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by 천명관 |
한 사내가 마을에 나타났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강 건너 옆 마을, 그 너머 최근 들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강 주변의 작은 도시까지도 소문이 난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다. 누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를 천 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세상의 규칙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자유인이며, 언제고 어딘가로 떠나 버릴 수 있는 방랑자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인생을 망친 잉여 인간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혹여나 그가 내일 아침이면 남은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고 떠나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기도 했다. 한편 그가 내놓은 이야기를 두고, 혹자는 그저 현란한 구라에 지나지 않는다 무시하기도, 기존의 이야기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온 방식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이 사내의 재주를 깎아 내리려 했지만, 깨나 멀리 떨어진 도시의 사람들까지 이 작은 마을에 몰려들어 그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그의 말솜씨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수결의 법칙이었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도 옮겨졌다. 가끔은 무시무시한 전래 동화로, 가끔은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랫말로, 그리고 아주 가끔은 비정한 세상사의 한 토막 뉴스 정도로 편집, 각색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대부분의 경우 아랫도리에 피가 쏠려 몸을 배배 꼬게 만들만한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급작스레 아연실색 놀래 자빠질 결말로 끝을 맺곤 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천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114)
발도 없이 퍼지고 퍼진 천 선생의 이야기는 멀리 떨어진 큰 도시 사람들의 귀에 까지 다다랐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명절 연휴가 지나고 직장에 돌아온 이 나라의 산업역군이 고향 집에서 전해 들었다는 야시시한 이야기가 그 발단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작가가 천명관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항간에는 천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무명의 작가가 그의 성씨를 빌려와 작가의 이름으로 삼고, 선생의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짜깁기 했을 뿐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이 책 또한 그 맛과 향과 감촉이 알싸하고 시큼하고 끈덕진 것이 사람들의 구미에 맞았기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는 인기의 법칙이었다. 그 책의 대중적 인기에 발맞추어 큰 도시의 식자층은 고심 끝에 이 책을 '소설'로 분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그래야 그들도 야시시한 농담을 좀 써먹을게 아닌가!), 사람들은 그들의 분류표를 개의치 않았다. 천 선생은 이미 어디론가 떠난지 오래고, 그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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