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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by 김인정 |
"나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은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아픔'이라는 내감을 기술한다. 사적 감각을 언어적 표현으로 발화할 때, 이 문장은 더 이상 '사적 언어'가 아니다. 발화자는 '아프다'라는 언어적 표현의 자리, 쓰임, 문법, 문맥을 이해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언어 공동체의 참여자로서 자신의 내감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혼잣말이라 할지라도.)
'사적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반대 논증은 언어 습득과 사용을 위해 '이미 마련된 자리'를 요청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적 개념이 사회적 실천의 통로가 될 수도 있을까? 이를 좀더 확장된 논의로 이끌 수 있을까?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김인정 기자/작가의 책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는다. 내 눈은 작가의 잘 정돈된 문장을 따라가면서도 책 뒷편에 떠오르는 몇몇 단어들을 힐끔거린다: 얼굴, 시선, 틈, 아픔, 타자, 슬픔, 상실, 고통, 언어. 우리가 마련한 자리는 그들에게 충분했던 것일까? 그들의 울부짖음과 호소는 우리에게 닿았던가? 그들이 가까스로 내뱉은 몇 마디의 말이 활자가 되어 지면에 실리고, 음성으로 기록되어 전파를 탄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전의 외침들과 뒤섞여 어딘지 모를 구석에 켜켜이 쌓여간다. 잠시 후에 뒤따라올 또 다른 외침을 기다리면서. 주목받지 못한 목소리는 광장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그들의 아픔은 결코 내것이 될 수 없음을 알지만, 그들의 언어를 가로막는 장벽은 사라져야 한다. 이처럼 당위를 외치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우리는 타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인가?'
주체의 인식, 행동, 가치, 언어, 존재는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하고,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주체의 정당화가 타자를 배제한 채로 가능할까? 타자가 지닌, '나'와 유사한 감각, 언어, 문화, 양식, 인식을 매개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비록 자주 어긋나고, '나'의 기준을 벗어나고, 서로 다른 언어가 이해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할지라도 말이다. '주체'라는 틀에 갇혀있는 '나'는 타자의 존재가 낯설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응답을 요구한다: "나는 아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그들의 요구 앞에 선, 나의 윤리적 응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우리 안에 '이미 마련된 자리'를 조금씩 넓혀갈 수 있을까? 새로운 단어를 발견하고, 언어의 장벽을 낯추고, 문화의 다채로움을 수용하고, '어긋남'이라는 새로운 빛깔로 광장을 채워나간다. 이는 매우 더디고, 때로는 지루하고, 결국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느새 '우리'로 확장된다. '나'의 결단이 '너'를 향하는 순간에 비로소 윤리는 가능하다.
기자의 역할, 한계, 고민. 그리고 깊은 성찰. 그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아름답고, 그녀의 시선은 슬프지만 강인하다. 이야기 속 대상에 애정이 담긴 글이 갖는 질감이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언제나 내 인식 바깥의 타자들을 염두에 둔다. 그들에게 기꺼이 응답하려는 용기가 그녀의 글에 배어난다.
각자의 시선이란 잔인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우리의 망막에 고인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던져 놓은 신문 뭉치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물건을 만들듯이, 시야 어딘가에 머무르다 펼쳐보게 될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며 되도록 조금 더 천천히, 더 담담한 뉴스를 만드는 건 어떤가. 시선을 잡아채는 것이 반드시 변화를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한 지 오래이니, 오래 걸리더라도 있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알려야 할 것을 균형있게 생산해 내는 매체로 머무는 건 어떤가. (p.238)
세상은 복잡다단하고, 언제나 그대로일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변한다. 개인의 소망은 미약하고, 내가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는 거대한 성벽으로 남아있다. 놉고 단단한 벽에 깨져버린 계란의 편에 서겠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김인정 기자/작가의 시선이 마치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