한 사랑 이야기를 - 동시에 주인공 아서 레스의 삶에 깃든 지적 통찰을 엿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 기대하며 <레스>를 읽는다. 50세가 되기 직전 사랑이 떠나간다. 프레디가 결혼 소식을 전한다. 레스는 도망치듯 세계 일주를 결심한다. 칭송받는 천재 시인 로버트의 애인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자신의 소설 <칼립소>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간 미루어두었던 온갖 초청에 응한다. 결혼식에 가지 않기 위해서. 

뉴욕 - 멕시코 - 이탈리아 - 독일 - 프랑스 - 모로코 - 인도 - 일본 -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인 레스는 불안하다. 자기 소설에 대한 확신도 없다. 여전히 사랑에는 서툴고, 독일어는 형편없다. 사실 우리 모두가 레스다. 우리는 불안하다. 현재의 삶에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랑에는 갈팡질팡한다. (뉴욕에 사는 나의) 영어는 형편없다. 

 화자의 시선이 레스의 여행을 따라간다. 그의 사랑, 그의 곁을 스쳐가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이 그러하듯 사랑은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을 들고 그의 앞에 나타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다는 걸 다들 알잖아. 사랑은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란 말이야. 사랑은 씨발,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거고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거야. 삶에 동맹을 두는 거라고. 사랑은 불이 아니고 벼락도 아냐. 사랑은 그녀와 내가 늘 해왔던 그런 거 아냐? 하지만 그녀가 맞는 거라면, 아서? 만약에 시칠리아 사람들이 맞다면? 그녀가 느낀 게 이 땅을 모두 박살 내는 어떤 거였다면? 나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거. 넌 느껴봤어? (p.212)

 로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삶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아 / 하지만 내가 죽는 그날엔 / 네가 울게 되리란 걸 알아. (p.269) 

 그 무엇을 받아들이든, 레스는 여전히 순진하리라. 샌프란시스코 그의 집에서 기다리는 프레디와 함께라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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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첫 부분을 읽으며 생각한다: "뭐야 이거? 뭐 이딴 식으로 글을 썼어?" 

 결국 원서를 찾아 읽는다. 재기 발랄한 문장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치(?) 있는 글이 넘쳐 흐른다. 작가의 재능(?)이 넘쳐 흘러서 내용을 진부하게 만든다. 

 어디까지나 감상평은 주관적이지만, 누군가 '퓰리처(풀-잇-서라고 읽든 뭐든)상을 받을만한 책인가?'라 묻는 다면: "그거야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헤밍웨이는 받았던 상을 반납할 듯 하네요."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를 짚어본다: 번역!! 성의 없는 번역!!

 산뜻해야 할 문장이 산만해진다. 작가의 개성이 넘치는 (뭐든지 너무 넘쳐요!) 문장이 철학과 석사 1년생의 겉멋 들어간 글로 탈바꿈한다. 일관성 없는 번역에 실망하고, 비문의 향연 속에서 좌절한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 디자인
  • 유명 문학상이 부여하는 그럴듯한 권위
  •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

 이 책을 읽기 전, 표지를 본다. 그 누구도 사랑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탐구, 또는 사랑에 의한 삶의 구원과 같은 묵직한 주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단지 스무 살 시절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On Love; Essay in Love>의 톡톡 튀는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내심을 갖고 마지막 장을 덮는다. 옮긴이의 말도 읽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실패할 때도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오면 되지 뭐! 레스의 여행이 그러했듯이."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1940-2022)

Saul Kripk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alytic philosophers of the 20th Century, has died.

Saul Kripke (1940-2022)

Professor Kripke was well-known for his work in philosophy of language and logic, with his Naming and Necessity, the book version of lectures he delivered at Princeton University in 1970, widely recogniz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works of 20th Century analytic philosophy. An overview of his influential work can be found here and a list of his publications can be viewed here.

At the time of his death, Kripke was Distinguished Professor of Philosophy and Computer Science at CUNY Graduate Center. From 1977 to 1998 he was a professor of philosophy at Princeton University. Prior to that, he held positions at Rockefeller University, Harvard University, and Princeton, and even before he earned his BA from Harvard in 1962, he taught courses at Yale and MIT. He held many visiting positions around the world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including at Cornell University, UCLA, Oxford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Utrecht, and Hebrew University, to name just some of them.

A 1977 New York Times article about Kripke’s life and career up to that point, and his reputation as a genius, conveys his standing at the time, at least among some philosophers:

Kripke’s potential, his controversial views and his position as [a] budding genius in world analytic philosophy have combined to make him a man who inspires awe and excitement among philosophers. In fact, he has already become something of a cult figure in philosophical circles—gossiped about, studied, analyzed and claimed as a kindred mind. Some philosophers lose their reserve when speaking of him. The cult phenomenon is itself remarkable, for philosophers as a group have such large egos that they correct Aristotle as they would a schoolchild, and they have such a healthy sense of skepticism that they doubt whether such things as proper names exist. Even in groups of two or three, they lace their conversation with exit clauses and qualifiers to guard against having a trapdoor sprung under some private reality. They do not, in short, subordinate or let go of themselves easily, and yet Kripke has been known to bring to their brain‐twisting conclaves the atmosphere of an early Beatles concert.

A 1996 Lingua Franca article by Jim Holt looks at some of the controversial aspects and upshots of Kripke’s reputation.

