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일 월요일

엄동설한

-엄동설한-

보기 좋게 널브러진 몇 권의 책들과 책상 위에 엎어진 그의 시간들
자신의 남편이 꽃을 피우지 못 할 마른 나무라는 것을 그 여인은 안다
아침마다 남편을 깨우는 그녀의 눈에선 투명한 꽃이 핀다
그가 부리는 시기와 발작이 꽃의 거름이 된다

캄캄한 새벽 바람 중에 부유하는 몇 톨의 글자가
그의 손끝 마디에 걸터앉은 채 눈을 감는다
남편은 눈 감은 채로 지난 반성문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오래된 것들을 태워 땅 속에 묻으면 몇 뼘의 무덤이 생겼다
그렇게 그는 간신히 아내의 이불 속에 온기를 채워넣었다

다음 날 아침 마른 몸을 물에 적시는 남편을 생각하며 쌀을 올렸다
남편이 부탁한 일은 터져버린 티셔츠 한 장의 바느질이 전부였으나
뜨거운 밥 한끼를 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은 삐뚤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새로 든 집에 올 때부터 기울어져있던 나무바닥은
남편의 가슴팍 마냥 바짝 말라 올 겨울 땔감으로나 써야 할듯하다
오늘 아침 그녀의 눈두덩이에는 투명한 눈이 쌓였다

2017년 4월 26일 수요일

Gadamer's understanding of openness.

이번 학기 번스타인(Richard J. Bernstein) 교수의 배려로 그의 <Gadamer's Truth and Method> 세미나 수업을 청강하고 있다. 책의 중반이 훨씬 지나서야 가다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논의들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느라 힘들었다.) 그리고 오늘 수업에서는 경험(Erfahrung) - 또 다른 경험(Erlebnis)과 대조적 의미에서- 의 개념과 해석학적 경험(hermeneutic experience)에 관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H. Gadamer, Truth and Method (Bloomsbury 2013)

"If we thus regard experience in terms of its result, we have ignored the fact that experience is a process. In fact, this process is essentially negative." (p.361)
                                                                        
"In fact, as we saw, experience is initially always experience of negation: something is not what we supposed it to be." (p.363)

"Real experience is that whereby man become aware of his finiteness." (p.365)

이와 더불어 대화와 개방성에 관한 가다머의 설명은 단순히 철학적 논증이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Openness to the other, then, involves recognizing that I myself must accept some things that are against me, even though no one else forces me to do so." (p.369)

번스타인 교수가 말한다.

"Think about it. How many times have we really had a conversation with others? Of course we talk to each other everyday, but usually to impress others, not to accept others."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다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 개념에 대해 논의한 부분을 떠올려 본다. 

대화는 지식(Phronesis)이다!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앵두라는 고양이

-앵두라는 고양이-

고양이의 약점은 목덜미
야옹 야옹 야옹 내 목덜미를 놓아줘

늘어진 너의 하얀 배를 만지면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야옹 야옹 야옹 대신 내 턱을 긁어줘

오래 오래 같이 있으려면 밥 좀 그만 먹어야 해
야옹 야옹 야옹 물 말고 닭고기 도시락을 뜯어줘

2017년 4월 17일 월요일

New York City 2: Coffee Street

뉴욕의 모습은 다채롭다. 어둡기도, 밝기도 하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기적인 욕망이 고급스런 양복으로 덮이고, 지적 허영심이 진보의 옷을 입고, 자기 만족이 예술이 되기도 하는 이 곳은 뉴욕이다. 여러가지 상반된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서로 다른 빛깔들이 어울린다. 때로는 큰 충돌이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어떤 이들은 저항에 참여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조롱하며, 또한 어떤 이들은 이 모두를 관찰하고 설명하려 애쓴다.

이 혼돈(?) 속에서도 서로 다른 많은 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커피다. 뉴욕에 오긴 전에도 가끔은 커피를 마셨지만, 주로 대화를 위해 지불한 자리값에 딸려나오는 일종의 사은품 정도의 역할이었다. 뉴욕에 온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나의 흥미를 자극한 대상은 커피가 아니다. 난 뉴욕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커피가 나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think coffee, NYU, New York

처음으로 나에게서 감탄을 이끌어 낸 커피는 think coffee라는 가게에서 팔리고 있다. NYU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들렀다. 공교롭게도 내 앞에 있던 두명 모두 라떼를 시켜서 나도 덩달아 차가운 라떼를 마셨다. 그리고 난 속으로 외쳤다. 

