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6일 금요일

한국인 마이끌은 일본어를 한다.

이곳에서 나는 '마이끌'이다. 마이끌이라는 이름은 "여러분. 수업시간에 사용할 영어 이름을 함께 만들어 볼까요?" 라는 식으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다. 나는 엄연히 법적으로, 그리고 문서상으로 마이끌이다. (트럼프 형님이 좋아하겠지?)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한국인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영어 보다는 일본어가 편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한국인 마이끌은 일본어를 한다.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점은 별로 많지 않다. 자막 없이 일본 드라마나 예능을 즐길 수 있다거나, 만화책을 볼 수 있다는 정도 뿐이다. 가끔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일본을 떠나온지 벌써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대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일본어를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소설가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雪国)의 첫 문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첫 문장,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내가 지금껏 읽었던, 그리고 앞으로 읽게 될 그 어떤 소설의 첫 문장도 이 보다 완벽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문장은 그대로 한편의 시와 같다. 이 문장을 곱씹으며 읽기를 반복한 적이 있다. 이 첫 문장 안에서 작가의 시선, 기차에 타고 있던 시마무라의 시선, 그리고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나의 시선이 동시에 겹쳐진다. 우리는 모두 기차 밖의 설국을 바라본다. 이와 같은 미적 체험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雪国であった。(설국이었다.)

그렇게 설국은 '지금' 그리고 '여기'가 된다. 작가는 설국을 말하고, 시마무라는 설국에 도착하였고, 나는 곧 시마무라가 된다. 내가 이 문장을 통해 느끼는 것은 현실과의 단순한 차단이 아닌, 현실로 부터 다른 세상으로의 이행이다. 현실로 부터의 도피가 아닌, 현실과 닿아있는 여정이다. 나의 현실은 여전히 저 터널 뒤에 있지만,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더 큰 초월감을 느낀다. 작가는 설국을 말하며 아래와 같이 끝을 맺는다.

-であった。(-이었다.)

 이 문장의 끝이 초월감을 자극한다. -だった(-였다.) 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왜 굳이 -であった。(-이었다.) 라고 썼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정확히 분석할 만한 재주도 없다. 그러나 이 끝맺음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첫 문장에 대한 괄호 안의 한국어 번역보다, 원어의 문장에서 느끼는 나의 미적 체험은 문장의 끝맺음이 "-であった。(-이었다.)" 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그저 짐작해 본다. 작가의 거리를 두는 듯한 객관적 시선 속에서, 나는 시마무라의 주관적 시선을 통해 기차 밖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설국이다. 설국은 그 곳에 있다. (あった。)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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