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by 레이먼드 챈들러 (Raymond Chandler) 저/김진준 역 |
필립 말로는 탐정이다. 모든 탐정이 매력적일 수는 없다. 모든 탐정이 그와 같이 냉소적일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그는 분명 냉소적이다. 모든 사건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다. 그런데 그 한 발짝이 문제긴 하다.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냉소는 사실 언제든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발걸음이다. 그리고 한 발짝 다가선 발걸음은 여지없이 연민과 애정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말로의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그 발걸음을 옮길지 말지는 언제나 그 자신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애쓰지 않는 인물이다. 우선 주변의 사람들과 사건을 관찰할 뿐이다. 김렛 한두 잔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핀다. 가끔은 혼자 체스를 둔다. 그리고 다시 관찰하고 생각하다, 때가 되었다 싶으면 몇 마디를 내뱉는다. 건조한 말투와 냉소적인 태도, 그 이면에는 날카로움이 있다. 가끔 내뱉는 빈정거림에는 애정과 이해가 뒤섞여 있다. 그래서 필립 말로는 매력적이다.
"이 사람은 두꺼운 소설책처럼 쉼표를 잔뜩 찍어 가며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11장)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어요, 로링 부인. 워낙 알쏭달쏭한 인간이라서." (31장)
"그는 마치 차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차를 마셨다." (32장)
"달빛에 물든 벽돌담처럼 침착한 사람이었다." (47장)
"1백 명 중 두 명한테는 결혼 생활이 행복할 수도 있겠죠. 나머지는 그저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그렇게 20년쯤 지났을 때 남자한테 남는 거라고는 차고 안에 들여놓은 작업대 하나가 고작이거든." (50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나, 매우 뛰어난 문학적 수사는 없다. 그렇지만 <기나긴 이별>은 여전히 좋은 책이다. 대부분의 훌륭한 소설에서는 작가가 새겨 놓은 깊은 사유의 흔적과 작품의 주제가 흥미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때로는 작가가 창조한 매력적인 인물 한 명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마도 작가 자신보다 그가 창조한 인물 필립 말로가 더 유명하지 않을까? 아서 코난 도일보다 셜록 홈즈가 더 유명하듯.)
몇 년 전 프랑스에 사는 동생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라비크(소설 <개선문>의 주인공)가 즐겨 마셨던 칼바도스는 너무 독했는데(사과주라더니...), 말로가 테리와 나눠마신 김렛은 어떨지 궁금하다. 이걸 마시려면 아무래도 술집에 가야겠다. 굳이 우리 집에 로즈 사의 라임 주스를 사 놓을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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