'커피가 이렇게 맛있다니!'   

개인적으로 뉴욕 최고의 커피로 뽑지는 않지만, 뉴욕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와 가까이 있기에 무난히 Top 5안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가게 밖 건너 편의 벤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여유로운 시간이 언제나 그립다.


Joe Coffee, Union Square, New York

Joe Coffee는 때에 따라, 그리고 가게에 따라서 너무 큰 편차를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 뉴욕에 와서 함께 커피를 마실 때 난 물어본다.

"90점 짜리 커피를 마실래요? 아니면 70점에서 120점 사이를 헤매는 커피를 마실래요?"

누군가 나에게 뉴욕 최고의 커피를 소개시켜달라고 한다면 난 Joe를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뉴욕에서 지금껏 마신 최고의 커피 한 잔을 꼽아달라고 한다면 2012년 여름에 New School (13th St.) 근처에서 마신 Joe의 아이스 라떼를 말한다. 커피의 쓴맛과 신맛이 우유의 고소함과 어우러져 입안에 청량감을 남겼을 때 난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비록 그 때는 현금만 받던 악덕상인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맛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게 단점이다. 때로는 감탄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집에 가서 네스프레소를 내려먹어야 겠다는 후회를 남긴다. 그래도 펀치 카드를 채우는 재미가 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을 스스로 다짐해 본다. Coffee Street 연재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돈을 좀 벌어야 한다.

연재를 기대하며......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괴롭힘에 관한 그녀의 말

M: "동생 좀 괴롭히지 마. 아기 울 잖아."

그녀가 답했다.

Y: "왜 그래~이게 내가 하는 일인데."

2017년 3월 30일 목요일

New York City 1: Fly Away

Fly Away, Forest Hills, New York
 뉴욕은 공기가 좋다. 정말이다. 물론 이 곳은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고, 도로는 항상 교통체증으로 답답하고, 길거리는 더럽고, 지하철은 Train Traffic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뉴욕의 공기는 좋다. 특히 맨하탄의 어퍼 웨스트(Upper West) 지역에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있 리버사이드 공원(Riverside Park)의 의자에 앉아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도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아내 덕분에 모닝사이드 하이츠(Morningside Heights)라는 동네에서 3년 정도를 살았다. 이 동네에 살 때 거의 매일 아이들과 리버사이드 공원에 놀러갔다. 천천히 산책을 하기도 하고, 음악 공연을 보기도,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뛰어 놀기도 했다. 그 때마다 올려다 본 하늘은 기분좋은 하늘색(그야말로 하늘색!)을 입고 있었다.

오늘 새로운 동네에서 아이들과 산책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저거봐. 비행기야. 한국가는 비행긴가봐!"

 비행기가 날아오르며 만든 하얀 두 줄에 기분이 좋다.

2017년 3월 14일 화요일

방귀에 관한 그녀의 말

S: "......."

그녀가 말했다.

Y: "그냥 못 들은 척 해라."

2017년 3월 11일 토요일

열 손가락 사이에

-열 손가락 사이에-

당신, 다섯 손가락 사이에는
이어붙인 낮과 밤을
또 다른 다섯 손가락 사이에는
내 이불의 저 안쪽을 잘라 달아 드릴게요

그러면, 더 이상 이불이 아닌
그 천 조각으로 당신의 얼굴을 닦아 주세요
낮과 밤으로 당신 눈을 비벼 주세요
그리고 새벽에는 밑으로 들어오세요

다름에 관한 그녀의 말

M: "쟤는 계속 땅을 보고 걸어다니네."

