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이지 대학가기의 어려움이란...
끝까지 힘겹게, 그렇게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정책이 내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 내게는 수학능력이 부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가고자했던 대학에서 공부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모자랐다. (과연 정말 그러한가?) 그런데 도대체가 그 시험으로 개개인의 수학능력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지금은 나의 모교가 된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간신히 추가합격을 했다. 고맙긴 하다. 이제와서 말하자면 당시 나는 입학논술시험의 분량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나왔다. 강의실에서 논술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모든 게 귀찮아졌다. 대한민국의 고교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지문들로 가득 찬 이 시험지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대학에 가고자 했던 간절함 보다는 그 모든 것에 지쳤던 내 청춘에 대한 허탈함이 더 컸다. 억지로 지어낸 말들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을 나왔다. 운이 좋게도 대학에 합격했다. 아마도 배치표가 요구하는 기준보다는 넉넉했던 내 수능시험점수 덕분이었으리 생각한다. 그토록 지겹게, 또 무의미하게 나의 청춘을 가렸던 그 수학능력시험 점수 덕분에 난 대학에 입학했다. 그 숫자들은 입시담당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무의미했다.
수학능력시험. 어떤 이는 이 시험을 통해 성취감과 자신감을,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열등감과 좌절감을, 또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가 정한 일정한 경로로부터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문과는 이과로 부터, 이과는 문과로 부터 멀어졌고, 선생은 학생들에게 분류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될 녀석'과 '안 될 녀석'으로. 내가 그나마 '될 녀석'으로 여겨졌던 것을 감사해야하는 걸까? '다원주의'라는 허울 좋은 개념을 사회과목 주관식 시험 답안지에 적어넣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었는지. 청춘이 막 시작하려 할 때에, 당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관심사와 미래를 작도하고 있었다. 이 단순한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그저 달리기 시작했다.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2
정말이지 살아가기의 어려움이란...
달리고, 또 달렸다. 우리는 지금도 달려야한다. 이렇게 달려야 겨우 평범해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달려서 증명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이 달리기의 끝에 받아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일에 익숙해지고, 버릇이 되고, 삶이 된다.
대학 시절, 종종 형과 나눈 대화들이 생각난다. 그는 보통의 인문학 전공자들보다도 문학책을 많이 읽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어느 날 오르한 파묵의 책을 들고 있는 나에게 "그책 좋아."라고 말하는 형이라서 좋았다. 수요-공급 곡선이 엇갈리는 공부를 하던 그는 가끔 철학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언젠가 '대화'라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조금 놀라웠다. 마침 나도 로티(Richard Rorty)의 철학에 흥미를 느꼈던 때였다. 궁금하다. 공부를 떠난 형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동생은 지금 먼 곳에서 다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멋진일이다. 나는 그녀를 응원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회사에 다니던 때에도 고민과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던 동생은 멋진 사회학자가 될 재목이다. 그녀가 천재라서 '얼씨구나~탁!' 하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누구나 이러면 좋겠지!!) 내 동생은 자신이 익힌 사회학적 개념들을 공감의 형태로 바깥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민과 생각에는 그녀 자신의 체온이 온전히 묻어나오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멋진' 사회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생각하는 훈련에 시간을 쏟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고 불안하게 만드는지.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믿고싶다. 오히려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고, 주변의 작은 소리와 희미하지만 고유한 빛깔들을 온전히 듣고 바라보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정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싶다.
그래서 지금부터 실현하고 싶은 계획: 굶지않고 생각하기; Thinking w/o Starving.
우선 이 계획을 실현해가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우리 가족에게 완벽한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있는) 아내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
정말이지 대학가기의 어려움이란...
끝까지 힘겹게, 그렇게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대한민국 교육정책이 내세운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 내게는 수학능력이 부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가고자했던 대학에서 공부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모자랐다. (과연 정말 그러한가?) 그런데 도대체가 그 시험으로 개개인의 수학능력을 어떻게 평가한다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지금은 나의 모교가 된 학교에 입학할 때에도 간신히 추가합격을 했다. 고맙긴 하다. 이제와서 말하자면 당시 나는 입학논술시험의 분량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나왔다. 강의실에서 논술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모든 게 귀찮아졌다. 대한민국의 고교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지문들로 가득 찬 이 시험지에 나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대학에 가고자 했던 간절함 보다는 그 모든 것에 지쳤던 내 청춘에 대한 허탈함이 더 컸다. 억지로 지어낸 말들로 글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을 나왔다. 운이 좋게도 대학에 합격했다. 아마도 배치표가 요구하는 기준보다는 넉넉했던 내 수능시험점수 덕분이었으리 생각한다. 그토록 지겹게, 또 무의미하게 나의 청춘을 가렸던 그 수학능력시험 점수 덕분에 난 대학에 입학했다. 그 숫자들은 입시담당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무의미했다.
수학능력시험. 어떤 이는 이 시험을 통해 성취감과 자신감을,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열등감과 좌절감을, 또 다른 이들은 대한민국 사회가 정한 일정한 경로로부터 완전히 이탈해버린다. 문과는 이과로 부터, 이과는 문과로 부터 멀어졌고, 선생은 학생들에게 분류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될 녀석'과 '안 될 녀석'으로. 내가 그나마 '될 녀석'으로 여겨졌던 것을 감사해야하는 걸까? '다원주의'라는 허울 좋은 개념을 사회과목 주관식 시험 답안지에 적어넣는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었는지. 청춘이 막 시작하려 할 때에, 당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관심사와 미래를 작도하고 있었다. 이 단순한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그저 달리기 시작했다.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2
정말이지 살아가기의 어려움이란...
달리고, 또 달렸다. 우리는 지금도 달려야한다. 이렇게 달려야 겨우 평범해질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달려서 증명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이 달리기의 끝에 받아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생각하지 않는 일에 익숙해지고, 버릇이 되고, 삶이 된다.
대학 시절, 종종 형과 나눈 대화들이 생각난다. 그는 보통의 인문학 전공자들보다도 문학책을 많이 읽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어느 날 오르한 파묵의 책을 들고 있는 나에게 "그책 좋아."라고 말하는 형이라서 좋았다. 수요-공급 곡선이 엇갈리는 공부를 하던 그는 가끔 철학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언젠가 '대화'라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조금 놀라웠다. 마침 나도 로티(Richard Rorty)의 철학에 흥미를 느꼈던 때였다. 궁금하다. 공부를 떠난 형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동생은 지금 먼 곳에서 다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멋진일이다. 나는 그녀를 응원한다. 새벽부터 밤까지 회사에 다니던 때에도 고민과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던 동생은 멋진 사회학자가 될 재목이다. 그녀가 천재라서 '얼씨구나~탁!' 하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누구나 이러면 좋겠지!!) 내 동생은 자신이 익힌 사회학적 개념들을 공감의 형태로 바깥 세상에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민과 생각에는 그녀 자신의 체온이 온전히 묻어나오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멋진' 사회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생각하는 훈련에 시간을 쏟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고 불안하게 만드는지.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믿고싶다. 오히려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고, 주변의 작은 소리와 희미하지만 고유한 빛깔들을 온전히 듣고 바라보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정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싶다.
그래서 지금부터 실현하고 싶은 계획: 굶지않고 생각하기; Thinking w/o Starving.
우선 이 계획을 실현해가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우리 가족에게 완벽한 의료보험을 제공하고 있는) 아내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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