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5일 토요일

고해성사

부끄러웠던 지난 날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리고 구차하게도 변명을 하고자 한다. 그래도 먼저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중학교 1학년 이었던 1996년도 였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상도동 성당의 복사단 후배들의 태도가 나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매우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행동이었다. 몇 번이고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고, 더욱 미안하게도 나의 폭력에 상처 입은 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더 부끄럽다. 그 당시에 바로 사과를 했어야 했다. 너무 늦었지만 나는 이 곳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지금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지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 토요일마다 어린이 미사를 열심히 다녔던 적이 있다. 성당을 다니기 싫어했던, 그리고 다니기 싫은 이유가 분명했던 두살 터울의 형과 차별화된 모습을 부모님께 보이고 싶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당시 형이 내세운 "종교의 자유"라는 논리는 꽤나 논리적이고 탁월한 의견이었다.) 나는 4학년이 됨에 따라 신부님 옆에서 미사 집전을 돕는 복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또한 형과 차별화되고자 했던 마음이 약 70% 정도는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머지 30%는 아마도 그 작은 그룹에서라도 눈에 띄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욕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고해성사는 이로부터 3년 후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다.

3년 후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상도중학교라는 곳이다. 상도중. 정글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피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는 학생들 사이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정글 속에 던져진 짐승녀석들은 서열을 정하기 바빴고, 선생들은 그런 짐승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보다 더한 짐승이 되어 희생양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생들의 희생양은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웠던 학생들 보다는 오히려 그 어디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리고 그 자신들 또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조용한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선생들은 오히려 일진들을 잘 이용했다. 아침 조회 시간 운동장에서 1학년들을 줄세웠던 것은 체육 선생들의 명을 받은 2학년 일진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8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1996-1997년에 일어났던 이야기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선생들이 아무리 미쳤어도 강남 8학군 지역의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곳 상도중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사당고개와 봉천고개를 넘어오는 아이들이었기에 선생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아이들도 서로에게 가차없이 짐승 짓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교과서 보다는 창문 밖을 보는 시간이 많았지만, 공부를 어느 정도라도 해야 선생들과 아이들의 짐승 놀이에서 간신히 깍두기 역할을 부여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조금 했다. 그리고 나의 부모는 그 동네에서는 흔치 않은 학력과 직업을 가진 학부모였기에 어느 정도는 그 정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가진 셈 이었다. 그래도 정글은 정글이고, 짐승은 짐승이다. 나도 여러 차례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의 희생양이 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정글의 법칙을 성당 복사 모임에 옮긴 적이 있다.

긴 변명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고해성사는 시작된다.

나는 이런 정글의 법칙을 성당 복사 모임에 옮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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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조금만 더 변명을 해야겠다. 성당을 다니는 어린이들에게 "복사를 선다."라는 것은 일종의 지위이자 특권이다. 첫 영성체를 마치고 성찬의 전례 후에 줄을 서는 것이 연공서열에 의한 보상이라면, 첫 영성체 교육 기간 중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복사라는 지위는 특권이었다. 복사복을 갈아 입기 위해 들어가는 곳은 그들만의 비밀 스러운 공간이며, 수녀님들과 신부님들과의 가까운 거리는 그들의 특권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그들은 안다. 그들이 누리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의 특권집단은 그 안에서 자기들만의 위계와 규율을 만든다. 그렇다. 신부님 옆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 아이들은 통제된 정글을 만든다. 그리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통제된 정글을 벗어났지만 곧 바로 통제되지 않는 정글 속에 던져졌다. 스포츠 머리를 하고 정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 던 나는 몇 번 통제된 정글을 찾아갔다. 초등학교 시절 함께 복사를 섰던 친구가 복사단 단장을 하고 있었고, 내가 보기에 복사단은 예전의 위계와 규율을 잃어가고 있었다. 진짜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짐승의 눈에 비친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불량했고, 나는 진짜 정글을 잠시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정글의 언어와 얼차려를 소개하였다. 간단한 맛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도남중과 상도동 성당의 지리적 차이는 꽤 컸고, 그에 상응한 문화적 차이도 꽤 컸다. 적어도 성당은 사당고개와 봉천고개로 둘러쌓여있지 않았다. 이 맛보기가 그들에게는 폭력이었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 후배의 아버지가 성당에서 나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말하였다.

"너 이 새끼. 내 자식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너 알아서 해라. 가만히 안 둔다." (순화했다!)

협박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아저씨의 말이 무서웠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는 고작 맛보기였는데 어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났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다. 당시 나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그 어느 누구도 이 글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저 지난 간 일에 대한 자기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고 이 일이 부끄러울 듯 싶다. 이 곳에서라도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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