Y: "원래 사람들은 조금씩 다 다른거니깐. 아기는 저렇게 걷기도 하는거지. 아빤 그것도 몰라."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고해성사

부끄러웠던 지난 날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리고 구차하게도 변명을 하고자 한다. 그래도 먼저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중학교 1학년 이었던 1996년도 였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상도동 성당의 복사단 후배들의 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매우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행동이었다. 몇 번이고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고, 더욱 미안하게도 나의 폭력에 상처 입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더 부끄럽다. 그 당시에 바로 사과를 했어야 했다. 너무 늦었지만 나는 이 곳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지금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지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 토요일마다 어린이 미사를 열심히 다녔던 적이 있다. 성당을 다니기 싫어했던, 그리고 다니기 싫은 이유가 분명했던 두살 터울의 형과 차별화된 모습을 부모님께 보이고 싶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형이 내세운 "종교의 자유"라는 논리는 꽤나 논리적이고 탁월한 의견이었다.) 나는 4학년이 됨에 따라 신부님 옆에서 미사 집전을 돕는 복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또한 형과 차별화되고자 했던 마음이 약 70% 정도는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머지 30%는 아마도 그 작은 그룹에서라도 눈에 띄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고해성사는 이로부터 3년 후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3년 후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상도중학교라는 곳이다. 상도중. 정글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피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는 학생들 사이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정글 속에 던져진 짐승녀석들은 서열을 정하기 바빴고, 선생들은 그런 짐승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보다 더한 짐승이 되어 희생양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생들의 희생양은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웠던 학생들 보다는 오히려 그 어디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리고 그 자신들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조용한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선생들은 오히려 일진들을 잘 이용했다. 아침 조회 시간 운동장에서 1학년들을 줄세웠던 것은 체육 선생들의 명을 받은 2학년 일진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8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1996-1997년에 일어났던 이야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선생들이 아무리 미쳤어도 강남 8학군 지역의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곳 상도중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사당고개와 봉천고개를 넘어오는 아이들이었기에 선생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아이들도 서로에게 가차없이 짐승 짓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교과서 보다는 창문 밖을 보는 시간이 많았지만, 공부를 어느 정도라도 해야 선생들과 아이들의 짐승 놀이에서 간신히 깍두기 역할을 부여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조금 했다. 그리고 나의 부모는 그 동네에서는 흔치 않은 학력과 직업을 가진 학부모였기에 어느 정도는 그 정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셈 이었다. 그래도 정글은 정글이고, 짐승은 짐승이다. 나도 여러 차례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정글의 법칙을 성당 복사 모임에 옮긴 적이 있다.

긴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고해성사는 시작된다.

나는 이런 정글의 법칙을 성당 복사 모임에 옮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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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조금만 더 변명을 해야겠다. 성당을 다니는 어린이들에게 "복사를 선다."라는 것은 일종의 지위이자 특권이다. 첫 영성체를 마치고 성찬의 전례 후에 줄을 서는 것이 연공서열에 의한 보상이라면, 첫 영성체 교육 기간 중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복사라는 지위는 특권이었다. 복사복을 갈아 입기 위해 들어가는 곳은 그들만의 비밀 스러운 공간이며, 수녀님들과 신부님들과의 가까운 거리는 그들의 특권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그들은 안다. 그들이 누리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의 특권집단은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위계와 규율을 만든다. 그렇다. 신부님 옆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 아이들은 통제된 정글을 만든다. 그리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통제된 정글을 벗어났지만 곧 바로 통제되지 않는 정글 속에 던져졌다. 스포츠 머리를 하고 정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 던 나는 몇 번 통제된 정글을 찾아갔다. 초등학교 시절 함께 복사를 섰던 친구가 복사단 단장을 하고 있었고, 내가 보기에 복사단은 예전의 위계와 규율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짜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짐승의 눈에 비친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불량했고, 나는 진짜 정글을 잠시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정글의 언어와 얼차려를 소개하였다. 간단한 맛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도남중과 상도동 성당의 지리적 차이는 꽤 컸고, 그에 상응한 문화적 차이도 꽤 컸다. 적어도 성당은 사당고개와 봉천고개로 둘러쌓여있지 않았다. 이 맛보기가 그들에게는 폭력이었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후배의 아버지가 성당에서 나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말하였다.

"너 이 새끼. 내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 알아서 해라. 가만히 안 둔다." (순화했다!)

협박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의 말이 무서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고작 맛보기였는데 어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났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다. 당시 나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그 어느 누구도 이 글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저 지난 간 일에 대한 자기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고 이 일이 부끄러울 듯 싶다. 이 곳에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