Among his many honors were the 2001 Schock Prize in Logic and Philosophy from the Swedish Academy of Sciences.

He died on September 15th.

Reference: 

https://dailynous.com/2022/09/16/saul-kripke-1940-2022/

 전공자(분석철학 전공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가 아니어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학부 전공자를 의미합니다!)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나 또한 전공자가 아니지만, 그의 철학에 대한 짧은 논문 정도는 읽어봤을 정도다. 물론 나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천재로서, 괴짜로서 -일화에 더 관심이 있긴 했지만. 

 2022년. 뉴욕시는 당대의 철학자들과 작별 중이다.

Richard J. Bernstein (1932 - 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Richard J. Bernstein (1932-2022)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났다. 여름이 시작할 때였다. 이제 가을이 되었다. 

 수년 전, 수업이 끝난 밤 9시 가을 밤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기억난다. 집에 가는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그와 나누는 짧은 대화가 좋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로는 Richard Rorty의 철학에 관한 짧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 프래그머티즘과 한나 아렌트 철학과의 유사성에 대한 대화였다.   

이런 저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슬픔과 존경을 담아 작별 인사를 남긴다. 그의 책 <The Pragmatic Turn> 한쪽 구석에 받은, 젊은 철학도에게 남긴 그의 짧은 응원을 여전히 기억한다. 

To Michael "A fellow admirer of pragmatism." Richard J. Bernstein


(Reference)

2022년 9월 14일 수요일

(독서)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 / 송태욱 역

<파랑새의 밤> by 마루야마 겐지/송태욱 역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마주한다. 글의 몸짓, 글의 숨소리, 글의 표면, 글의 무게, 그리고 거칠 것 없이 휘몰아치듯 써 내려간 그 글의 기세를 쫓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55세. 이혼. 퇴사. 당뇨병. '나'는 개인으로서 죽기를 바랐지만, 결국 다다른 곳은 그의 가족을 집어삼킨, 그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고향, 가자무라다. 도망치듯 도시로 나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의 인간으로 출세를 향해 나아가던 그의 인생 속 단 한순간도 돌아오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결코 잊을 수 없던 곳. 가키다케 산이 내려보는 폐허, 고향 집 앞에 그가 서있다. 

 15년 전 이곳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한 여동생의 시체를 보았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무고한 이에게 참담한 짓을 저지른 동생은 도망 중이다. 일련의 사건에 낙담한 어머니는 극약을 먹고 고통에 몸부림 치다 죽었다. 남들의 삶에 무관심하던 아버지는 5년 전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안도한다. 행방을 알 수 없던 동생이 고향 집에 돌아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주었다. 녀석을 흉가가 되어버린 고향 집과 함께 태워버린다. 

 누이의 죽음. 아우가 저지른 어긋난 복수. 충격적이고 잔인하지만, 단순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가 처한 현재의 상황도 지극히 평범한 삶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이면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제와 지레 짐작할 뿐인 저마다의 이유와 의미가 뒤엉켜있다. 인생은 단순하지만 인간은 의문으로 가득 차있다. 그 의문을 파헤치는 일을 운명이라 부르는 것일까. 

 그는 죽으려 했다. 홀로 깊숙이 땅을 팠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만들었다. 가족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 만의 죽음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운명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여름의 끈적한 바람이,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에 비친 달빛이, 강 건너 맞은편에서 들려온 풀피리 소리가, 한밤 중 도롱이벌레처럼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이 모든 것이 그의 무기력했던 삶에 운명을 덧붙인다. 그리고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파랑새의 울음이 그의 운명에 확신을 준다: '저놈이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

내가 저주해 마지않는 것은 누이나 그 밖의 몇몇 아가씨에게 독수를 뻗친 성범죄자 자체가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로 아무 일 없이 이대로 끝나고 마는 내 처지다. (p.608)

 태풍이 휘몰아친다. 녀석을 마주하고 깨달았다. 녀석은 죽고 싶어 한다. 죽임을 당하고 싶어 한다. '나' 또한 녀석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란다. 진정으로 죽고 싶다는 것은 운명을 파헤쳐 보고 싶다는 뜻이었을까.   

"너 대신 죽어주지!" (p.658)

 자신의 운명을 '나'에게 맡긴다는 듯이 녀석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고, 난폭하게 변한 강물과 토석류가 녀석의 몸을 앗아간다. 녀석의 운명이 '나'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자애를 베푼 것이다. 

 이제 다시 홀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닥쳐온 운명을 마주했고, 더 이상 꺼릴 것 없이 고향 땅을 밟고 서있다. 강을 타고 흘러오는 바람을 들이켜고, 떠나간 이들의 안식이 빚어낸 흙을 손에 쥔다. 무너졌다 여겼던 자신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으리라.

자아, 나가자. 마음 내키는 대로 들판을 떠돌아다니며 다시 멋진 단독 행동을 실컷 즐기자. 그리고 부침 많은 일생을, 화복(禍福)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이 세상을 마음껏 즐기자. 하지 않는 것이 무난한 일 같은 건 이제 하나도 없다. (pp.670-671)

다시 파랑새의 밤이 시작되었다. 파랑새는 모든 원죄를 대신 떠맡아줄 것 같은 소리를 산들에 메아리치게 한다. 오보레 강의 수면에 비친 나는, 아름답고 맑게 갠 하늘을 운행하는 별들보다, 그리고 반딧불이보다 뚜렷하게 빛나고 있다. (pp.677-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